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충렬공 김방경 일본정벌 그 전적지를 찾아서-1

페이지 정보

김발용 작성일09-04-03 16:53 조회3,058회 댓글0건

본문

 

              충렬공 김방경 일본정벌 그 전적지를 찾아서

 

                                                                                                                 이재범(경기대 교수)
- 답사를 가기 전에

 

갑자기 전화를 받고 당황하였다.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에 관해서 문의를 해온 것이다. 물론 『고려사』에 관심이 많으니 비전공자보다야 상식이 많다고 할 수 있겠지만, 같은 시대라고 해도 전문가가 따로 있는 한국사이다 보니 내가 과연 자문을 해도 괜찮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과히 우리 역사상 평가하기가 매우 어려운 인물을 오로지 조상 하나라는 사실만으로 답사를 가겠다고 하니 일견 대견해 보이기도 하였다.

 

- 김방경 후손들의 열정

김방경(金方慶)은 원간섭기를 살았던 인물로 역사적 평가가 그리 쉬운 편은 아니다. 일단은 원간섭기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하는 것이 문제이고, 다음이 원의 간섭하에서의 김방경의 활동이다. 원간섭기에 대한 인식은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된다. 하나는 원의 침공에 대한 고려인의 항쟁이다. 그리고 원의 간섭하에서의 고려에 대한 수탈이다. 어느 시기 하나 우리에게 긍정적으로 다가오는 시기가 없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그는 삼별초(三別抄)를 토벌하였고, 두차례의 일본정벌의 책임을 졌던 장군이었다. 그런 한편 백성들에게 제방을 쌓게하고, 농토를 개간하는 등의 선정을 베풀기도 하였다. 이러한 종합적인 연구성과가 없다는 것이 이 시기 연구에 대한 어려움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시기를 살다간 인물들의 비운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후일을 기약하고, 예비 만남을 서초동의 음식점에서 가졌다. 여기서 처음 알게 된 것이 약 5년전부터 여몽연합군의 고려군 사령관이었던 김방경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선조의 얼을 기리기 위해 애쓴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은 이미 제주도와 대마도 답사를 마쳤고, 그 밖에 고려와 몽고군이 경유했던 지역들을 답사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김방경의 역사적 의의에 대하여 이미 관계전문가들에게 원고도 의뢰한 상태라고 했다.

이렇게 하다보니 몇몇 분은 이미 전문가 이상의 식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첫 만남의 장소에 참석은 하지 않았으나, 여몽연합군의 일본점령에 대하여 저서를 내신 분도 있었다.(김봉석, 『김방경, 일본을 정벌하다』, 시간의 물레, 2006) 어떤 분은 그 책에 굵은 줄을 긋고 거의 암기하다 싶이 한신 분도 있었다. 그러니 나처럼 이 시대 전공자가 아닌 사람은 자칫 말조심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 관계 자료에 대하여 나보다 훨씬 식견이 높아 보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7년 이상을 유학하고 오셨다는 일본어에도 능통하신 분이 있어서 사람을 여간 주눅들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든 그날은 나로서는 내가 준비해 간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여 서너차례 답사시에 구입했던 자료들을 제시하였다. 여기에는 잇키(壹岐), 타카시마(鷹島), 시카노지마(志賀島) 등 여몽연합군이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던 지역의 소개가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내가 놀란 것은 이날의 회식 자리에서 이 지명들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대체로 고려와 몽고군의 일본정벌에 대해서 말하면 대개 묻는 것이 일정하다. 그 질문은 ‘고려군이 일본에 상륙하긴 했나요’이다. 그런데 이날은 모두가 너무나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 지역이 구체적으로 어디인가를 묻는 것이었다. 첫 만남은 그렇게 밤이 깊었고, 나의 긴장 속에서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그리고 며칠후 책임을 맡고 계시다고 한 태영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함께 동행 해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미 두어차례 다녀온 바가 있고, 또 환율도 오르고 하는데 사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지역에 대해서 우리나라에서 그다지 많이 아는 사람도 없을 텐데 잘못하면 엉뚱한 여행만 하고 오는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가 생겨 응락을 했다. 그래서 결정된 것이 2월 21일부터 24일까지의 3박 4일간의 일본답사였다.

 

- 시카노지마의 모꼬쓰까(蒙古塚)를 찾아서

2008년 2월 21일, 집결시각은 오전 8시였다. 이른 비행기로 가서 조금이라도 더 보아야 일정을 줄여 비싼 외환을 극복해 보고자 하는 것 같았다. 참가자는 영환, 재영, 재구, 우회, 발용, 태우, 태영, 재하(항렬, 연장자 순)로 모두 8명, 여기에 내가 더하니 총 9명이다. 9시 30분에 출발한 비행기는 예정된 시각에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에는 박명성(朴明盛)사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박사장은 일본에서 성공한 교포로서 우리 학교(경기대학교) 박사과정을 마친 분이다. 이번 여행은 워낙 특수한 지역을 다닐 뿐만 아니라, 환율도 올라서 특별히 박사장에게 부탁을 해두었다. 일반여행사를 이용할 처지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일본 방문시 몇차례 박사장에게 신세를 져서 늘 미안하던 차였는데, 이번에도 또 신세를 지고 말았다.

japan00001.jpg
▲ 하늘에서 내려다본 후쿠오카 공항 주변

japan00002.jpg
▲  박명성사장(가운데 모자를 쓴 사람)은 박혁거세 몇세손, 도래 100년이라고 인쇄 된 명함을 가지고 있었다.

박사장은 기사와 차를 인도하고 무언가 바쁜지 저녁에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시카노지마로 향했다. 시카노지마는 여몽연합군이 두차례 원정시 모두 격전을 벌였던 전적지이다. 이곳은 일찍부터 일본의 관문으로 ‘금으로 만든 도장’(金印)이 발견되어 일본의 고대사를 밝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지역이다.

그런데 이곳에는 여몽연합군과 관련하여 중요한 사적이 있다. 바로 몽고군 공양비(원구공양비)가 있는 곳이다. 이곳을 모꼬쓰까(蒙古塚)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포로가 되었던 몽고군이 일본군에 의하여 목이 잘린 ‘몽고의 수총’도 있다. 이곳에 있는 공양탑은 소화 2년, 그러니까 1927년에 세워졌다. 이때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의 실현을 위하여 만주의 군벌 장작림을 이용하여 장개석군대와 전투를 하게 했다. 그리고 이 공양탑을 세워 일본과 만주와의 오래 묵었던 감정을 해소한다는 제스츄어를 취했다. 이때 장작림은 감동하여 평화를 도모하자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가 장개석군대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가는 기차를 일본에서 폭파시켜 죽여버렸다. 더 이상 쓸모가 없는 만주의 영웅을 놔둘리 없었던 것이다. 이 공양비는 그러한 정치적 의동 하에서 세워졌다. 그런데 이 비석의 위치가 전과 달라 보였다. 계단을 상당히 가파르게 올라가면 있었던 것으로 기억을 했는데, 차도 바로 옆에 붙어 있어서 무언가 달라졌다고 느꼈던 것이다. 안내판을 읽어보니 후쿠오카 지진 때 쓰러져서 아래 쪽으로 옮겼다고 했다. 어떻든 이 비석을 보면서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것은 왜 고려군의 존재는 없느냐 하는 점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고려는 몽고의 속국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지독한 간섭을 받고 있었으니, 유구무언이다.

japan00003.jpg
▲ 구몽고총 고적지로 오르는 계단

japan00004.jpg
▲ 몽고총이 있던 자리에있는 이치렌종(日蓮宗)의 개조(開組) 이치렌(日蓮)의 좌상

japan00005.jpg

japan00006.jpg
▲ 몽고총 고적지에서 바라본 후쿠오카 앞 바다. 700여년전 이곳은 여몽연합군의 함선으로 가득차 있었을 것이다.

japan00007.jpg
▲ 좌로부터 재영, 발용, 태우, 재구, 우회, 태영, 영환

japan00011.jpg
▲ 아래로 옮겨 새로이 조성된 원구유적 몽고총


japan00009.jpg
 ▲ 몽고군 공양비 앞에서

시카노지마 공양비를 보고 들린 곳은 시카노지마 해신사였다. 이 신사는 그 유래가 상당히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의 고대까지 소급이 된다. 이 지명이 사슴이 많아서 된 것인데, 신공황후가 그 사슴들을 잡으러 이곳에까지 왔었다는 것이다. 시카노지마라는 지명은 바로 사슴이 많아서 시카(鹿, 사슴)의 섬이 되었다는 설명이다. 이곳은 제1차와 제2차의 정벌때 주전장이었던 곳이다. 그런데 이 신사에는 고려후기의 것으로 전하는 고려 동종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전혀 보여줄 생각이 없다.

japan00012.jpg

japan00013.jpg
▲ 일본의 신사앞에 있는 돌기둥. 한자로 "조거(鳥居)"라고 쓰고 "도리이"라고 읽는다. 도리이 안쪽은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며  그경계에 세운다.  우리나라의 홍살문과 비슷하나, "조거(鳥居)"라고 쓰는 것으로 보아 한국의 "솟대"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보는 학설이 있다

japan00014.jpg

japan00015.jpg
 ▲ 시카노지마 해신사 누문(楼門)

japan00016.jpg
 ▲ 시카노지마 해신사 본전(本殿)

japan00017.jpg
▲ 녹각당(鹿角堂). 옛날부터 사슴을 신비한 힘이있는 신성한 동물로 여겨 1만여개의 사슴뿔을 봉헌하여 보관하고 있다.

japan00018.jpg

japan00019.jpg

 

- 여몽연합군 격퇴의 기도처, 하코자키 신사

시카노지마 신사를 거쳐 원구방루(元寇防壘)를 찾아 나섰다. 원구방루란 여몽연합군의 일차 침입때 놀란 일본에서 하카타만(博多灣)을 따라 세워 둔 석축을 말한다. 일본은 방루의 흔적을 계속 발굴하여 사적으로 지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 기사가 여러 차례 찾는 것을 실패하였다. 이유가 있었다. 민가 가운데 있었고, 차가 접근하기가 매우 어려운 곳이었다. 막상 도착하고 보니 몇 개의 돌만 어지럽게 널려 있을 뿐 원구방루라고 하는 나무로 만든 표지가 없었다면, 아무도 알아 볼 수 없을 그런 유적이었다. 이 유적을 뒤로 하고 하코자키궁(箱崎宮)으로 이동하였다. 하코자키궁은 여몽연합군의 공격시 천황이 내린 ‘적국항복(敵國降伏)’이라는 글씨를 받고 여몽연합군의 격퇴를 기도했던 신사이다. 지금도 이곳에는 당시의 글씨라고 전하는 적국항복이라는 현판을 신사의 정면에 부착해 두고 있었다.

japan00020.jpg

japan00021.jpg
▲ 방루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고 원구방루를 알리는 표석과 안내문 만이 남아있다.

japan00022.jpg
▲ 하코자키궁(箱崎宮) 입구

japan00024.jpg

japan00023.jpg

japan00025.jpg

하코자키궁을 답사후 우리 일행이 찾은 곳은 동공원(東公園)이었다. 이곳에는 여몽연합군이 일본을 공격할 당시의 상황(上皇)이었던 가메야마(龜山)와 불교 승려인 의 이치렌(日蓮)의 동상과 원구사료관이 있다. 원구사료관은 관람객이 적어서인지 아무 때나 개방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거대한 구메야마 상황과 이치렌의 동상을 보면서 이 일대가 대륙으로부터의 위협과 거부감을 느끼게 교육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새삼 놀랄 수 밖에 없었다.

japan00026.jpg
▲  여원 연합군의 1.2차 일본정벌 당시 일본의 천왕인 가메야마의 동상

japan00027.jpg
▲ 이치렌종의 창시자 일연의 동상. 여원 연합군의 침략을 예언해 영웅으로 칭송받고있다.

japan00028.jpg
▲ 동공원 내의 원구사료관.

japan00029.jpg

여기까지 답사를 하고나니 벌써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오늘의 숙소는 타케오(武雄)이다. 타케오는 온천으로 유명한 곳이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도저히 민가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 않은 야지를 달리다 산으로 접어든다. 누군가가 이거 아주 형편없는 외진 곳이 아닐까하는 걱정을 한다. 그러다 잠시 후 상당히 번듯한 온천장으로 들어간다. 이곳이 첫날 우리를 맞이하게 된 ‘사계절의 하늘(四季節天空)’이라는 온천장이다.

japan00033.jpg
온천장, 사계절의 하늘(四季節天空)

japan00034.jpg

온천을 하고 유카타로 갈아 입은 뒤 저녁식사를 했다. 일본을 점령하러 온 장군의 후손들이 일본 전통 의상을 입고 나오니 다소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나도 다소 긴장하고 있었던 듯 하다. 김방경장군의 후손들을 안내하였기 때문일까? 소주가 몇잔 돌아가고 나니 웃음도 나오고 한다. 이렇게하여 첫날 답사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japan00030.jpg

japan00031.jpg

japan00032.jpg

 

- 원구로망의 섬, 타카시마를 향하여

새벽부터 서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타카시마를 가기 위해서다. 타카시마는 우리나라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특별하게 관광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온천이 유명하지도 않다. 우리 일행처럼 특별하게 여몽연합군의 자취를 찾는 사람들이 이따금 찾는 그런 곳이다. 이곳을 가기 위해서는 몇가지 루트가 있다. 큐슈 북쪽의 호시카(星賀)쪽으로 가면 연육교가 있다. 그러나 타케오에서 가는 것은 무리다. 타케오에서는 이마후쿠(今福) 항구로 가서 그곳에서 페리에 승선하는 것이 가장 좋다.

japan00035.jpg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는 이마후쿠항에 예정대로 도착했다. 날씨는 썩 좋지가 않아서 가랑비가 내리다가 그치고 하는 정도였다. 타카시마행 페리는 비도(飛島)를 거쳐 타카시마의 도노우라항(殿 浦港)에 도착했다. 우리나라의 노화도 정도의 작은 섬이다. 그러나 이곳은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도 소개된 사건이 있을 정도로 세계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이다. 물론 동방견문록에는 타카시마라는 지명이 소개되고 있지는 않지만, 이곳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은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

japan00036.jpg

japan00037.jpg

japan00038.jpg
 ▲ 여몽연합군이 진격해 들어가던 다카시마(鷹島) 해안.

japan00039.jpg

태풍을 피해  몰려온 배들이 서로 부딫쳐 침몰했다는 다카시마의 해만(海灣)

 

----- 동방견문록의 내용 :

159장 여기서 그는 치핑구섬(일본)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전략) --- 또 한가지 놀라운 것은 이 섬 군주의 궁궐이다. 그는 온통 순금으로 뒤덮인 멋진 궁전을 갖고 있는데, 우리가 집이나 교회를 납판으로 덮듯이 금으로 쒸워 놓았다. 그것이 얼마나 값비쌀지는 말로 다하기 힘들 정도이다. 또한 그의 궁실에 있는 보도들 역시 모두 순금으로 되어 있고 두께는 두손가락 정도나 된다.

---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누군가가 대카안에게 바로 이 같은 엄청난 재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지금의 통치자인 쿠블라이는 그 섬을 정복하고 싶어했다. 그개서 그는 수많은 배에 기병과 보병을 싣고 신하 두사람에게 지휘하도록 하였다.

--- 어느날 하루는 바람이 북쪽에서부터 어찌나 세차게 불어오는지, 군인들은 만약 지금 떠나지 않으면 배들이 모두 부서지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모두 배에 올라 그 섬을 떠나 바다로 들어갔다. 그들이 4마일쯤 갔을 때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불었고 워낙 많은 배들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 부딪쳐서 상당수가 부서지고 말았다. 그러나 부서지지 않은 배들은 바다로 흩어져 난파는 모면했다. 그때 그들은 그 근처에서 그리 크지 않은 또 다른 섬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 섬까지 헤쳐간 배들은 그곳에 피신할 수 있게 되었지만, 헤쳐나가지 못한 배들은 그 섬에좌초하고 말았다. 난파된 배에 탄 사람들 가운데 다수는 그 섬으로 피신했지만 섬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은 죽었다. --- 이 섬에 피신해 남아 있던 사람들의 숫자는 거의 3만 명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이제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했다. <마르코 폴로/김호동, 사계절, 2001>

 

결국 위의 3만명은 거의 포로가 되어 하카타로 끌려가 죽임을 당하였다. 그런데 도노우라항에 하선하면 맨 처음 우리를 놀라게 하는 표석이 있다. 타카시마인들이 스스로 붙인 자신들의 섬에 대한 별명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섬을 ‘원구로망의 섬’이라고 부른다. 원구란 일본에서 여몽연합군의 공격을 칭하는 별칭이다. 원의 침구를 줄여서 부른 것이다. 우리가 왜의 침구를 왜구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그 밖에도 일본에서는 원구 대신 몽고습래라고 부르기도 한다. 몽고가 쳐들어왔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타카시마에서는 원구가 쳐들어온 것을 격퇴한 낭만의 섬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외적 격퇴지에서 호국정신을 되새기는 것과 같은 정서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것에 대한 것은 이해가 가는데, 이 일본이 그런다는 것은 과히 유쾌하다고 할만한 일은 아니었다.

japan00040.jpg
 ▲ '어서오십시오 다카시마' '원구 로망의 섬' 이라 새겨진 표석

japan00041.jpg

 

- 타카시마의 향토역사자료관

그런 기분을 느끼면서 종합적으로 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는 타카시마향토역사자료관으로 향했다. 타카시마섬에는 날씨 탓도 있겠지만, 돌아다니는 사람을 거의 만날 수가 없었다. 우리 버스의 기사도 여기가 처음이라고 했다.

타카시마의 향토역사자료관은 생각보다 컸다. 그리고 진열도 잘 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의 이 정도 도서지역에 이만한 역사자료관이 있을까라고 의문을 품어 보았다. 내고향 곡성의 읍단위 지역에도 이만한 것이 없는 것을 보면 일본인의 향토애와 역사의식은 우리보다 한 수 위로 생각되었다.

japan00042.jpg
▲ 다카시마 역사민속사료관

japan00043.jpg

japan00044.jpg
 ▲ 바다에서 건져올린 여몽연합군 함선의 닷돌

japan00045.jpg

japan00046.jpg

japan00047.jpg

japan00048.jpg

japan00049.jpg

japan00050.jpg
▲ 어부에 의해 발견된 직인으로 "官軍総把印" 이라 새겨있다. '총파'란 원으로부터  들어온 고려후기의 관직으로 일본원정 당시 충렬공의 사위인 조변(趙汴)의 관직이 총파이다.

타카시마의 향토역사자료관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한 곳은 전시실이고, 다른 한 곳은 유물보존실이다. 전시실의 주된 내용은 타카시마의 역사와 여몽연합군의 공격에 대한 내용이었다. 후자에 대한 것이 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유물보존실은 이 일대에서 건진 목선들을 복원하는 현장이었다. 아마도 군선의 골재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들을 모아 염분을 빼고 원래대로 맞추는 작업을 하는 것 같았다. 우리 일행들 가운데 저 나무들이 천관산 아니면 변산에서 온 것이라는 목 멘 소리도 있었다. 당시 고려는 1차에 900척, 2차에 900척 모두 1,800척의 군선을 건조하였다. 그 장소가 전라북도 부안의 변산과 전라남도 장흥의 천관산 일대였다.

japan00051.jpg

japan00052.jpg

japan00053.jpg

japan00054.jpg

향토역사자료관을 나와서 고려불상을 찾으러 나섰다. 타카시마에 있는 고려 불상은 여몽연합군이 공격을 할 때 싣고 왔다가 군선이 난파되자 수장된 것을 건진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당시의 군인들이 종교시설을 수반하고 원정에 나섯던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타카시마가 초행이라는 기사는 이 중요한 자료를 찾지 못하고 말았다. 더욱 난감한 것은 이곳이 섬이기 때문에 나가는 배편을 놓치면 얼마동안 섬에 지체해야 할 지 알수가 없는 노릇이다. 결국 다음 목적지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다음 목적지는 몽골촌이었다. 몽골촌은 이곳에 마치 몽골의 초원을 재현해 놓은듯한 그런 정경을 연출해 놓은 곳이었다. 섬의 정상부에 몽골의 초원지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몽골의 말을 사육하고 있고, 이곳에 몽골에서 볼 수 있는 유목민의 거주지인 겔도 만들어 놓았다. 마치 유목 체험을 하듯 만들어 놓은 겔은 냉난방이 되는 숙소였다. 일본인들의 상술보다도 그 이전에 기발한 아이디어를 읽을 수 있었다. 이곳은 이 일대에서는 상당한 관광지인 듯, 모노레일도 설치하여 이동을 돕고 있었는데 겨울이라서 운행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japan00055.jpg

japan00056.jpg

japan00057_1.jpg

japan00059.jpg
▲ 몽고의 가옥인 겔 앞에서 재영님. 몽고인들은 흰색을 숭상하기 때문에 하얀색으로 겔을 짖는다.

japan00058.jpg
▲ 겔의 내부

japan00060.jpg

몽골촌의 답사가 끝나고 옆에 있는 고전장에 들렀다. 이곳도 여몽연합군과 일본군의 접전이 있었던 곳인데, 공원처럼 잘 꾸며 놓았다. 자신들의 격전지를 공원처럼 꾸며 놓은 일본인들이 얄밉기도 했지만,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 애착을 보이는 그들이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했다.

japan00061.jpg

japan00062.jpg

japan00063.jpg

japan00064.jpg

japan00065.jpg

japan00066.jpg

japan00067.jpg

 

<계속>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