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답사자료 (3) 악양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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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9-10-12 10:38 조회2,936회 댓글0건본문
악양류
악양루는 중국의 4대누각(다경루, 황학루, 악양루, 등왕각)중에 하나입니다.
문온공께서는 운남 대리로 유배 가시는 도중 다음과 같은 시를 지으셨습니다. 이어서 감회라는 시를 지으셨는데 당시의 감정이 잘 나타나있는 시로서 그 마지막 구절은 애절하여 뒷날 많은 시인들이 인용했던 시입니다.
岳陽樓 악양루
舟中遙望岳陽樓。주중요망악양루
未得登臨作勝遊。미득등림작승유
何日東歸重過此。하일동귀중과차
倚欄吟賞洞庭秋。의란음상동정추
악양루
배 속에서 멀리 악양루를 바라보지만
올라서서 유쾌히 놀지도 못했네
어느 날에나 동쪽으로 돌아갈 때 이곳 지나며
난간에 기대어 동정호의 가을을 읊고 감상해보려나
感懷 감회
十幅雲帆一信風。십폭운범일신풍。
江山都是畫圖中。강산도시화도중
誰知萬里西征客。수지만리서정객
心與滄波日夜東。심여창파일야동
死生由命奈何天。사생유명나하천
回首扶桑一惘然。회수부상일망연
良馬五千何日到。량마오천하일도
桃花關外草芊芊。도화관외초천천
감회
열폭 돛 사이로 미풍이 불고
강산은 아름다운 그림같지만
그 누가 알이요 서쪽으로 유배가는 길
마음은 물결따라 동쪽 고향으로 향하는 것을
죽고사는 운명 천명을 어찌하랴
머리돌려 고향 바라보니 아득하구나
좋은말 오천필은 언제나 보내주려나
도화관 밖에 풀들만 우거지는데
호남성 동정호 악양루
중국 후난성[湖南省] 웨양[岳陽]에 있는 누각으로 중국 고대 4대 명루(名樓) 중 하나이다
동쪽으로는 바링산[巴陵山]이 있고, 서쪽으로 둥팅호[洞庭湖]와 접해있다. 악양고성(岳陽古城)의 서문 위에 있다. 삼국시대(三國時代) 동오(東吳) 대장 노숙(魯肅)이 이곳에서 수군을 훈련시키기 위해, 열군루(閱軍樓)를 지었다. 당(唐)나라 때인 716년(개원 4) 중서령(中書令) 장설(張說)이 웨양(岳陽)을 수비하게 되면서, 열군루(閱軍樓) 확장 사업을 실시하고, 웨양루[岳陽樓]라 이름 지었다. 이어서 '1044년 봄, 등자경(藤子京)이 바링군[巴陵郡]을 수비하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송대 웨양루를 보수한 것이다.
1700여 년 동안, 웨양루[岳陽樓]는 여러 차례의 훼손과 보수를 반복하였지만, 고풍스러운 모습이 이어져 내려왔다. 가장 주요한 건물의 높이는 21.35m로 목재 건축물이다. 현재는 청말(淸末)의 건축양식을 보이는데, 장방형으로 폭은 17.2m, 길이는 15.6m, 면적은 251㎡이며, 4개의 높은 기둥이 있다. 처마끝은 잘 다듬어져 있고, 웅장하며, 눈부시게 화려하다. 내부에는 악양문(岳陽門), “北通巫峽(북통무협)”과 “南極瀟湘(남극소상)”의 패방(牌坊)이 있다. 동북쪽에는 삼취루(三醉樓)가 있는데, 여동빈(呂洞賓)의 악양삼취 (岳陽三醉) 고사를 기념한 곳이며, 동쪽에는 주유(周瑜)의 부인 소교(小喬)의 묘지가 있다. 악양루비랑(岳陽樓碑廊)에는 송(宋), 원(元), 청(淸)의 역대 문인의 시와 훌륭한 그림이 있으며, 전시관에는 많은 서예대가들이 쓴 《岳陽樓記(악양루기)》가 있다. 또한 송(宋), 원(元), 명(明), 청(淸) 웨양루의 각기 다른 모형도 전시되어 있다.
岳陽樓記 (악양루기) 범중엄范仲淹(989∼1052)
慶曆四年春에 騰子京謫守巴陵郡이라.越明年에 政通하야 白廢俱興이라.
송 인종황제 경력(慶曆)사년(1025년) 봄에 등자경(騰子京)이 유배되어 파릉군을 맡았는데,
명년에 정사가 소통되고 인민이 화하여 온갖 폐지되었던 것들이 모두 일어났다.
乃重修岳陽樓하야 增其구制하고 刻唐賢今人詩賦于其上하고, 屬餘作文以記之라.
이에 악양루를 중수하여 옛 제도보다 더 크게 만들고
당나라의 현인과 지금 사람들의 시부(詩賦)를 그위에 새기고는
나에게 부탁하여 기문(記文)을 지어 기록하게 하였다.
朝官夫巴陵勝狀이 摘庭一湖라.銜遠山하고 呑長江하야 浩浩湯湯하야 橫無際涯하니
내가 보니 파릉(巴陵)의 훌륭한 경치는 한 동정호(洞庭湖)에 있다.
먼 산을 머금고 긴 강을 삼켜 호호상상(浩浩湯湯)하여 비껴 끝이 없어
朝暉夕陰이 氣象萬千이라. 此則岳陽樓之大觀也니 前人之述備矣라.
아침 햇볕과 저녁 황혼에 기상이 만 가지, 천 가지이니,
이는 악양루의 큰 구경거리로 옛사람의 기술(記述)에 구비되어 있다.
然則北通巫峽하고 南極瀟湘하야.遷客騷人이 多會于此라, 覽物之情이 得無異乎아?
그렇다면 북으로 무협(巫峽)을 통하고 남으로 소상(瀟湘)을 다하여
좌천된 나그네와 기인들이 이 곳에 모이니,
그들이 경물(景物)을 보는 심정이 다르지 않겠는가?
若夫霪雨霏霏하야 連月不開면 陰風怒號하고 濁浪排空하야
장마비가 계속되어 여러 달 개이지 않는다.
음산한 바람이 성내어 울부짖는 듯하여 탁한 물결이 공중을 치며
日星隱曜하고 山岳潛形하니 商旅不行하고 檣傾楫催요
해와 별이 빛을 숨기고 산악이 형체를 감추며,
장사꾼과 나그네들이 다니지 않아 돛대가 기울고 노가 부러지며,
薄暮冥冥하야 虎嘯猿啼라. 登斯樓也면 則有去國懷鄕과 憂讒畏譏하야
박모에 날이 어두워짐에 범이 휘파람불고 원숭이가 우니,이러한 때에 이루대에 오르면 서울을 떠나 고향을 그리워하게 되고, 참소하는 말을 근심하고 비난하는 말을 두려워하게 되어
滿目簫然이 感極而悲者矣라.至若春和景明하고 波瀾不驚하면 上下天光이 一碧萬頃이라.
온갖 눈에 가득한 것들이 쓸쓸해져 감회가 지극함에 슬퍼짐이 있을 것이다.
봄날의 화창하고 경치가 선명하며 파도가 일지 않아
상하(上下)의 하늘 빛이 한결같이 푸름으로 만경(萬頃)이나 된다.
沙鷗翔集하고 錦麟游泳이오 岸芷汀蘭은 郁郁靑靑이라.而或長煙一空하고 皓月千里니
모래벌의 백구(白鷗)들은 날아와 모이고 비단 같은 물고기들은 헤엄치며
강안(江岸)의 지초와 물가의 난초는 郁郁(향기로움)하고 靑靑(무성함)하며,
혹은 긴 물안개가 한번 개이고 밝은 달이 천 리를 비춘다.
浮光躍金하고 靜影沈壁이라. 漁歌互答하니 此樂何極가?
<호수 위에> 떠있는 달빛은 금빛처럼 출렁이고 고요한 달그림자는 구슬이 잠긴 듯한데
어가를 서로 화답하니, 이 락(樂)이 어찌 다할까.
登斯樓也면 則有心曠神怡하야 寵辱俱忘하고 把酒臨風하야 其喜洋洋者矣라.
이러한 때에 이 루대(樓臺)에 오르면 마음이 넓어지고 정신이 화하야
영광과 욕됨을 모두 잊고는 술잔을 잡고 풍광을 임하여
그 기쁨이 양양(洋洋)함이 있을 것이다.
嗟夫라! 予嘗求古仁人之心이
슬프다 ! 내 일찍이 옛 인인(仁人)의 마음을 찾아보니,
或異二者之爲는 何哉오 不以物喜하야 不以己悲하며
혹 이 두 가지의 행위와 다름은 어째서인가?
남의 일로 기뻐하지 않고 자기 일로 슬퍼하지 않아,
居廟堂之高면 則憂其民하고 處江湖之遠이면 則憂其君하나니
묘당(廟堂)의 높은 곳에 처하면 백성들을 걱정하고
강호(江湖)의 먼 곳에 처하면 군주를 근심하니,
是는 進亦憂, 退亦憂니 然則何時而樂耶아
이는 나가도 또한 근심하고 물러나도 또한 근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때에나 즐거워할 수 있는가?
其必曰 先天下之憂而憂요 後天下之樂而樂歟인저
그 반드시 천하 사람들이 근심하기에 앞서 근심하고
천하 사람들이 즐거워 한 뒤에 즐거워 할 것이다.
噫라! 微斯人이면 吾誰與歸리오?
아! 이러한 사람이 아니면 내 누구와 더불어 돌아가겠는가?
范仲淹(989∼1052)---字는 希文, 北宋 蘇州 吳縣(江蘇)사람,
宋代 최고의 名宰相
登岳陽樓(등악양루) 두보杜甫
昔璞庭水, 今上岳陽樓.
吳楚東南坼, 乾坤日夜浮.
親朋無一字, 老病有孤舟.
戎馬關山北, 憑軒涕泗流
옛날에 동정호에 대해 들었더니
이제서야 악양루에 오르는 구나
오나라와 초나라가 동남쪽에 갈라졌고
하늘과 땅이 밤낮으로 떠 있다.
가까운 친구의 편지도 없으니
늙어감에 외로운 배 뿐이로다.
싸움터의 말이 북쪽에 있으니
난간에 의지해 눈물을 흘리노라....
이 시를 지을 당시의 두보는 완숙한 경지의 시를 지었으나 본인의 형편은 '하늘과 땅사이의 외로운 갈매기"라 비유했듯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힘들고 외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지친 몸을 이끌고 꿈에 그리던 악양루에 올라 지은시가 등악양루 이다. 유랑 생활 중 악양루에 올라 동정 호수의 장관을 보고 기뻐하면서도 자신의 외로움과 나라의 어려움을 생각하고 눈물로써 가슴아파 하는 시이다. 우국지정과 향수가 잘 나타나 있다. 그후 그는 꿈에 그리던 하남성의 고향을 찾아 나서는데 이때 그의 나이 59세. 그러나 그 시인은 고향을 가지 못하고 장사와 악양사이의 배위에서 숨을 거둔다.
둥팅호 [洞庭湖(동정호),
중국 후난성[湖南省] 북부에 있는 중국 제2의 담수호로서 면적은 계절에 따라 3,100∼5,100㎢로 차이가컸으나, 1952년에 완성된 분홍(分洪:遊水池)의 결과 3,915㎢로 거의 고정되었다. 태고에 운몽대택(雲夢大澤)이라고 불린 큰 호수가 일대를 덮고 있었는데, 여러 하천의 퇴적작용에 의해 광대한 후광[湖廣] 평야와 크고 작은 무수한 소택군이 형성되었으며, 둥팅호도 그 중의 하나로 생겨났다. 샹장[湘江] ·쯔수이강[資水] ·위안장[沅江] ·리허강[澧河] 등의 물을 집수(集水)하여, 웨양[岳陽] 북동쪽의 청링지[城陵磯]를 거쳐 양쯔강[揚子江]으로 배수한다. 둥팅호는 양쯔강의 유수량을 크게 조절해 왔으며, 분홍공사 후에도 징장분홍구[荊江分洪區]의 축조로, 그 조절기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양쯔강의 진흙이 오랜 세월 동안 유입되어, 중국 최대의 담수호가 이제는 포양호[鄱陽湖]보다 작아졌다.
예로부터 증수기(增水期)에는 선박의 왕래가 빈번하여, 연안에는 창더[常德] ·이양[益陽] ·창사[長沙] ·웨양 등 도시가 번성하였고, 호안에 자라는 방죽(方竹) ·반죽(斑竹)을 이용한 민예품(民藝品) 제조 및 잉어 양식이 유명하다. 한편, 호수 안에는 섬이 많아, 일찍이 샤오샹 8경[瀟湘八景]의 하나로 꼽힌 아름다운 풍광으로 유명하고, 웨양의 웨양루[岳陽樓] 앞에 있는 높이 128m의 쥔산섬[君山:일명 湘山]에는 순제(舜帝)의 죽음을 비탄하여 물에 몸을 던진 아황(娥皇) ·여영(女英) 두 비(妃)를 모시는 묘우(廟宇)가 있다.
후난성(湖南省)에 위치한 동정호(洞庭湖)는 연화봉이 자리한 헝산의 북쪽을 가로막은 중국 최대의 호수다. 호수의 면적은 계절에 따라 차이가 많이 난다.
겨울부터 봄까지 수위가 내려가는 시기에는 3000㎢정도 되지만, 물이 불어나는 여름에는 4000㎢에 이른다. 동정강이라고도 불리는데, 엄밀히 말해서 호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4개 하천의 물이 모였다가 양자강으로 들어가는 줄기지만, 그 모양이 호수처럼 생겼다. 동정호가 유명한 것은 중국 역대의 역사와 전설, 문학이 서려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의 3대 누각으로 일컬어지는 악양루와, 호수 가운데 떠 있는 군산이라는 섬이 유명하다. 동정호는 사시사철 아름답지만, 동정추월이라 하여 동정호에 비치는 가을 달빛이 특히 아름답다. 달빛이 아름다운 호수라면 용왕이 살기 좋은 곳이 아니겠는가?
당연히 동정호 용왕은 온 중국 사람들이 다 아는 전설과 역사의 주인공으로 군림해왔다.
옛날 진시황이 지방을 순찰하다 동정호에서 심한 풍랑을 만났다. 옥으로 만든 도장, 즉 옥새를 호수에 던지니 물결이 잔잔해졌다.
8년 후 진시황이 화음지방을 지날 때 한 노인이 길을 막고 서서 “용왕님께서 돌려드리는 것”이라며 옥새를 주고 사라졌다.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서자 진시황의 손자가 그 옥새를 한나라의 유방에게 바쳤다. 이때부터 옥새가 황제의 상징이 됐다고 한다.
군산(君山) 은침차(銀針茶) : 동정호 안에는 군산이라 부르는 조그만 섬이 떠 있어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군산에는 옛부터 내려오는 갖가지 전설이 묻혀있으며
호반의 악양루에서 보면 ‘은쟁반 위에 놓인 푸른 조개’처럼 보인다.
이 섬은 중국의 명차로 알려진 은침차와 관상용 죽림이 재배되고 있다.
이 은침차는 선인(仙人)이 살고 있다는 군산에서 생산되는 차로 당나라 때부터 황제에
진상되던 귀한 물건이었다. 마치 은빛 바늘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생산량이
적어 희소가치가 높은 제품이다.
이 은침차... 전설이 있습니다...
당나라때 130세나 되는 노 스님이 동정호 호숫가의 마을인 악양에 살고 있었답니다...
선종임금이 소문을 듣고 찾아와 불노장생의 비결을 묻습니다...
노승왈...'어릴때 부터 집이 가난해 특별한 약을 먹지 못했고... 집 주위에 있는 차잎을 따 우려 마셨을 뿐'이라고 대답합니다...
황제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오래 산다는데..... 당장 이 차를 황실로 올려라 했습니다...
은침차는 뜨거운 물에 들어가 바늘처럼 빳빳하게 서있다가 얼마 시간이 지나면 가라 앉는다 합니다. 제대로 된 은침차는 세번을 반복해서 서있다가 가라앉았다가 반복을 한다고 합니다...
하여간 茶는 한자 해석으로도 이렇다 합니다...
++는 20이고...八 + 八 이것은 88이고.... 그럼 더하면... 108 이네!!!! 그래서 불교에서는 108살을 차수(茶壽)라 부르기도 한다고 합니다...
두보의 시로 더욱 유명해진 악양루 : 악양루는 삼국지의 무대로, 오나라의 왕 손권이 지은 것이다. 형주를 뺏으려고 촉나라의 유비와 다투던 중 전략요충지인 동정호 부근을 장악하였다. 이때 동정호에서 수군을 훈련시켰는데, 호수의 군사훈련을 감독할 망루로 악양루를 지은 것이다. 당대 이후 군사적 가치를 상실한 것을 재상 상신인 장설(张说)이 악양루라는 이름의 누각으로 새로 지은 것. 건설 당시부터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던 악양루는 훗날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 712-770) 가 이곳을 둘러보고 ‘악양루에 올라’라는 명시를 남기면서 웨양을 대표하는 명소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 시는 786년 늦은 겨울 , 두보가 후베이, 후난을 유랑하면서 악양루에 올라 지은 작품이다. 만년의 산수시로써 그의 풍부한 인생경험을 통한 감회가 짙게 배어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생각에 젖어 들게 한다.
절에 있는 목탁에 대한 전설
옛날 중국 동정호 가까이에 공부가 하늘에 닿은 도승 한분이 있었다. 중국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에서까지도 스님의 높은 가르침을 받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스님 밑에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중 한 제자가 공부를 하려는 뜻을 세워 스님의 제자가 되기는 하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점점 게으름이 나서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장난을 일삼았다. 스님은 여러분 좋게 타일렀으나 게으른 제자는 스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계속 방종한 길로만 흘러갔다.
할 수 없이 스님은 그 제자에게 벌을 주기로 하고 신통력을 부려 그를 물고기로 만들어 동정호 속에 던지고 말았다. 그리고 반성을 하면 다시 사람으로 되돌려 주겠으니 참회하고 근신하라고 말 하였다.
그러나 물고기가 된 제자는 반성은 커녕 물 속을 마음대로 헤엄쳐 다니며 처음보는 물 속을 구경하면서 더 재미있게 놀기만 하였고, 이를 안 스님은 물고기에게 더 무거운 벌을 주기로 결심하고, 물고기 등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등에 나무가 생기자 물고기는 헤엄칠 수도 없고 먹이를 잡아 먹을 수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풍랑이 칠때마다 등에 있는 나무가 흔들려 등의 살이 찢어지고 피를 흘려 뼈가 깍이는 듯한 고통을 겪었다.
그때부터 그는 참회와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고달픈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몇 년이 지난 후 마침 스승인 스님이 배를 타고 동정호를 지나게 되었다. 물고기는 이를 알고 스님에게 다가가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용서를 빌고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스님은 제자가 충분히 반성한 것을 보고 수륙제를 베풀어 다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물고기 등에 있던 나무로 목어를 만들어서 절에 걸어두고 아침 저녘으로 사람을 모을 때 치면서 많은 제자들이 경계심을 갖도록 했다고 한다.
또한, 목탁을 더욱 작게 만들어서 늘 몸에 지닐 수 있게 한 것이 바로 목탁이라고 한다.여러 가지 쾌목으로 만든 목탁은 모양도 예쁘고 소리도 청아한 귀중한 불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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