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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경의 고향 영가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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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9-10-13 14:06 조회2,4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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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가군(永嘉郡)은 안동 예안면 용두산 아래

  1181년(명종 11) 최선(崔詵, *최종준의 부)이 지은 용수사 개창비(龍壽寺 開創碑)1)에 보면 태백산 남쪽 3백여 리쯤에 있는 용두산을 배후에 두고서 영가군(永嘉郡) 도회지를 이루었다고 하였다. 영가군은 현재의 안동시 예안면 일대다. 이곳 용두산에 용수사(龍壽寺)를 세웠는데, 최유청(崔惟淸, *최선의 부, 1095~1174)과 절친했던 고승 원석윤(元釋胤, ?~1173)이 왕명(의종)에 따라 주관하여 1165년 공사를 시작하여 세운 것이다.

  김방경 묘지명에 김방경(金方慶)은 영가군(永嘉郡) 사람2) 이라 하였다. 그리고 김방경 가의 딸들은 출가후 봉작될 때 모두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3)에 봉작되고 있다.

  1300년 김방경이 죽었을때 유언에 따라 조부 묘소 근처인 예안현(禮安縣 : 안동시 예안면) 서쪽 산기슭에(현 안동시 녹전면 죽송리) 장례를 지냈다고 하였다.

  <1580년 경진보>에 보면 김방경의 조부 김민성은 묘는 ‘안동부서 일식 화림촌’에 있다고 하였다. ‘안동부(예안현) 서쪽 일식 거리에 있는 화림촌 이라는 곳’으로 보이는데, 지금의 김방경 묘 부근인 녹전면 죽송리 능골 또는 고려시대 고분군이 있는 녹전면 서삼리로 보인다.

 

예안 용두산 용수사 개창기

용수사개창기 [제액(題額)]

   천하의 이름난 산은 삼한(三韓 : 우리나라)에 많고, 삼한의 빼어난 곳은 동남지방에 가장 많은데, 동남지방에서 큰 산으로는 태백산이 으뜸이다. 신령한 기운을 많이 품고서 큰 도회를 이루어 대대로 이어지니 어찌 무산(巫山), 여산(廬山), 형산(衡山), 곽산(霍山) 등이 이에 미칠 수 있겠는가.

   태백산에서부터 남쪽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며 3백여 리쯤 가다보면 갑자기 우뚝 솟아난 것이 있으니 이것이 용두산이다. 바로 영가군(永嘉郡 : 안동)이 (이 산을) 배후에 두고서 도회지를 이루었다.

   무릇 특별한 경치에는 반드시 특별한 일이 있는 법이다. 산의 남쪽에 골짜기가 있고 골짜기의 입구에는 숲이 있는데, 지방 사람들이 부르기를 대왕숲[大王藪]이라고 한다. 대개 우리 신성대왕(神聖大王 *태조 왕건) 때에 땅을 넓히며 남방에 이르렀는데 이곳에서 군사를 멈추고 3일 있다가 떠났다. (그때) 이곳 남쪽의 여러 항복하지 않았던 지역들이 곧바로 도장을 바치며 항복하였다. 지금까지 그 곳에는 큰 나무와 꽃이 많으며 나무꾼들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고서 신물(神物)이 보호한다고 이야기한다. 지역의 [3자 결락] 전하기를 만일 이곳에 큰 절을 세우면 지역 전체가 평안해져서 침략이나 기근의 걱정이 없게될 것이라고 하였다.

   앞서서 골짜기 중에 옛 절이 있었는데 여러차례 산불을 만나 모두 불타 없어지고 남은 것이 없었다. 오직 옛 주춧돌만 남아서 잡초 사이에 묻혀 있는데 어느 시대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의종(毅宗) 원년 병인년(1146 ) 가을에 각화사(覺華寺) 주지인 비구 성원(誠源)이 그 곳의 경치가 뛰어나다는 것을 듣고 마음에 들어하다가 드디어 옛날 터에서 남쪽으로 수백 보(步 : 길이의 단위. 6척(尺)에 해당한다) 되는 곳에 땅을 정하고 처음으로 건물 몇 간(間)을 지었다. 얼마 후에 성원 스님이 돌아가시고 문인인 처이(處彛)가 계승하였다. 그가 그곳에서 힘을 다하며 여러 해가 지나갔지만 전후로 지은 건물은 다만 십여 간(間)에 지나지 않았다. 처이는 힘이 다하고 재물이 떨어지게 되자 고승인 윤공(胤公 : 釋胤)에게 돌아가신 스승의 뜻이라고 말하고 도움을 청하였다.

   윤공은 스스로 와서 보고는 마음으로 허락하였다. 그때 윤공은 다섯 번 연이어서 각화사의 주지를 맡고 있었는데, 갑신년(의종 18, 1164)에 왕명을 받아 대궐로 나아갔다. 임금님께서 조용히 공에게 묻기를 “돌아가신 할아버님인 예종(睿宗) 임금께서는 일찍이 응공(膺公)을 위해 각화사를 창립하여 화엄교리(華嚴敎理)를 크게 떨치게 함으로써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그 혜택을 받고 있다. 짐(朕)도 그대를 위하여 화엄 사찰 하나를 지어 각화사에 뒤지지 않게 하려고 하는데 그대의 뜻은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공이 곧 용두산의 일로 대답하니 임금님은 크게 기뻐하시며 곧바로 일자(日者 : 陰陽을 살피는 사람) 영위(榮緯)를 시켜 그 땅을 가서 살펴보게 하였다. 영위는 그 명을 따른 후 고하기를 “큰 법을 널리 펴고 국가를 이롭게 하는 데에는 이땅이 아니면 안될 것입니다”고 하였다.


   이에 용수사(龍壽寺)라는 이름을 내리고 지방관에게 그 일을 담당하라고 거듭하여 명령하였다. 드디여 인부를 모으고 자재를 준비한 후 을유년(의종 19, 1165)에 공사를 시작하였다. 법당과 승려의 요사채, 재(齋)를 올리고 강의를 하며 휴실할 곳들을 늘려 짓고, 주방과 창고도 무려 90여 간이나 되었으며 둘러싼 회랑은 1백여 보(步)였다. 사람들은 수고롭지 않으면서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고 정해진 법도에 맞추니 예전에도 없고 이때에도 없는 훌륭한 일이었다. 이 공사에서는 문인인 운미(雲美)가 실제로 그 일을 모두 주관하였다. 또한 나무를 새기고 쇠에 칠하여 만드는데 (12자 결락) 각 하나씩으로 감실(龕室)을 덮고 번당(幡幢)을 늘어 놓으니 장엄하게 꾸민 것이 눈을 놀라게 하였다. 사찰의 기물과 비축물들이 모두 갖추어지게 되었다. 다시 장생고(長生庫)를 세워 곡물 1천 석(碩)을 쌓아두고 해마다 그 이자를 받아서 기름과 향료의 (3자 결락)으로 하였다. 이것은 모두 공의 (3자 결락)을 낸 것과 여러 문도 제자들이 시납한 물건들을 가지고 만든 것이다.


   계사년(명종 3, 1173)에 공이 갑자기 병에 들어 입적하였는데, 입적하기 며칠 전에 글을 올려 운미를 자신의 후임으로 조정에 천거하였다. 또한 뛰어난 제자인 (2자 결락) 확심(廓心)을 추천하여 이 절의 주지를 맡게 하였다. 확심도 또한 뛰어난 승려이었다. 어려서부터 공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적게 묻고 많이 깨달았으며 재능이 뛰어났다. 이 절에 머무르게 되자 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펴는데 힘썼고 또한 돌아가신 스승의 말씀을 받들어 경장(經藏)·율장(律藏)·론장(論藏)과 13층 청석탑(靑石塔) (1자 결락)을 만들었다. 이로서 큰 서원이 모두 이루어지게 되고 작업이 모두 끝나게 되었다. 이에 무술년(명종 8, 1178) 11월에 임금님께서 차(茶), 향(香)과 축하하는 사소(詞疏)를 보내고 승려 7백여 명을 모아 대화엄회(大華嚴會)를 열고 낙성하였다. 지금 임금님께서 왕위에 오르신지 아홉 번째 해이고 금(金)나라 대정(大定 : 금나라 세종(世宗)의 연호, 1161~1189년까지 사용) 18년이다.


   얼마 후에 “옛 절의 전시(田柴 : 전(田)은 농사짓는 땅, 시(柴)는 땔나무 할 땅) 10결(結)을 그대로 갖게 하고, 다시 사람은 많은데 먹을 것이 부족하여 오래 유지하는데 어려움이 없지 않을 것이 염려되므로 신녕군(新寧郡) 향복사(嚮福寺)의 전(田) 40결과 노비 30구(口) 및 근처의 묵힌 전(田) 40결(結)을 더 지급하며, 이를 좌우가승록사와 여러 담당자들에게 내려 시행하고 바꾸지 말라”는 왕명이 있었다. 이전의 향복사는 곧 의종의 태를 묻은 곳이었는데 중간에 불이 나서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 토지와 토비를 이 절로 옮겨 주고 의종의 명복을 빌게 한 것이니 (의종의) 영혼이 어둠을 벗어나서 즐거움의 땅으로 올라가는 빠른 길을 만든 것이다. 또한 매녀의 (의종) 제삿날에는 승려들에게 재(齋 : 식사)를 베풀고 의식을 행하여 명복을 빌며 매년의 일정한 제도로 삼았다. 이로써 성상께서 불사(佛事)를 넓히시는 것이 지극하심을 알 수 있고, 또한 형제에 대한 우애가 이승과 저승을 뛰어 넘음을 알 수 있다.

   이때에 이르러 주지인 확심 등이 세월이 지나가면 문자가 마멸되어 신성하신 임금님의 명령과 돌아가신 스승의 행적이 점차 흐려지고 후세에 알려지지 않을까 염려하여서 그 일을 자세히 적어서 아뢰니 임금님께서는 신(臣) 선(詵)에게 명령하여 기록하라고 하시었다.


   신이 듣건대 한(漢)나라 명제(明帝) 때 이래로 불교가 천하에 널리 퍼지니 큰 도회지나 작은 고을의 이름난 산과 빼어난 곳에 사찰을 세우고 승려들을 모으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는 모두 큰 가르침을 밝게 드날려서 불후의 도(道)로 만들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처음 만들 때에는 모두 만세(萬世)에 이어지고 천겁(千劫) 동안 유지될 것을 도모하지 않음이 없었다. 하지만 혹 계승하는 사람이 적당하지 못하거나 또는 속세 군주의 보호가 없게 되면 자산을 많이 갖추었어도 (3자 결락) 불상이 부서지고 건물이 무너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지금 이절은 윤공이 큰 덕과 평소의 바램으로 복된 땅을 얻어서 지은 것으로, 위로는 임금님께서 독실하게 보살피는 마음을 입었고 아래로는 제자로서 힘써 노력하는 사람들을 얻었으니 그 오래토록 유지될 것은 (2자 결락) 하다. 비록 겁석(劫石)이 재가 되고 태산이 띠와 같이 가늘어 진다고 하여도 어찌 그칠 때가 있겠는가. ‘근원가 깊으면 반드시 길게 흐르고, 뿌리가 단단하면 반드시 잎이 무성하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의 속성은 원(元)씨이고 이름은 석윤(釋胤)이니 북원(北原 : 강원도 원주) 사람이다. 아버지 충익(冲翼)은 주의 호장(戶長)이었다. 어머니가 임신할 때에 마니주를 품는 꿈을 꾸고 (2자 결락) 마음에 이상하게 여기었다. 태어날 때에 남과 다른 모습이 있었고, 어려서부터 부모를 잘 섬겼다. 나이 겨우 13세에 세상을 벗어나려는 뜻을 가지고 부모에게 아뢰니 부모는 이전의 꿈의 징험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안타깝게 생각하여 곧바로 허락하지 않았다. 얼마 후에 몰래 집을 나와 치악산 삼천사(三泉寺)의 혜예(慧詣) 법사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아 줄 것을 청하였다. 법사는 부모의 부탁이 아니라 하여 거절하였고, 부모는 백 가지 계책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하였지만 이루지 못하였다. 어느 날 저녁에 어머니가 공이 승려가 되어 부처님을 향하여 합장하고서 범패를 하는 꿈을 꾸었다. 이에 부모가 의논하여 출가를 허락하였다. 나이가 어렸지만 뜻은 소박한 것을 좋아하고 계행(戒行)이 뛰어났으니 또한 구마라집(鳩滅什) 문하의 호련(瑚璉)이나 보궤(簠簋)와 같은 제자이고 현장(玄奘) 문하의 침단(沈檀)이나 난혜(蘭蕙)와 같은 사람이었다. 16세가 되어 무애지(無㝵智) 국사에게 의탁하여 가르침을 받아 그 학문을 모두 이었다. 치악산 개선사(開善寺)와 삼각산 청원사(淸源寺) 등의 주지를 역임하고 마지막으로 각화사에 머물렀으니 모두 임금님께서 명령하신 것이었다. 공은 늘 도를 전하고 학문을 가르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으므로 배우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공이 머무는 곳은 저자를 이루었다. 때때로 단월들의 요청에 의해 법회에 참석한 것이 30여 곳이었다. 가르침을 받은 학자들은 모두 후에 이름난 사람이 되었다. 공은 머무른 곳에서 언제나 옛 것을 바꾸고 새것을 만들어서 불사(佛事)가 더욱 빛나게 하였다. 또한 여러 산에서 수행하는 곳을 만든 것이 모두 네 곳이었다.

   아아! 공은 도의 경지가 그와 같이 지극하였을 뿐 아니라 업적을 세워놓음도 이와 같이 훌륭하니 이를 모두 마땅히 기록하여 후대에 보여야 할 것이로다. 옛날의 일을 기록한 것을 살펴보면 전해들을 것을 믿고 기록할 뿐이었다.


   신(臣)의 아버지인 선신(先臣 : 최유청(崔惟淸 : 1095~1174)을 가리킴)께서는 일찍이 공과 친하게 지내면서 도의 요체를 묻고 지내었다. 그때 신은 어린 아이로서 좌우에서 청소하며 가만히 말씀을 듣고 행동하시는 대강을 익숙히 보았었다. 지금 문인들이 기록한 바를 살펴보니 믿고 기록할 만하다. 그러므로 그 일의 시말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 이상과 같다.

   대정(大定) 21년 신축년(명종 11, 1181) 계하(季夏 : 음력 6월) 재생백(哉生魄 : 음력 초3일)에 문림랑 시예빈소경 지제고 사자금어대(文林郞 試禮賓少卿 知制誥 賜紫金魚袋)인 신(臣) 최선(崔詵)이 왕명[宣]을 받들어 짓고 아울러 씀.

문인으로 주지인 도인(道人 : 승려를 말함) 신(臣) 확심(廓心)이 비를 세움.

문인으로 개선사(開善寺) 주지인 도인(道人) 신(臣) 입심(立心)이 글자를 새김. 


관련 인물

○ 최유청→최선(→최종준, 최종재) 

  * 최유청-최선 : 1165-1181 예안 용수사 건립  * 최종준 : 1239년 봉화 청량사 다라니 조성

  * 조영인→조충(처부 최선)→조계순→조변(처부 김방경)

  * 최종재→최온→최문본(배위 영가군부인 김씨 =김효인의 딸)


○ 최유청과 절친했던 (원주인) 元 釋胤  : ? (경주인) 可 錫胤 관련성

  * <족보 기록> 김방경은 (경주인) 가석윤의 딸과 사이에 둔 두 아들(김론,김돈)을 양육


○ 향리 사호(영가군사호)였던 김의화 

  ? 지방관(영가군사호)으로 원 석윤과 함게 용수사 개창 작업 (1165-1181)

  * <가전 기록> 김민성 배위 : 최씨(미상)



1) 경상북도 안동군 예안면에 있던 용수사(龍壽寺)의 개창에 대한 내력을 기록한 글. 1181년(명종 11)에 최선(崔詵 : ? ~1209)이 왕명을 받아 지었다. 이 글이 새겨진 비석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조선시대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탁본이 현재 일본 천리대학(天理大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탁본은 일제시대에 한국에서 활동한 역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수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제시대에 편찬한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는 대부분이 결락된 채 일부 내용만이 판독되어 수록되어 있는데, 그때까지는 비석의 일부가 남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후기에 이우(李俁)가 비석의 탁본들을 모아 편찬한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도 이 비석의 일부가 수록되어 있다.

     이 개창기에 의하면 용수사는 고려 의종(毅宗)의 발원으로 화엄종 사찰로서 개창되어 명종(明宗) 대에 완성되었으며, 이후 의종의 명복을 비는 사찰로 운영되었다. 사찰의 개창을 주도한 석윤(釋胤)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의 문인인 무애지국사(無㝵智國師) 계응(戒膺)의 제자이며, 석윤의 제자로서 용수사 주지를 맡은 확심(廓心)은 의천이 편찬한 『원종문류(圓宗文類)』에 대한 주석서를 지은 인물이다. 대각국사 이후 고려 화엄종의 구체적 동향과 고려중기 사찰 운영의 실재를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2) 김방경 행장에는 ‘안동대도호부 사람’, 김순 묘지명(1321년 민지 찬)에는 ‘안동부(安東府)가 고향’ 이라 하였고, 김승용 묘지명(1329년 이숙기 술)에는 ‘영가(永嘉) 사람’ 이라 하였고, 고려사 김방경 열전(조선 초)에는 ‘본관(本貫)은 안동(安東)' 이라 하였다.



3) 영가군부인 김씨로는 임유문처김씨(?-1154, 미상, *딸 임씨 1087-1156), 최문본(1233-1276) 처 김씨(김효인의 딸), 박보처김씨(김유선의 딸, *딸 박씨 1263-1321), 이자원처김씨(김유선의 딸, *아들 이언충 1273-1338), 채홍철(1262-1340)처김씨(김방경의 딸), 김심(1262-1338)처김씨(미상), 민적 처 김씨(김흔의 딸, *아들 민사평 1295-1359) 등이 있으며,

   영가군 권씨는 권단(1228-1311), 왕후(1296-1349, 본명 권재, 권부의 아들), 권근은 권부(+류승의 딸)-권고(*영가군 습봉)-권희-권근 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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