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방경가(金方慶家)의 연행록(燕行錄)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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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9-05-07 13:44 조회2,294회 댓글1건본문
김방경가(金方慶家)의 연행록(燕行錄)
1) 원나라 수도 대도(연경)와 여름철 수도 상도(개평부)
여진족의 금나라가 거란족의 요나라를 멸하고 1153년에 상경(흑룡강성 아성현 남쪽)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중도라 하였다. 몽골의 쿠빌라이칸 때 1263년에 중도라 불렀고, 1281년에는 대도로 고쳤다.
몽골은 고작 1,2백만명의 인구로 1,2억명의 유라시아 대륙을 다스리는 대몽골 제국을 형성하였다. 대도는 세계 각지의 사람과 문물이 집결하던 당시 세계 제1의 도시요, 팍스 몽골리아의 중심이었다.
쿠빌라이칸이 황제로 등극한 개평부(開平府)는 1263년 上都로 바꾸었다. 대도가 중국식 도시에 가깝게 건설되었다면, 쿠빌라이가 애초에 건설한 여름 수도인 상도는 샤머니즘적인 의례와 몽골식 생활방식을 유지하는 중심 지역이었으며, 점차 수도로서보다는 사냥터로서 기능했다. 마르코 폴로가 방문했을때, 상도는 대부분의 지역이 사냥토가 되어 있었다. 쿠빌라이는 대칸이 되고 나서는 수도 북경의 숨막힐 듯한 더위를 피해 6,7,8월을 이곳에 와서 지냈다.
1260년(45세) 개평에서 개최된 쿠릴타이에서 대칸으로 선출
1263년(48세) 개평을 상도로 개칭
1267년(52세) 대도 건설 시작
1271년(56세) 유병충의 제안으로 중국식 왕조 이름 元을 채택
1274년(59세) 마르코폴로, 대도에 도착
2) 이장용와 외손자 박전지의 연행길(1261.6, 1279)
이장용(李藏用, 1201~1272)은 최종준(?~1246)의 사위로 김방경 처남 박휘의 처부이며, 박전지(1250~1325)는 그의 외손자이다.
1261년(원종2) 6월, 이장용이 세자(*충렬왕)을 수행하여 원나라에 들어 갔을때, 당시 연경에서 여 원 양국 관료들의 교유가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당시 연경행성 장기(掌記)로 있던 왕운도 이장용과 긴밀히 교류하였다. 당시 고려는 몽고와의 전쟁 초기부터 몽고 정부의 토대 구축에 크게 기여한 야율초재, 유병충, 우승상 사천택, 좌승상 홀로불화, 왕악(鄂) 등과 같은 중요한 인물들과 개인적 유대 관계를 유지하면서 국가의 독립 유지를 위한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구사하였다.
이장용의 외손자인 박전지가 정가신(?-1298), 金事業과 함께 1298년 충선왕의 개혁이 실패로 끝나고 왕(*충선왕)과 함께 원에 들어가 왕운 등과 교류하였다. 박전지가 왕운을 방문했을때, 왕운이 그의 모습을 보고 이장용을 (1261년) 연경행성에서 만났던 일을 추억하면서 시를 지었다. 여기서도 왕운은 이장용을 신선에 비유하고 있고, 당시의 한림학사들이 賢相으로 추앙했다고 말하고 있다.
<화고려참정이현보> : 왕운(왕惲, 1227-1304) <추간선생대전문집>15 칠언율시
* 그의 <中堂事記>는 중통 연간(1260-1263) 원 중서성의 성립 당시 여러 제도를 확립시킨 근본적인 문제를 일기체로 상세히 서술한 중요한 자료이다.
공(*박전지)이 처음 태어나자, 문진공(*이장용)이 총명한 재능이 있음을 알고 자신의 아들처럼 길렀다. 자라나자 널리 삼분(三墳)과 백가서(百家書)를 통달하고 아울러 음양비결(陰陽秘訣)도 꿰뚫었으며, ▨▨방약(方藥)의 서적까지도 훤하게 알지 않는 것이 없었다. 글을 잘 지었는데 악장(樂章)이 특히 뛰어났다. 외조부가 아끼고 또 귀하게 여겨 할아버지와 손자가 서로 친구[知己]와 같이 되었다.
(충렬왕 5, 1279 )에 우리 나라가 세조황제(世祖皇帝)의 조지(詔旨)를 받들어 공경자제(公卿子弟)를 간택하여 원의 조정에 입시(入侍)하게 하자, 공이 단연 으뜸으로 천거되어 나라를 떠나 원 조정에 이르렀다. 이에 앞서 문진공이 입조(入朝)하였는데, 학사(學士) 왕악(王鶚)은 금(金)나라의 장원(壯元)으로써 공을 보자 옛친구를 만나는 것과 같아 드디어 마음을 터놓고 사귀게 되었다. 그 외조카[外甥] 한림학사(翰林學士) 왕지강(王之綱)은 공이 궁궐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두 사람이 서로 ▨▨ 마음을 튼 것을 생각하여, 공을 데려다가 집에서 술을 마시고는 왕악의 노년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보게 하였다. ---
원의 서울에 머물러있으면서 공은 해마다 매 번 나이 들고 덕망 높은 학자들과 고금(古今)의 흥망과 치란(治亂)의 자취와 더불어 외국의 산천과 풍토에 관해 확실하게 대답하기를 마치 손가락이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처럼 하였다. 모두 그 총명함에 탄복하여, “공은 일찍이 눈으로 보지 않고서도 어떻게 저 나라의 풍속이 이와 같은 줄 알고 있습니까. 가히 문 밖을 나서지 않고도 천하를 아는 이라고 할만합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듣고 훌륭함을 드러낸 것을 가상히 여겼다.
중국에서 해가 감에 따라 벼슬을 더해주고 녹봉을 내려주며 포상하였다. 병술년(충렬왕 12, 1286)에 상국(上國, 元)에서 조칙을 내려 장사랑 정동행중서성조마 겸 충유학교수 동제거(將仕郞 征東行中書省照磨 兼 充儒學敎授 同提擧)로 임명하니, 공이 황제의 명령을 받고 귀국하였다.
<박전지 묘지명>
3) 김방경 1차 연행길 (54세, 1265.1.25-5.1 /3개월)
(54세, 대장군) 1265년 봄 정월 을미일에 광평공(廣平公) 왕순(王恂), 대장군 김방경(金方慶), 중서 사인 장일(張鎰) 등을 몽고에 보내 감사의 뜻을 표하고 또 토산물을 바치었다. 5월 초하루 기사일에 광평공 왕순(王恂)과 대장군 김방경(金方慶)이 몽고에서 돌아왔는데 황제가 그를 후하게 위로하여 보냈으므로 중앙이나 지방에서 모두들 영광이라고 하였다.
앞서 원나라에 선물을 가져가는 사신들이 반드시 국가적 선물들을 가지고 갔다가 혹 나머지가 있게 되면 사신으로 간 자가 대개 자기의 사사용으로 써버리곤 하였는데 김방경이 진봉사가 되었을 때에는 이러한 나머지들을 모두 다 도로 국가에 갖다 바쳤다.
4) 김방경 2차 연행길 (58-59세, 1269.9.7-1270.1. /5개월)
1269년(원종10)에 임연(林衍)이 왕을 폐립하였는데 이때 마침 세자(世子)는 원나라로부터 돌아오던 길에 의주(義州)에 이르렀다가 국가에 정변이 생긴 것을 듣고 다시 원나라로 들어가 황제에게 이 사연을 보고하였더니 세조(世祖)는 알탈아불화(斡脫兒不花) 등을 파견하여 국내에 있던 여러 신하들을 훈유하게 하였다. 알탈아불화가 귀국하게 될 때 김방경은 황제께 올리는 글(표문-表文)을 가지고 그와 함께 원나라로 갔다.
9월 경술일에 임연이 추밀원 부사 김방경, 대장군 최동수로 하여금 몽고 사신 알타사불화(斡朶思不花)와 함께 몽고로 가게 하였다.
김방경 일행이 동경(東京)에 이르러 왕(원종)이 이미 왕위에 다시 오르게 되었고 또 원나라에 입조(入朝-예방)하게 된다는 말을 듣고 그냥 머물러 있으면서 왕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270년 봄 정월 초하루 신축일에 왕이 박주(博州)에 들러서 먼저 최동수를 보내 몽고의 도당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전달하였다. 기유일에 이장용, 김방경, 곽여필이 동경으로부터 왕의 행궁(行宮)에 와서 뵈었다.
당시에 최탄(崔坦), 한신(韓愼)이 반란을 일으켜 여러 고을의 수령들을 죽였으나 오직 박주(博州)의 장관인 강분과 연주(延州)의 장관인 권천(權闡) 두 사람만은 예의에 맞게 대우하면서 “김공(김방경)의 덕을 우리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강분, 권천 두 사람이 김방경의 매부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듬해에 김방경이 몽가독과 함께 서경으로 오니 서경 지방의 부로(父老)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와서 김방경을 대접하고 울면서 말하기를“공(방경)이 여기에 있었더라면 어찌 최탄, 한신과 같은 자의 반란 사건이 일어났겠습니까?”고 하였다. 최탄 등도 역시 조석으로 와서 김방경을 만나 뵈곤 하였다.
(58세, 추밀원부사) 1269년 9월 경술일에 임연이 원종을 폐위시키고 그의 아우인 안경공 창을 옹립하는 쿠데타를 일으키고, 원나라에서 임연의 입조를 요구하자 원나라 사신과 함께 원나라에 들어갔다.
그때 최탄과 한신의 무리가 북계(서북면)에서 반란을 일으켰다(이후 서경에 동녕부를 두어 원 직할령으로 삼았다. 20년후인 1290년 돌려받았다). 당시 원나라에 가 있던 태자 심(*충렬왕)과 재상 이장용은 김방경으로 하여금 몽구트 군사와 동행하게 하여 서경(*평양)을 넘어서지 못하도록 하였다. 김방경은 동경(요양)에서 몽골 군대가 고려 경내로 들어서지 못하도록 노력하가 이듬해 서경을 거쳐 개경에 돌아왔다.
9월 경술일에 임연이 추밀원 부사 김방경, 대장군 최동수로 하여금 몽고 사신과 함께 몽고로 가게 하였다. 임연이 황제에게 드리는 글에 이르기를
“전왕이 질환에 걸리더니 점차 위독하게 되었는지라 조금이라도 일을 덜어 생명을 연장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왕위까지도 손위할 마음이 간절하였습니다. 항차 아우를 먼저 왕위에 오르게 하라는 것은 돌아가신 임금의 말씀이고 또 왕위는 하루라도 비워 두지 못할 일입니다. 그래서 국왕 왕창은 부왕의 유훈을 거역할 수도 없고 신하 된 도리를 어길 수도 없어서 마침내 부득이 임시로 국정을 대행하게 하였고 그 즉시로 사연을 갖추어 빨리 조정에 보고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왕과 세자의 족속들의 무사 여부에 대해서는 황제의 사신들이 보았으니 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또 여기서 보내는 사신의 입을 통해서도 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실정을 모두 캐어 보고 인자한 은혜를 베풀어 주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고려사》 제26권 - 세가 제26 > 원종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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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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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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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세기 김방경 시대를 탐구함에 있어
김방경가의 원나라 사행길을 비롯한
당시 세계 제1의 도시 대도(북경)와 요동, 심양 등
고려인 거주지에서의 행적과
당시의 시대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간나는 대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