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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경 시대 능묘와 부도(6) - 1234년 진각국사 혜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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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9-08-12 08:11 조회1,7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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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234년 진각국사(혜심) 입적, 부도(순천 송광사)  비(강진 월남사지)

  금자(金紫) 광록대부(光祿大夫) 수태보(守太保)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 수문전(修文殿) 대학사(大學士) 감수국사(監修國史) 판예부(判禮部) 한림원(翰林院) 사(事) 태자태보(太子太保) 치사(致仕) 신(臣) 이규보(李奎報)가 왕명(王命)을 받들어 짓고

  장사랑(將仕郞) 중서(中書) 사인(舍人) 지제고(知制誥) 태자사(太子司)의랑(議郞)이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김효인(金孝印)은 왕명을 받들어 쓰다

 

  갑오(甲午)년6월 26일 문인(門人)들을 불러 후사(後事)를 당부하고 마곡(麻谷)에게 이르기를 “노한(老漢)이 오늘 몹시 바쁘다”고 하였다. 마곡이 대답하되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겠나이다” 하니, 스님께서 이르되 “노한(老漢)이 오늘 몹시 아프다”고 되풀이 하니, 마곡(麻谷)은 역시 무슨 뜻인지 몰라 멍멍하였다. 그리고나서 스님은 미소를 머금고 가부좌를 맺은 다음 조용히 입적(入寂)하였다. 다음 날 월등사(月燈寺) 북봉(北峯)에서 화장하고, 영골(靈骨)을 거두어 본산(本山)인 송광사로 돌아갔다. 임금께서 부고를 들으시고 크게 진도(震悼)하시어 진각국사(眞覺國師)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을미(乙未)년 중염(仲炎)에 광원사(廣原寺)의 북쪽에 장사지내고, 드디어 부도(浮圖)를 세웠는데 임금께서 원소(圓炤)라는 탑호(塔號)를 내렸다. 세수는 57세요, 법랍은 32하였다.

  스님의 법(法)을 이어 받은 몽여선로(夢如禪老)도 또한 법주(法主)이다. 일암거사(逸庵居士)인 정분(鄭奮)에게 청하여 스님의 행장(行狀)을 초록(草錄)케 하고, 입비(立碑)를 진양공(晋陽公)에게 청하였다. 공(公)이 말하기를 “화상(和尙)께서는 살아계셨던 일생 동안 국민을 이롭게 함이 지극히 많았으므로 악석(樂石)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 하고, 곧 임금께 건의하였다. 왕이 이를 가납하시고 소신(小臣)에게 비문을 지으라고 명(命)하시므로 비명(碑銘)을 짓게 되었다.

 

(陰記)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상서(尙書) 우복사(右僕射) 한림학사(翰林學士)인 신(臣) 최자(崔滋)가 왕명(王命)을 받들어 짓고 수선사(修禪社) 도인(道人) 신(臣) 탁연(卓然)이 교칙(敎勅)에 의(依)하여 쓰다

간자(刊字)

   경술(庚戌) 4월(四月)  일(日) 상석(上石)

영암군부사관구학사각문지후(靈巖郡副使管句學事閣門祗侯)        이주(李湊)

입비차사원지승평군부사각문지후(立碑差使員知昇平郡副使閣門祗侯)    송여(宋輿)

도강군감무위위주부(道康郡監務衛尉注簿)                 송관(宋寬)

감역(監役)     영암군리(靈巖郡吏)       ▨국검(▨國儉)


○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월남사 터에 있는 고려 후기의 고승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 : 1178~1234]의 비. 보물 제313호. 고려 후기의 대표적 문인 이규보(李奎報)가 짓고 김효인(金孝印)이 써서 1235년(고종 22)에 세웠다. 비는 현재 원 자리에 남아 있는데 귀부 위에 절단된 비신이 있고 마모 상태가 심하여 글자를 판독하기 어렵다.

○ 비문은 수선사의 제2세 사주인 진각국사가 향공진사의 아들로 태어나 과거에 급제한 후 보조국사에게 출가하여 간화선을 수행하고 보조국사에 이어 수선사의 사주가 되어 강종의 지원으로 수선사를 확장하고 집정자 최우는 두 아들을 국사에 출가시키는 등 연관을 맺고 월등사에서 입적한 생애를 기술하였다. 진각국사는 입적하자 입적처인 월등사에서 다비하여 영골을 거두어 본산인 송광사에 돌아가 광원암에 탑을 세웠다 하였는데 실제로 비는 월남사에 있다.

○ 음기는 입적 후 16년이 지난 1250년(고종 37)에 최자(崔滋)가 짓고 탁연(卓然)이 썼는데, 내용은 음기 건립 사실과 승려와 재가 문도들을 열거하였다. 그런데 문도에 대선사, 승통, 선사, 수좌, 삼중대사 이하로 이어져 이때부터 선사의 문도에 교종 승계를 지닌 승려가 등장하는 자료가 된다. 또한 재가신도들은 당시 왕족과 재추 등 고위관료가 대거 등장하여 이를 분석하여 수선사와 고려 정계와의 관계를 밝힌 연구의 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비문 글씨는 김방경의 아버지인 장사랑(將仕郞) 중서(中書) 사인(舍人) 지제고(知制誥) 태자사(太子司)의랑(議郞) 자금어대(紫金魚袋) 김효인(金孝印)이 왕명을 받들어 썼다.

○ 비문 음기는 입적 후 16년이 지난 1250년(고종 37)에 최자(崔滋)가 짓고 탁연(卓然)이 썼는데, 내용은 음기 건립 사실과 승려와 재가 문도들을 열거하였다. 음기에 시중(侍中) 최종준(崔宗俊), 참지정사(參知政事) 임경숙(任景肅), 판추밀원사(判樞密院使) 정안(鄭晏, *최우 사위), 지추밀원사(判樞密院使) 최항(崔沆), 우복야(右僕射) 최종재(崔宗梓), 간의대부(諫議大夫) 김군수(金君綏), 우복야(右僕射) 설신(薛愼), 비서감(秘書監) 김효인(金孝印), 국자제주(國子祭酒) 이장용(李藏用), 장군(將軍), 어사중승(御史中丞), 낭장(郎將) 등과 각문지후(閣門祗侯) 최종보(崔宗輔) 등의 이름이 보인다. 당시의 집권자 최이를 비롯하여 이규보, 정안, 몽여, 수기 등은 팔만대장경 제작에도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 1500년대 중반 백호 임제가 월남사 옛 절터를 지날때에는 옛 비가 야외 들판의 다리로 놓여 있다고 했다. 비는 현재 원 자리에 남아 있는데 귀부 위에 절단된 비신이 있고 마모 상태가 심하여 글자를 판독하기 어렵다. 현재 비 후면은 상당부분 남아 있으나, 비 전면은 완전히 떨어져 나가 흔적이 없는데, 옛부터 송광사에 있었던 비편 하나가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1972년에 민현구 교수팀이 비 주변 대밭에서 발견한 비편 하나가 있다.




 송광사 진각국사 부도탑 : 전남 순천 송광사 광원암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 전남 강진 월남사터

* 비편 1 : 국립광주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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