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김방경 시대 능묘와 부도(3) - 1220년 조충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9-08-07 09:08 조회2,321회 댓글0건

본문

 

3) 1220년 조충(1171∼1220) 죽음. 묘와 묘지석(개성→강원 횡성)

  공의 이름은 충(冲)이고, 자는 담약(湛若)으로, 횡천(橫川) 사람이다. ---문경공(文景公)인 영인(永仁)의 아들이다. 어머니 영평군부인(鈴平郡夫人) 윤씨(尹氏)는 ---문숙공(文肅公)인 관(灌)의 손자이자, ---문강공(文康公)인 언이(彦頤)의 아들인, 직사관(直史館) 자고(子固)의 딸이다.---

  이 해 6월 28일에 병이 들어 ▨▨▨ 의원(醫員)이 ▨▨▨ 약(藥)이 ▨▨ 종일 문(門)에 이어졌다. 사성(司星)이 아뢰기를, “태백성(太白星)이 방성(房星)을 침범한 형상입니다”라고 하였는데, 9월 초 3일이 되어 병이 깊어져 돌아가시자 양제리(楊堤里)의 집에 빈소를 차렸다. 바로 금(大金) 정우(貞祐) 8년 경진년(고종 7년, 1220)으로, 향년 50세이다.

임금이 듣고 매우 슬퍼하여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부조(賻弔)를 보내어 장례를 돕게 하고, ▨ 시호를 추증하여 문정공(文正公)이라고 하였으며, 사흘 동안 조회를 멈추었다. 이 달 28일 갑인일에 승천부(承天府)의 건유산(乾維山) 기슭에 ▨ 장례지내니, 예(禮)에 따른 것이다.---

  공은 문하시랑평장사 판이부사(門下侍郞平章事 判吏部事) 문의공(文懿公) 최선(崔詵)의 딸인 ▨▨▨ 창원군부인 최씨(昌原郡夫人 崔氏)와 결혼하였다.---

시기거랑 지제고(試起居郞 知制誥) 윤우일(尹于一)이 글을 지으며, 명(銘)하여 이른다.---

금(大金) 정우(貞祐) 8년 <이하 결락>


○ 조충(趙冲 : 1171∼1220)의 본관은 횡천(橫川 : 지금의 강원 횡성군)이고, 자는 담약(湛若)이다. 시중(侍中) 영인(永仁)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직사관(直史館) 윤자고(尹子固)의 딸이다.

○ 조영인-조충-조계순-조변 의 가계로 조충은 최선의 사위로 최종준의 매부이고, 조변은 김방경의 사위이다.


○ 조충묘지명(趙冲墓誌銘)은 1220년(고종7년) 윤우일(尹于一) 찬이다. 원래 그의 묘소는 개성(승천부(承天府)의 건유산(乾維山) 기슭)에 있었으나 38선으로 남북이 갈리게 되자 그의 후손들이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지석은 1988년 묘자리를 수리할 때 발견된 것이다.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정암리 산207-1. 시도유형문화재 제110호


원래 조충(趙沖)의 묘지(墓地)는 개성군 상도면 면동 건좌 태조왕비 제릉(齊陵) 서록(西麓)에 있었던 것이나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실적(失跡)되었다. 도굴이 성행하던 일제시대에 동묘(同墓)도 수난을 당하여 지석(誌石)만 남아있던 것을 1926년 최모씨가 발견하여 묘를 찾게 되었고 아울러 분묘(墳墓)도 다시 수리하였다. 해방후 38선으로 남북이 갈리게 되자 장차 통행이 두절될 것을 염려하여 1948년 10월 동 묘역(墓域)을 횡성군 우천면으로 옮겨 묻고, 1988년 묘역 정비시 지석이 드러나 다시 지석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전체 네조각으로 갈라져 서너곳이 깨어져 나갔다. 현재 남은 부분도 파여진 곳이 많아 상당 부분 판독이 불가능하다.






                              조충 묘 : 강원 횡성



 조충 묘지석 : 강원 횡성



조충 사당 세덕사 : 강원 횡성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