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사람들은 자신의 용모나 재주가 남만 같지 못함을 불평한다. 잘난 사람을 부러워하면서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꿈을 꾼다. 그러나 아름다운 용모나 뛰어난 재주가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것은 아니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은 곧 자신의 생명에 대한 사랑이다. 눈앞의 이익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단축하지 않는 것, 그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길이다.
나면서부터 다리를 절고 키가 작은 사람은 용모가 아름다운 사람과 나란히 서서 자신을 보게 되면, 제 몸이 못난 것을 싫어하고 남이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지 않는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신이한 도술을 가지고서 그 용모를 바꾸어 주되 매우 위험한 곳으로 가게 한다면, 저들은 반드시 머뭇거리다가 악착같이 줄행랑을 치며 그저 뒤쫓아올까봐 겁을 낼 것이다. 이를 보면 그 사람도 제 몸을 아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남들이 부귀한 것을 보면 모두 사생결단하여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급급하게 부귀를 구하려고 한다. 정말 제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면 서로 싸워 밀치고 빠뜨리면서 마침내 또한 제 자신을 죽이는 데까지 가면서도 후회하지 않고, 오히려 물욕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자신의 바른 성명(性命)을 바꾸어버린다. 이러니 다리를 절고 키가 작은 사람에게 비웃음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비록 그러하지만 이는 정말 따질 필요가 없다. 예전 가의(賈誼)와 조조(鼂錯)처럼 뜻이 있는 선비도 개연히 고요(皐陶)와 기(夔)와 이윤(伊尹)과 부열(傅說)의 공업을 사모하여1) 간곡하게 예악(禮樂)과 인의(仁義)의 학설로 그 임금에게 여러 차례 벼슬을 구하여 천하에 불세출의 공을 세우려 하였지만, 어떤 사람은 끝내 뜻을 얻지 못하여 비분과 우울로 인하여 스스로 제 몸을 손상하여 요절하였고, 어떤 사람은 국가의 안위를 도모하려다 제 몸이 먼저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비록 그 뜻이야 이익을 위하다 죽음을 당한 자들과 같지는 않겠지만, 외물 때문에 제 성명을 바꾸어 버렸다는 점에서는 한가지다. 게다가 또 어찌 군자와 소인을 쉽게 구분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몇 사람의 지식이 다리를 절고 키가 작은 사람이 제 몸을 사랑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였다.
나의 벗 이평서(李平瑞) 군은 성곽 남쪽 소동(小洞, 남소동(南小洞))에 집을 짓고 도연명(陶淵明)의 시에 나오는 “내 집을 사랑한다.”는 의미의 애오려(愛吾廬)에서 뜻을 취하여 그 집을 애오헌(愛吾軒)이라 하였다. 아, 도연명은 집이 가난하여 농사를 짓고 살았지만 자족자급하기에 부족하였다. 나는 그 누추한 토담집이 남들은 감당하지 못할 곳이지만 도연명은 편안하게 스스로 사랑하여 종내 집을 화려하게 할 마음이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는 그 뜻이 이욕(利慾)을 구하는 데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연명은 은자가 아니었으니 어찌 세상에 대한 의욕이 없었다고만 할 수 있겠는가? 가령 도연명이 세상에 나가서 요직을 맡게 되었다면, 가의와 같은 근심이나 조조와 같은 화를 당하였을 것이니, 비록 제 집을 사랑하고 싶어도 또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급 관리가 되어 80여 일만에 아쉬워하면서 돌아가게 되어 그제서야 벗과 교제를 끊고 누추한 집에 살면서 제 집을 사랑한다고 스스로 여기게 되었다. 나는 도연명이 그 집을 사랑한 것은 바로 제 몸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후세 사람 중에는 그 깊은 뜻을 알고 발명한 자가 없다.
지금 평서는 성격이 담박하고 지조가 고상하여 그가 지은 몇 칸의 집은 도연명이 살던 누추한 토담집에 비하여도 그다지 사치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의 뜻을 보더라도 아마 이욕 때문에 그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또한 과거에 급제하여 두 차례 간관(諫官)의 벼슬을 하였지만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니 그 뜻이 또한 조금도 공명을 이루는 데 있지 않은 자가 아니겠는가? 나는 평서가 그 집을 사랑하는 것이 또한 도연명의 뜻과 과연 같은지는 모르겠지만, 다리를 절고 키가 작은 사람이 스스로 제 몸을 사랑하는 것에는 가히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남원거사(南園居士)가 기문을 적는다.
1) 가의(賈誼)와 조조(鼂錯)는 모두 한나라 때의 문신으로 개혁을 주창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가의는 좌천되고 조조는 죽임을 당하였다. 고요(皐陶)와 기(夔), 이윤(伊尹), 부열(傅說)은 모두 중국 고대의 뛰어난 정치가로 뛰어난 재상의 모범이 되었다.
▶ 누각아집도_이인문_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심낙수(沈樂洙),〈나를 사랑하는 집[愛吾軒記]〉,《은파산고(恩坡散稿)》
[해설]
조선 후기의 문인 심낙수(沈樂洙, 1739-1799)는 정조대 정국의 중심에 서 있던 정치가이다. 권신 홍국영(洪國榮)과 김귀주(金龜柱) 등을 탄핵하다가 오히려 벼슬에서 쫓겨나고 귀양길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감각적인 글을 잘 지은 심노숭(沈魯崇)과 함께 자유로운 사고를 바탕으로 한 발랄한 문장을 잘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낙수의 벗 중에 이규위(李奎緯, 자는 평서(平瑞))라는 사람이 있어 그의 집 이름을 애오헌(愛吾軒)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문인들은 나를 사랑하라는 뜻의 ‘애오’를 매우 좋아하였다. 그 연원은 도연명(陶淵明)의〈산해경을 읽고서[讀山海經]〉라는 시에서 “새들은 기쁘게도 깃들 둥지가 있듯이, 나도 또한 내 집을 사랑하노라.[衆鳥欣有托, 吾亦愛吾盧]”라 한 데 있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이 구절을 따서 인생의 좌표로 삼은 인물이 참으로 많다. 조선 중기의 문인 유성룡(柳成龍)은 안동 하회마을에 옥연서당(玉淵書堂)을 짓고 그 곁에 두 칸의 작은 집을 애오려라 한 바 있다. 홍대용(洪大容) 역시 천안의 고향집 이름을 애오려라 하고 조선과 중국의 벗들에게 시를 받아 시첩까지 만들기도 하였다. 19세기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인 심상규(沈象奎)의 가성각(嘉聲閣) 동쪽에도 오역애로려(吾亦愛吾盧)라는 작은 집이 있었다.
그런데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심낙수는 얼굴이 못나고 키가 작은 사람이 늘 자신의 용모를 바꾸려 하지만 그 목숨을 앗아간다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 하였다. 못난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는 것처럼, 지식인은 자신의 뜻을 생명처럼 알아 권력과 이익 때문에 뜻을 꺾지 않는 것이 바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왕응(王凝)이라는 사람이 죽자 그 아내가 유해를 지고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여관 주인에게 손목을 잡히자 도끼를 가져다 그 손목을 잘라버렸다. 박지원(朴趾源)은 또다른 애오려에 대한 기문에서 왕응의 아내와 같다면 자신을 사랑할 바를 아는 것이라 하였다. 자신의 뜻을 꺾지 않는 것, 이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김종후(金鍾厚)가 벗 홍대용의 애오려를 위해 쓴 글에서 “내 귀를 사랑하면 귀가 밝아지고 내 눈을 사랑하면 눈이 밝아진다.[愛吾耳則聰, 愛吾目則明]”라는 명언을 남겼다. 자신을 사랑하여 귀가 밝고 눈이 밝은 총명(聰明)함으로 자신의 뜻을 굳게 지키는 것이 선비의 마음이다.
글쓴이 / 이종묵
*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 저서(역서) - 해동강서시파연구, 태학사, 1995. - 한국 한시의 전통과 문예미, 태학사, 2002. - 누워서 노니는 산수, 태학사, 2002. - 浮休子談論, 홍익출판사, 2002. - 조선의 문화공간(1-4), 휴머니스트, 2006. - 우리 한시를 읽는다, 돌베개,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