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유일 시 '복주' 재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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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9-09-04 17:49 조회1,769회 댓글0건본문
■ <기존 번역문>
福州(복주) 金方慶(김방경)
辛巳歲。東征日本。班師至福州。
신사년(1281년 충렬왕 7년)에 일본정벌 후 군사를 돌려 복주에 도착하다.
山水無非舊眼靑 산과 물은 모두 옛 눈에 보던 푸르름인데
樓臺亦是少年情 누대도 또한 바로 소년 때 정일러라
可憐故國遺風在 기특하여라 고국에는 옛 풍속 남아서
收拾絃歌慰我行 악기와 노래를 모두 거두어 모아 내 걸음을 뒤로 하네
출전 동문선(東文選) 권20 / 칠언절구(七言絶句)
■ <복주 시 재번역>
충렬공께서 지은 시 중 유일하게 전해 오는
福州(복주) 시 번역 문제는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문제입니다.
당시의 상황과 충렬공의 미세한 심정까지 읽어내야
제대로 번역이 될 것 같습니다.
참고로 저의 의견을 정리해 보면
전쟁 전후의 참담함 속에 고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우국시(憂國詩)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오언 절구는 기-승-전-결 로 시상이 전개된다고 하네요.
기, 승 에서는 풍경을 그림 그리듯 그려내고
전 에서 반전을 일으켜
결 에서 마무리를 짓는다 하네요.
당시 상황과 충렬공의 심정은 다음과 같지 않았을까?
1281년 일본원정에 출정하였다가 큰 손실을 입고 군사를 돌려 회군하는 길에 고향인 복주에 이르렀다. 당시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가 안동에 머물고 있었다.
이 시절 고국에는 일본전쟁 준비로 인하여 나라 전체가 곤궁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일본정벌 후에도 고난과 풍파가 그대로 남아 앞으로 국난을 헤쳐나갈 일이 캄캄한 실정이었다. 충렬공은 이미 72세의 고령이었으므로 걱정이 더 하였을 것이다.
어쨌든 회군길에 고향에도 들리고, 충렬왕도 만나 전황을 보고한 다음
짬을 내서 어릴적 놀던 영호루에 올라 앉았는데,
가까운 곳에서 누가<혹시 종군한 24세의 3남 김순, 김순은 이름있는 악기 연주가였다.>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고 보고...
복주(福州)
신사년(1281, 충렬왕7)에 일본정벌을 마치고 회군하는 길에 복주에 이르렀다.
산과 물은 예전에 보던 대로 변함없이 푸르고 山水無非舊眼靑
누대(영호루) 또한 어릴 적 놀던 정경(情景)일세 樓臺亦是少年情
가련하게도, 고국에는 풍파(風波)가 남아 있구나 可憐故國遺風在
거문고 노래소리 들으며 나의 앞날을 달래 본다 收拾絃歌慰我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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