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록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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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9-08-25 14:17 조회1,604회 댓글0건본문
조현명(趙顯命)
1690(숙종 16)∼1752(영조 2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치회(稚晦), 호는 귀록(歸鹿)·녹옹(鹿翁). 도사(都事) 인수(仁壽)의 아들이다.
1713년(숙종 39) 진사가 되고 171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을 거쳐 1721년(경종 1) 연잉군(延礽君:뒤의 영조)이 왕세제로 책봉되자 겸설서(兼說書)로서 세제보호론을 주창, 소론의 핍박으로 곤경에 처하여 있던 왕세제보호에 힘썼다.
영조 즉위 후 용강현령, 지평·교리를 역임하고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발생하자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종군, 난이 진압된 뒤 그 공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에 녹훈, 풍원군(豊原君)에 책봉되었으며, 이후 대사헌·도승지를 거쳐 1730년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영남의 남인을 무마하고 기민(饑民)의 구제에 진력하였다.
이어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뒤 1734년 공조참판이 되면서부터 어영대장·부제학, 이조·병조·호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740년 경신처분 직후 왕의 특별배려로 우의정에 발탁되고 뒤이어 좌의정에 승진하였다.
이때 문란한 양역행정의 체계화를 위한 기초작업으로서 군액(軍額) 및 군역부담자 실제수의 파악에 착수, 이를 1748년 《양역실총 良役實總》으로 간행하게 하였다.
1750년 영의정에 올라 균역법의 제정을 총괄하고 감필에 따른 그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으나 대사간 민백상(閔百祥)의 탄핵을 받아 영돈녕부사로 물러났다.
조문명·송인명(宋寅明)과 함께 영조조 전반기의 완론세력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노소탕평을 주도하였던 정치가이면서, 한편 민폐의 근본이 양역에 있다 하여 군문·군액의 감축, 양역재정의 통일, 어염세의 국고환수, 결포제실시 등을 그 개선책으로 제시한 경세가이기도 하였다.
당색을 초월하여 진신(縉紳) 사이에 교유가 넓었는데 김재로(金在魯)·송인영·박문수(朴文秀) 등과 특히 친밀하였다.
저서로는 《귀록집》이 있고, 《해동가요》에 시조 1수가 전하고 있다.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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