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방경 시대 능묘와 부도(11) - 1251년 설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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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9-08-20 14:40 조회1,999회 댓글0건본문
공의 이름은 신(愼)이고, 자는 신지(愼之)로, 전주 순창군(全州 淳昌郡) 사람이다. 증조 자승(子升)은 군사호(郡司戶)이고, 조부 정숙(挺叔)은 사문박사(四門博士)이며, 아버지 선필(宣弼)은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이며, 어머니 조씨(趙氏)는 역시 순창군사호(淳昌郡司戶)인 숭영(崇穎)의 딸이다. 병자년(고종 3, 1216)에 함풍현(咸豊縣) 감무(監務)가 되었다. 치적이 최고로 알려지자, 나라를 다스리던 진양공(晉陽公, 崔怡)이 ▨▨ 포상하여 식목도감녹사(式目都監錄事)로 삼았다. 임인년(고종 29, 1242 )에 과거[春官]를 관장하는 동지공거(同知貢擧)[貳席]가 되었는데, 뽑힌 이들이 모두 당시의 이름난 선비들이다. 신해년(고종 38, 1251) 봄에 추밀원부사 형부상서 한림학사승지(樞密院副使 刑部尙書 翰林學士承旨)에 임명되었다. 이 해 5월에 병이 들어 6월에 대묘리(大廟里)의 집에서 작고하였다.
상서고공낭중(尙書考功郞中) 최입기(崔立基)의 딸과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대악령 겸 식목녹사(大樂令 兼 式目錄事)이고, 차남은 머리를 깎고 조계종(曹溪宗)의 중이 되어 승계(僧階)[緇秩]가 삼중대사(三重大師)에 올라 지금 보문사(普門寺)의 주지로 있으며, 3남은 도교령(都校令)이다. 딸은 양주서기(楊州書記) 정지교(鄭之僑)에게 시집가서 아들 두 명을 낳았으나 공보다 먼저 죽었는데, 그 두 아들을 공은 매우 귀여워하였다. 대악령(大樂令)은 나와 오랜 친구인데, 공의 행장을 갖추어 나에게 묘지명을 지어주기를 부탁하였다. 나는 감히 굳게 거절하지 못하고 붓을 적셔서 글을 적는다. 신해년[重光大淵獻](고종 38, 1251) 7월[相月], 내시(內侍)에 속하고 장사랑 상서예부원외랑(將仕郞 尙書禮部員外郞)인 김백일(金百鎰, 金坵)이 쓰다. |
○ 설신은 1242년(고종 29)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고(이때 김방경 백부 김창이 지공거였음), 1243년(고종 30)에 동북면 병마사(東北面 兵馬使)가 되어 나가기도 하였다. 설신의 아들로 설공검(1224-1302), 설인검이 있다. 설인검은 김방경의 1남 김선의 처부. 설신과 김방경은 사돈지간이 된다.
○ 설신의 묘는 알 수 없으나 김구(金坵)가 지은 묘지석은 국립중앙박물관(서울)에 소장되어 있다. 아들 설인검의 묘는 전남 나주군 남평읍 광리에 있다.
○ 전남 순창에는 설공검(1224-1302)을 성황대신으로 모시고, 매년 단오절에 순창의 호장, 향리지단이 성황제를 올렸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는 <성황대신사적 현판>이 중요민속자료 238호, 순창 강천사, 구암사 등에서 활약한 <설씨부인권선문첩>이 보물 제728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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