수성최씨 홈-시조 상계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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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10-01-06 23:44 조회2,686회 댓글0건본문
우리 시조 수성백 영규공의 상계(상계) 문제로 아직도 족보(대동보?)를 발간하지 못하고 있다.
시조상계(소목)를 잘못된 계대임이 밝혀진 경진보의 17세대로 한다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로 조상님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 될 뿐 아니라 타의 질책을 받을 우려까지 있다 하며, 예날과 달리 지금은 사기(史記)를 비롯한 지석 발굴, 기타 여러 가지 고증자료가 밝혀졌을 뿐만 아니라. 상계가 같은 경주김씨와 안동김씨는 이에 따라 수정하였는데 우리만 그릇된 고집으로 17세기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하고,
한 종중(춘천종중 일부)에서는 시조 상계를 옛날(1760년)에 발간된 족보의 17세로 하지 않는 것은 조상님에 대한 예가 아니므로 족보를 구입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이미 제출한 수단과 비용을 회수하겠다는 것이다.
대동보편찬위에서는 이미 수권(수권:시조 이하의 계보를 제외한 여러 가지 사료)을 제외하고 자손록(4권 분량)은 기 신청된 수량을 인쇄하다가 위 사건으로 중단된 듯 하다.
이미 인쇄소와 인쇄량에 대한 계약을 체결했고 인쇄는 진행이 중단된 채 머물고 있으니, 그 비용은 어찌하고, 대동보가 나오기만 기다리는 종인들의 원망을 어찌할까?
문중 분란을 심히 걱정하시며 춘천으로 평택으로 찾아다니면서까지 화합을 위해 고심 노력하는 대종회장님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는 대종회 회장단(고문 포함)에서 잘못을 저지른 때문이다.
소목(위로부터의 조상님 차례)을 밝히는데 타당성 여부를 신중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아무 지식도 연구도 없이 이것으로 할까 저것으로 할까 다수결로 정한 때문이다.
그 옛날 우리 조상을 어떻게 확실히 알 수 있느냐 하고 수년간 심혈을 기울여 고증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연구하여 정립한-객관적으로 그 누구도 그르다고 할 수 없는-시조 상계 내용을 세세하게 살피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파당적인 다수결로 결정하는 사람들을 과연 대종회 대표들이라 할 수 있겠는가?
2007년부터 부록편찬위원회가 구성되어 연구를 했으니, 회장단을 비롯한 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연구내용을 발표하도록 하고 타당성 여부를 검토했다면 이와 같은 일은 없었으련만,
발표 한 번 제대로 하는 것을 못보았다. 이유는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된다는 것. 실은 파당을 지어 타당성 여부는 들으려하지도 않고 옹고집으로 일관하는 사람이 문제였다.
그간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중철씨는 연구내용(설명서와 고증자료)을 복사하여 각 파 회장단을 비롯한 임원들에게 우송하였다. 그 분량이 장난이 아니다. 내용물이 큰 봉투에 넣은채 두께를 재보니 1센치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그 후로도 참고가 될 문건이 생기면 또 우송하곤 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경주, 안동등지를 비롯하여 규장각과 계보연구회, 서울지역 경주,안동김씨 종친회, 경순왕능소 등지를 다니며 고증자료를 얻고자 밥사주고 술사주고 숙박하며 쓴 돈이 3,4백은 될 것이라고 한다.
대동보편찬사무실에서 볼 때, 중철씨를 보면 소파에는 잘 앉지도 않지만 혹 앉을 때 자세가 공손하더만, 회장단과 고문의 일원인 사람은 대부분 앉은 자세마저 다리 꼬고, 몸 비틀고, 결국 보니 속 없는 위세만 알차게 들었던게다.
중철씨 연구내용을 말로써 각 고증문건을 들춰가며 설명하면 쉽게 잊어 버리고 이해도 잘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컴퓨터를 활용한 프로젝트로 발표하려고 준비를 마치고 발표 기회를 얻고자 수차 당부하였으나, 애초부터 그 고집을 고수하고자 마음을 굳힌 상태이니 들어줄 리 만무하였다.
대동보편찬위원장으로 계시면서 지난해 대종회장까지 선임된 분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그 착한 분을 모두들 너무 괴롭히고 있다. 물러나고 싶어도 그럴 수 없고, 참으로 이 보다 딱한 일이 또 있을까? 사람을 잡을 작정인지 겸직까지 시켜놓고...
위 표는 경진보의 시조상계이다. 여건이 지금과 달리 지극히 열악했던 17세기에, 우리 조상님께서는 먼 옛날의 선계를 밝히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니 경주김씨 또는 안동김씨의 선계가 명시된 족보를 필사하여 경진보에 게재하셨을 것으로 생각되는 바, 경순왕의 17세손으로 되어있는데 지금 밝혀진 것은
- 계령은 은열의 子가 아니며, 한공은 계령의 子가 아니고 계삼의 子이다( 지석.김씨족보)
- 10세로 되어 있는 혼(혼)의 子는 자흥 자창 자연이 있을 뿐 이청은 없다( 사기. 충선공파 족보)
- 파란 부분, 즉 이청 이하는 안동김씨 조상이며 또한 우리 조상이기도 하다(안동김씨족보)
이는 경주김씨 족보와 삼성연원보, 계림김씨연원보에 경순왕→은열→숙승~방경(현경의 맏형)으로 계대 되어있다,
- 그러므로 은열의 장남으로 기록된 태화~혼까지는 우리 직계조상이 아니다. → 계표(系表) all
- 경주김씨계는 대다수가 분홍부분과 같이 계대하였다( 마우스포인터→바른계대 ▲ 에 대보시오)
- 파란 부분은 안동김씨 계인데, 연구 결과 숙승 밑에 원강,문웅이 있음을 삼성연원보와
계림김씨연원보, 경주김씨보 등에서 확인되고, 세대별 연차를 비교해 본 결과 두 분을 계대함이
맞음을 알았다. 안동김씨에서도 두 분을 계대해야 한다는 추세이다. → 안동김씨에서
다만, 숙승공으로부터 의화공까지의 기록이 사기 또는 지석문 등 이에 준하는 명쾌한 기록자료가 발견되지 않은 것이 안타까우나 삼성연원보를 비롯한 경주김씨 족보, 계보연구회 연구자료 등을 반박할 합당한 이유가 없다.
그래서 우리 시조 문혜공(영字규字)은 경순왕 13세손이 맞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간 대동보에 위 경진보의 계대를 우리 시조의 상계라고 게재하면 안되는 것이,
- 경주김씨 소목(계대)을 잘못된 옛 것으로 되돌려 뒤죽박죽이 되고, → 위 표에서 "바른계대" 참조
* 바르게 된 경주김씨 계대는 고려사에 매우 상세하여 활동연대를 살펴도 매우 합당함. → 연표
- 안동김씨 이청을 혼의 子로 계대함으로써 고려사를 비롯한 백과사전 등과 기록 비교를 하면 생존연대에 극심한 차이가 난다. 우리가 경순왕의 몇대손인지를 경주김씨와 이야기할 때 어떻겠는가?.
* 14세로 된 효인과 8세로 된 태서는 고려 고종조에 19년 차로 공거(공거)를 했다. → 고려사 志
* 혼은 우리 시조와 같은 시대 사람인데 7대조로 계대되었다. → 琿↔우리시조 비교
* 대마도 정벌로 유명한 방경공의 손자 승택공은 우리 시조의 종형(현경의 형)인데 그 승택공의 장인이 혼이다. → [보기]
과거 발간된 우리 족보 기록내용도 살펴보면 [기유보 기록]
- 봉모 : 習禮度美容儀 神宗朝拜樞密副使 至門下侍郞平章事,
- 태서 : 明宗朝文科 門下侍郞平章事 諡文莊公,
- 경손 : 知樞密事分道上將軍 高宗時蒙古兵侵高麗諸城望風奔潰獨龜城堅守不下蒙古兵退享龜城旌功祠
- 방경 : 左侍中上洛伯 諡忠烈公 康宗熙寧七年壬申母夢餐雲霞而生忠信孝友嚴毅寡言享年
八十九 配享崇義殿 配竹山朴氏父知制誥益旌
경손(경손)과 방경(방경) 두 분의 기록내용을 살피면
경순왕 8세로 된 경손공은 고려 고종조에 상장군으로 몽고가 침입하여 고려의 모든 성이 무너질 때 구성(龜城:구주)을 혼자 견고히 지킨공으로 향사를 마련했다고 기록했고,
경순왕 16세로 된 방경공은 강종희녕(熙宗을 말하는듯)7년 임신에 모친께서 찬란한 운하의 꿈을 꾸고 태어나셨다고 기록되어있다.(강종재임:1212~1214)(고종재임:1214~1260)
태서를 효인공의 6대조, 7대조로 계대하였지만 이 기록으로 본다면 두 분의 연령차가 많지 않다(동시대에 생존하셨다) 다른 분들의 기록도 잘 살펴 볼 일이다
이 모든 상황으로 보아 경주김씨와 안동김씨에서 그냥 보고만 있겠는가?
고집을 부릴 것을 부려야지 !.... 과연 춘천종중과 통정공파의 모든 사람들이 그 대표자가 하는 행위를 알고 있는지? 참으로 한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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