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답사 자료 (2) 황학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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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9-10-05 10:32 조회2,456회 댓글0건본문
중국의 삼대 누각은 강소성 진강시 다경루. 호북성 무창현 황학루. 호남성 동정호 악양루 입니다.
문온공(척약재)할아버님께서는 운남으로 유배 가시는 도중 무창을 지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으셨습니다.
무창은 현재의 호북성 武漢市입니다.
武昌
무창
黃鶴樓前水湧波。황학루전수용파
沿江簾幕幾千家。연강렴막기천가
醵錢沽酒開懷抱。갹전고주개회포 醵-추렴할거 술추렴갹
大別山靑日已斜 대별산청일이사
무창(武昌)
황학루 앞에는 강의 물결 솟구치는데 / 黃鶴樓前水湧波
강가에는 주렴과 장막 몇 천 집인가 / 沿江簾幕幾千家
돈을 추렴하여 술을 사서 회포를 푸노니 / 醵錢沽酒開懷抱
대별산은 푸른데 해는 이미 기울었네 / 大別山靑日已斜
*黃鶴樓는 중국 湖北省 武昌縣 黃鵠磯(황곡기)위에 있는 누각이다. 옛날 江夏郡의 辛씨가 술을 파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어떤 선생이 왔는데, 키가 크고 옷이남루했다. 조용히 신씨에게 말하기를 “나에게 술을 줄 수 있는가?” 하니, 신씨는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큰 잔에 술을 부어 주니 그것을 마셨다. 이렇게 반 년 동안을 지내 왔으나 신씨는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하루는 선생이 신씨에게 “술값 빚을 많이 졌는데 갚을 길이 없다.”고 하고는 마침내 조그마한 藍橘皮(남귤피)로 학을 벽에 그리고 황색 칠을 하였다. 그리고 나서 앉은 사람이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르면 黃鶴이 음절에 맞추어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돈을 내고 술을 마시며 구경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십 년을 지내고 나니 신씨는 큰 부자가 되었다. 그런 뒤에 선생이 갑자기 나타났다. 신씨가 고마워하면서 “무엇이든지 선생이 원하는 것을 드리고 싶다.”고 하니 선생은 웃으면서 “내가 어찌 이것을 위해서 한 일이겠는가.” 하고는 당장 피리를 몇 곡조 불자 금방 흰 구름이 공중에서 내려오고 그림 속의 학이 선생 앞으로 날아왔다. 그러자 선생은 학의 등에 앉아 구름을 타고 날아갔다. 그리하여 신씨는 이곳에 누각을 짓고 黃鶴樓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 시는 김구용의 流配詩 가운데 빈번하게 후대 시인들의 입에 회자되었던 작품 중의 하나이다. 황학루는 중국의 호북성 무창현에 위치한 누각으로서 수 많은 시인 묵객들이 시를 짓고 즐기던 장소이기도 하다. 起句에서 황학루 앞에 넘실대는 물결을 눈에 보이는대로 제시한 다음, 承句에서는 그 주변 강가에 있는 수많은 집들을 그렸다. 轉句에서는 비록 유배길이기는 하지만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돈을 거두어 술을 사는 정황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황학루에 전해 오는 전설을 뒤집어서 본 모습이다. 돈없이 공짜 술을 반년 동안 마신 어떤 사람이 술값 대신 그려준 黃鶴이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게 되고, 후에 그 학을 타고 날아갔다는 것을 기념해 지은 것이 황학루라는 전설과는 달리 돈을 갹출해 술을 사 마시면서 회포를 풀 수 밖에 없는 상황을 관념적으로 생각해 왔던 황학루와는 달리 시인의 구체적인 현실이었던 것이다. 結句에서는 大別山에 해가 저물었음을 말하고 있다. 大別山은 중국 北嶺山系에 속하는 산맥의 이름으로 실재하는 산이지만, ‘大別’이라는 그 이름에서 오는 스산한 분위기와 저문 해는 시인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 후대의 사람들은 이 시를 자주 거론하였던 것이다. -성범중의 책 124P에서--
題黃鶴樓 서거정
황학루(黃鶴樓)에 제하다.
백운과 황학의 일은 유유하기만 하고 / 白雲黃鶴事悠悠
향기로운 풀, 맑은 냇물에 시름이 끝없어라 / 芳草晴川不盡愁
고금에 누각을 오른 사람이 그 얼마던가만 / 今古登臨幾人在
최후의 뛰어난 시구만이 풍류를 독점했네 / 崔侯傑句擅風流
[주D-001]백운(白雲)과 …… 독점했네 : 최후(崔侯)는 당(唐) 나라의 문인 최호(崔灝)를 가리킨 것으로, 그의 황학루(黃鶴樓) 시에 “옛사람이 이미 황학을 타고 떠났는지라, 이 땅에는 공연히 황학루만 남았네그려. 황학이 한번 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흰 구름만 천재에 부질없이 왕래하누나. 날 갠 냇물엔 한양의 숲이 역력히 비치고, 향기로운 풀은 앵무주 물가에 무성하도다. 날은 저문데 향관이 그 어드메이뇨, 연기 자욱한 강가에서 사람을 시름하게 하네.〔昔人已乘黃鶴去 此地空餘黃鶴樓 黃鶴一去不復返 白雲千載空悠悠 晴川歷歷漢陽樹 芳草萋萋鸚鵡洲 日暮鄕關何處是 煙波江上使人愁〕”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최호는 특히 이 시를 짓고 이백(李白)으로부터 당인(唐人)의 칠언율시(七言律詩) 가운데 제일이라는 격찬을 받았으므로 이른 말이다.
題黃鶴樓圖 서거정
黃鶴樓中黃鶴遊。黃鶴一去雲悠悠。靑山歷歷樹高低。芳草晴川鸚鵡洲。
崔侯傑句天地間。崔侯一去何時還。俯仰歲月成古今。江流衮衮無時閑。
호북성 무창현 황학루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우한시武漢市] 서산[蛇山]의 가오관산[高觀山]에 있는 누각.
한수이강[漢水]이 합류하는 양쯔강[揚子江] 남쪽 기슭의 빼어난 경관 속에 세워져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누각 가운데 하나이다. 삼국시대에 오(吳)나라가 징저우[荊州]를 빼앗아 촉(蜀)과 싸우기 위하여 서산 서쪽 기슭의 황구산[黃鵠山]에 세운 높은 건물이 황허러우의 모체이다. 황허러우라는 명칭에는 도가(道家)의 선인(仙人)이 노란 귤껍질로 만든 학이 진짜 학이 되어 선인을 태우고 날아갔다는 전설이 담겨 있다. 당나라의 시인 최호(崔顥)가 지은 시 〈황학루(黃鶴樓)〉는 대시인 이백(李白)이 그보다 나은 시를 지을 수 없다고 탄복하였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으로 누각의 명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건립된 이후 여러 차례 훼손되었다가 재건되었다. 청나라 때만 4차례 재건되고, 4차례 수선되었다고 전한다. 복구될 때마다 높낮이와 규모, 형태가 조금씩 달라져서 당나라 이전에는 2층이었고, 송나라 때 3층으로 개축되었으며, 청나라 말기에는 3층의 십자찬첨식(十字攒尖式) 목조 건축물이었다. 청나라 광서제(光緖帝) 때인 1884년 인근의 민가에서 발생한 화재가 번져 누각도 일부 훼손되었다. 현존하는 황학루는 문헌에 근거하여 1984년 재건된 것이며, 위치도 양쯔강 기슭에서 가오관산 위로 옮겨졌다.
규모도 3층에서 5층으로 확장되었는데, 각 층이 중2층으로 되어 있어 실제로는 10층인 셈이다. 전체 높이도 원래보다 2배 가량 높아져 51m에 이르고, 구조도 목조에서 철근콘크리트조로 바뀌었으며, 연건축면적은 4000㎡이다. 지붕과 각 층의 처마 위에는 노란색 유리기와를 얹었고, 72개의 커다란 원형 기둥이 받치고 있으며, 외벽의 교각이 60여 개에 이른다. 지붕 한가운데는 4m 높이에 102개의 유리벽돌을 상감하여 만든 호리병 모양의 호로보정(葫芦寶頂)을 장식하여 대범함과 수려함이 돋보인다.
1층 대청에는 황학을 타고 옥피리를 부는 신선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 높이 9m, 너비 6m의 채색 도자기그림 〈백운황학(白雲黃鶴)〉이 있고, 2층 벽에는 당나라 때 염백리(閻伯理)가 지은 〈황학루기(黃鶴樓記)〉가 새겨져 있다. 3층에는 이백과 최호, 악비(岳飛) 등 황허러우를 노래한 역대 명인들을 그들의 작품과 함께 그림으로 묘사한 〈문인회췌(文人荟萃)〉가 눈길을 끈다. 5층에는 10폭의 화폭에 파도가 넘실대는 양쯔강과 중국의 문화적 요소와 황허러우의 변화 등을 생생하게 묘사한 〈강천호한(江天浩瀚)〉이 있는데, 전체 길이가 100m에 이른다. 누각 주변에는 동조(銅雕)와 정자, 패방(牌坊), 라마탑(喇嘛塔) 등이 배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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