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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역] 고려 검교 정승 임해군 시호 문정이신 경주 이진(李瑱)공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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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국회 작성일09-01-24 01:21 조회1,928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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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역] 고려 검교 정승 임해군 시호 문정이신 경주 이진(李瑱)공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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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조 동암공 무덤은 우봉군 도리촌에 있다. 족보와 세승을 살피건대 목은 이선생(李齊賢)이 공의 아들로 시중공 도리촌 묘지명에 ‘장지가 선영에 있다’고 하였으니 이 또한 징험할 수 있다. 그러나 공의 무덤은 무너져 전하지 못한지 오래이다. 지난 경술년 봄에 어떤 자가 도굴하여 옛 기물을 파냈는데 이른 바 고려자기와 공의 지석이 나왔다. 이에 종형과 여러 종손이 달려 가서 살폈더니 곧 무덤의 앞 섬돌 안이자 과연 시중공 묘의 오른쪽 언덕이었다. 무덤을 돌로 둘러 깎은 벽처럼 하였고, 지석과 기물을 밖에 묻어 두었다. 때문에 무덤이 옛 모습대로 있었고, 지석은 둥글고 길은데, 길이는 3척이요, 넓이는 그 절반(1.5척)이다. 우뚝한 둘레면에는 실같은 경계가 있어 32줄을 새겼는데, 줄마다 59자이요, 줄글사이는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경계가 있다. 지석의 머리에 가로에는 전서체로 ‘이문정공묘지명’이라는 7자의 큰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제1행에는 ‘고려국 중대광 검교 첨의 정승 영예문관사 임해군 증시문정공 이모묘지명 병서’라 하였고, 제2행에는 지은이의 성명을 기록하되 ‘선부상서조간’이라 하였는데, 지석의 문자가 문드러져서 해독할 수가 없다. 우연히도 그 글의 반쪽을 얻어 공의 휘와 호, 선계 삼세대의 장지를 모두 살펴 알 수가 있었다.

태부인(공의 어머니)의 족보는 실전되었다. (태부인의) 아버지는 휘 元이다.

부인의 성씨 역시 전하지 못하고 함께 문드러졌다.

지에는 공이 9월 12일에 돌아가셨다 하는데 족보에는 20일로 기록되었는데, 족보 기록에 대선(둘째)이 시중공(제현)보다 장자인가 의심하였으나, 여기를 보면 믿을 만하다. 무릇 징험할 만한 행적은 겨우 한 두 가지이고 묘지명은 더욱 문드러져 읽을 수가 없다.

이에 다시 ‘검교정승임해군경주이모지묘’ 13자를 지석 뒤에 새기되 더욱 그 글자를 크게 깊이 새겨넣었다. 이를 옛 장소에 안장하고 묘를 개수하였다. 때는 우리 태황제 47년 3월 22일이다.


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는 진이요 초휘는 방연이니, 자는 온고이며, 동암은 그 호이다. 신라 좌명공신 알평의 후예이다.

증조부는 휘 ‘승고’이니 경주호장이다.

조부는 휘 ‘득견’이니 상의봉어동정이다.

아버지는 휘 ‘핵’이니 문하평리로 은청광록대부 상서좌복야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김해군 태부인 김씨이다.

공은 고려 고종 갑진년 생이다. 묘지명에는 ‘복야부군이 죽자, 황제가 아이를 주었는데, 공을 낳았다’고 하였다.

공은 자품이 크고 기량이 넉넉하며, 어려서 배우기를 좋아하고 경서와 사서를 널리 통독하였고 시를 잘 지어 어려운 운자에 응답하기를 메아리처럼 하였다. 좨주 이송진이 보고 감탄하여 ‘큰 그릇이다.’하였다.

공과 형제 두 사람이 태부인에게 함께 학업을 전수 받았는데 문장으로 빼어났다. 묘지명에 ‘태부인이 여러 자식을 사랑하여 시와 서를 말로 전수하였다’고 하였다.

공이 일찍 어머니를 섬기기를 삼가 진실되고 맹렬하게 하였고, 경진년에 과거 급제하였다. 묘지명에 ‘약관에 사마시에 등과하였다.’고 하였다.

경진년에 병과 조광주사록으로 발탁되어 한림원에 들어갔다. 왕이 문신을 시험하여 친히 9명을 뽑았는데 공이 2등이었다. 공의 아우 세기(世基)는 3등으로 발탁되어 모두 당대에 이름을 내었으니 ‘천장급제’로 불리었고, 왕이 매양 ‘우리 문생(吾門生)’이라 일컬었다.

기거 중서사인을 거쳤으며, 안동부사로 나가서는 묵은 병통을 제거하고 학교를 일으켰다. 묘지명에는 ‘(안동)부 사람들이 공을 위하여 복을 빌기를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전적총랑으로 옮겨 다니다가 우사의대부 사림원학사로 승진하였다. 당시에 승지방을 혁파하고 본원에서 출납을 맡았는데, 공과 학사 박전지 등이 한 마음으로 (임금을) 보좌하였더니 붉은 가죽 띠를 하사하여 총애하였다.

대사성 밀직승지로 옮겼다가 전법판서로 바뀌었다. 묘지명에는 ‘송사가 있을 때 양측이 함께 나오도록하여 대면하여 곡직을 깨우쳐 처결하니 패소한 자가 마음으로 복종하여 원망을 아니하였다.

충선왕이 원에 들어갔을 때, 일 때문에 본국의 간사한 무리를 없애고 친근하고 믿는 사람을 제수하니, 공이 상서로 말하기를, ‘관직은 함부로 줄 수 없는 것이나, 토지를 주고 유공자를 제수하며 나란히 쓸데없는 관직을 줄이고 긴급하지 않은 일을 혁파하소서’하니, 충선왕이 가상히 여겨 허락하였다.

정당문학 상의도첨의사사로 단계를 넘어 제수되었고 찬성사에 진급하였다.

충숙왕 갑인년에 중대광 검교 첨의 정승 임해군을 더하였다. 이후로부터 관직에서 물러나 한가로이 지내며 날마다 시인, 스님들과 소요 자적하였다. 경신년에 상왕이 은병 200, 쌀 500석을 하사하였다. 당시에 시중공(李齊賢)이 지공거(과거시험 출제위원장)였는데 여러 문생들로 하여금 공의 장수를 축원케 하였는데, 이 때문에 자못 그 일을 빛나게 하였으니 당시 사람들이 영예롭게 여겼다.

이듬해 신유년에 돌아가셨으니 향년 78이시다. 시호를 ‘문정’이라 하였다. 묘지명에는 ‘공은 유림의 두터운 존경을 받았고, 조정에서는 공경하고 삼갔으며, 갓을 쓰지 않고는 보지 않았다’고 하였고, 또 ‘평생 가산을 일삼지 않았으며 마음에 응어리가 없어 남과 말이 화통하여 흉금을 내 보였으며, 죽음을 맞을 때도 평소처럼 담소하였다.’고 하였다.

본 부인(부인의 성씨는 실전하였다고 앞에 언급되었음)은 1남을 두었는데 가락군 관(琯)이다.

둘째 부인은 진한국부인 박씨이니 대릉직인 박인육의 따님이다. 3남을 두었는데, 하나는 제현(齊賢)이니 바로 시중공이요, 하나는 호군 지정(之正)이요, 하나는 여해(如海)이니 바로 대선(大禪)이다. 1녀는 복야 박육에게 시집갔다.

가락자 수득, 밀직 복득 상서시중자 서종, 부령 달존, 직제학 창로, 개성윤여, 판사복 임덕수, 전농정 이계손, 대학사 김희조, 판전농 박동생, 판전교 송무, 공민, 혜비, 우윤 김남우, 부정 이유방 측실녀, 중낭장 임부양과 함께 후손이 크게 번성하였고 절의와 명덕이 세상에 혁혁하였다.


오호라. 공이 떠나신지 오래로다. 공의 평생 업적을 다 기록할 수 없고, 세 임금을 섬기며 예우가 드높아 오롯이 최고의 관직에 올랐으니, 연과 남양에서는 공의 초상을 그리고자 하여 말하기를, ‘삼한 인물이 일대에만 노성하다는 말이 어찌 사실이겠는가?’라고 하였다.

다행스럽게도 공의 묘지 기록이 600년을 캄캄하게 지낸 뒤에 다시 드러났으니, 대대로 향화하고 영원히 보전하여 바뀌지 않을 방도를 도모해야 할 것이다. 이에 감히 고려사 열전과 집안에서 전해오던 말과 묘지명에서 살필 수 있는 것을 찬술하여 돌에 새겨 묘지에 표시하였다. 또한 봉묘 사실을 앞에 게재하여 후인들이 이 역사를 알게 하였다. 이에 이를 시행함에 이유가 있으니 더욱 공경하고 삼갈 따름이다.

무덤은 부계 언덕(負癸 : 癸를 등진 방향)으로 도리촌이니 지금의 장천군 지금리이다.

여러 종친 중에 그 일을 주관한 이는 종필, 종진, 종익, 종억, 종선, 상경, 상익이다.


묘를 개수한지 11년 후 신유년 9월 일에

21세손 통정대부 장예원 장예 종형(鍾瀅)이 삼가 기록하다.(비문 찬자)

통정대부 비서원승 정인표(鄭寅杓)가 삼가 쓰다.(비문 글씨)

유사 종학 종식  필우 상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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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국회 졸역 끝.(2009.01.24일 기준)

미심쩍은 곳이 군데군데 있습니다만, 우선 생각 가는대로 초역을 해 보았습니다.

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윤식
작성일

  대부님, 아직 안 주무셨네요. 감사합니다.
부탁 드릴 게 많아서 설 연휴라도 마음 편히 쉬시라고 아직 전화 드리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