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헌공(孝獻公) 눌암(訥菴) 휘 찬(瓚) 교지 54매
페이지 정보
김발용 작성일09-07-18 18:43 조회1,743회 댓글1건본문
김찬(金 瓚)1543(중종38)∼1599(선조32)
조선의 문신. 자는 숙진(叔珍), 호는 눌암(訥菴). 익원공(휘 사형)의 후손으로 형조참의(刑曹參議) 언침(彦沈)의 아들. 1567년(선조즉위) 진사(進士)가 되고, 156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1570년에 검열이 되고, 이후 대교·봉교·전적·형조정랑·검상·사인·이조정랑 등의 관직과 지평·집의·정언·헌납·사간·수찬·교리·응교 등 삼사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1573년 평안 삼도사로 나가 군적(軍籍)을 정리하였으며, 다음해에는 평안도 순무어사로 활약하였다. 1584년 이후로는 전한·직제학·승지·좌참찬·동지중추부사·대사헌·대사간·대사성·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임금의 파천을 반대하였으며, 대사헌으로서 선조를 호종(扈從)했다. 임금 일행이 개경에 이르자 동인(東人) 이산해(李山海)의 실책을 탄핵하여 영의정에서 파직시키고,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있던 김공량(金公諒)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뒤에 정철(鄭澈) 밑에서 체찰부사(體察副使)를 역임하고, 양호조도사(兩湖調度使)로 전쟁의 뒷바라지를 하였으며, 1594년 접반사(接伴使)로서 명나라 지원군을 인도(引導)하고 일본군과 강화회담을 하는 등 크게 활약했다.
또, 일본과 강화회담을 벌일 때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부터 예조판서·지의금부사·대사헌·이조판서를 연이어 지냈고, 1596년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거쳐 우참찬(右參贊)까지 승진하였다. 대사헌 때 가족을 멀리 피난시켰다고 탄핵을 받고 체직되는 등 소소한 정치적 부침을 겪기도 하였지만, 문장가로도 이름이 높았으며, 경제문제에 밝고 외교적 수완이 능숙한 명신이었다.
임진왜란 수습의 막후 인물로서 3국간의 외교적인 절충을 성공시킨 명신으로 특히 경제정책의 전문가이자 명문장가였다. 임진왜란 뒤 전쟁의 수습과정에서 죽자, 선조는 조회를 정지하여 추모의 뜻을 표했다. 시호는 효헌(孝獻)이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贈 貞敬夫人) 양성이씨(陽城李氏. 1549~1636. 8.29)이며 부는 용(墉)이다. 묘소는 현재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 산 42-1이며 승지골(勝地고을:성죽골로 잘못 불리어짐)로 불리운다.
댓글목록
관리자님의 댓글
![]() |
관리자 |
---|---|
작성일 |
눌암공의 귀한 교지류 사진 자료 잘 감상하였습니다.
본 홈 역사적 주요 인물 <김찬>란에 추가하여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