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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경 시대 능묘와 부도(4) - 1221년 원진국사 승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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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9-08-10 07:54 조회1,9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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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221년 원진국사 승형 입적. 부도와 비(포항 보경사)

  9월 2일 시자(侍者)를 불러 옷을 갈아 입고, 단정히 승상(繩床)에 앉아 범패(梵唄)를 읊게 하였다. 이때 시자(侍者)가 스님께 임종게(臨終偈)를 청(請)하니, 스님은 눈을 뜨고 한참동안 노려 보고 이르시기를, 이 어리석은 놈아! 내가 평생동안 한 게송(偈頌)도 지은 적이 없는데, 이제 와서 무슨 게송을 지어달라는 말인가? 하시고, 승상(繩床)을 세 번 내리친 다음, 곧 적요(寂寥)하므로, 가까이 가서 보니 이미 입적하시었다. 그러나 안색(顔色)은 조금도 변하지 아니하여 온 몸이 마치 살아 있을 때와 같았다.---

  10월 10일 문도(門徒) 50여명이 영여(靈輿)를 모시고 팔공산(八公山) 남쪽 기슭에서 화장(火葬)하였다. 다음 날 영골(靈骨)을 수습(收拾)하여 신구산(神龜山)으로 이장(移葬)하고 탑(塔)을 세웠다. 세수는 51이요, 법랍은 37(비문에 24는 오치(誤植)이다)세였다. 고종(高宗) 임금께서 부고를 듣고 크게 진도(震悼)하시면서 국사(國師)로 추증(追贈)하고, 시호를 원진(圓眞)이라 증정(贈呈)하였다. 문인(門人)들이 스님의 탑비(塔碑)를 세우고자 조정(朝廷)에 건의(建議)하였다. 그리하여 임금께서 신(臣) 공로(公老)에게 비문(碑文)을 지으라고 하명하였다.---

  통의대부(通議大夫) 추밀원(樞密院) 우부승선(右副承宣) 시국자감(試國子監) 대사성(大司成) 사자금어대(賜紫金魚袋) 신(臣) 이공로(李公老)가 왕명을 받들어 짓고,

장사랑(將仕郞) 대관서승(大官署丞) 겸(兼) 보문각(寶文閣)교감(校勘) 김효인(金孝印)은 교칙(敎勅)에 의하여 쓰다.---

  갑신년(甲申年) 5월 일 사문(沙門) 혜적(慧寂)등이 비석을 세우다.


○ 원진국사(1171∼1221)는 산양(경북 문경) 사람으로 13세에 승려가 되어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도를 하기도 하였고, 왕의 부름으로 보경사의 주지가 되었다. 수선사 계열이 아님에도 보조국사 지눌을 계승하였다고 한다.


○ 김방경의 아버지 김효인이 왕명에 의하여 1224년 비문 글씨를 썼다.


○ 보경사원진국사비(寶鏡寺圓眞國師碑)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송라면 중산리 622 보경사. 보물 252호

고려의 고승 원진국사 승형(圓眞國師 承逈 : 1171~1221)의 비. 이공로(李公老)가 짓고 김효인(金孝印)이 써서 1224년(고종 11)에 세웠다.

비문에 의하면, 비가 완성된 것은 고종 11년(1224)으로 원진이 입적한 지 3년 후의 일이다. 이와 유사한 비석은 보광사 중창비(重創碑), 억정사 대지국사비 등에서 볼 수 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모습으로, 비몸 윗부분의 양 끝을 접듯이 잘라 놓았는데, 이러한 모습은 당시에 유행하던 양식이다.

넓다란 바닥돌과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거북받침돌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를 하고 있다. 등에는 6각형의 무늬마다 ‘왕(王)’자를 질서정연하게 새겨놓았으며, 등 중앙에는 연꽃을 둘러 새긴 네모난 받침대를 조각하여 비몸을 끼워두게 하였다. 비몸의 둘레에는 덩굴무늬가 장식되어 있는데 이 역시 고려 중기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보경사 원진국사비 : 경북 포항


○ 보경사부도(寶鏡寺浮屠)

경북 포항시  북구 송라면 중산리 산101-1 보경사.  보물 제430호 

보경사 뒷산의 중턱에 서 있는 묘탑으로, 원진국사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같은 경내의 원진국사비가 고려 고종 11년(1224)에 건립되었다는 것을 보면, 부도 역시 이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겠으나 양식과 형식 그리고 수법상으로 보아 좀 더 시대가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보경사 원진국사 부도 : 경북 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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