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방경 시대 능묘와 부도(5) - 1230년 영열공 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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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9-08-11 10:25 조회1,692회 댓글0건본문
5) 1230년 금의(琴義 : 1153~1230) 죽음. 묘(경기 김포 장릉 옆 추정)
경인년(고종 17, 1230) 정월 26일에 차츰 병을 앓았다. 이 날도 자손들을 시켜 바둑을 두게 하고 구경하였고, 저녁이 되어서도 태연하게 조용히 담소하다가 밤이 되자 조용히 별세하였다. 곁에 모신 사람들도 알지 못하였다.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향년은 78세였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 매우 슬퍼하고 해당 관청에 명해 상사를 치르게 하여, 봉황산(鳳凰山) 기슭에 장사지내고 모공(某公)이라고 시호를 내렸다. 아들 규 등이 공의 행장을 적어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간절하게 청하여--- |
○ 묘지명은 이규보가 1230년(고종 17) 작성했으며,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권36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동문선(東文選)』과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도 수록되어 있다.
○ 묘지명의 주인공인 금의(琴義 : 1153~1230)는 무신정권기의 문신. 본관은 봉화(奉化). 초명은 극의(克儀), 자는 절지(節之)이다. 삼한공신(三韓功臣) 용식(容式)의 후손으로 계양(桂陽 : 지금의 부천지역) 김포현(金浦縣) 출신이다.
여러 번 지공거가 되어 명사(名士)를 뽑았다. 세상에서는 이를 ‘금학사옥순문생(琴學士玉筍門生)’이라 하였다. 문장에도 뛰어나 『한림별곡(翰林別曲)』에 금학사(琴學士)로 소개되어 있다. 시호는 영렬(英烈)이다.
○ 김방경의 아버지 김효인은 족보에 의하면 영열공(英烈公) 금의(琴儀, 1153~1230)를 스승으로 모셨는데 문장(文章)과 사업(事業)이 한 시대에 걸출(傑出)하였으며, 세상에서 칭하기를 금학사옥순문생(琴學士玉筍門生) 이라 하였다.
조선 인조의 아버지 원종(추존) 장릉 : 경기 김포 풍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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