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백범(60) 광주학생운동의 발단과 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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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2-06-20 19:26 조회1,866회 댓글0건본문
광주학생운동의 발단과 결과
1929년 11월 3일은 음력 10월 3일 개천절(開天節)이며, 일본 메이지 천황[明治天皇]의 생일인
메이지절[明治節]이기도 하고 또 전신인 성진회의 창립 3주년 기념일이기도 하였다. 이보다
앞서 10월 30일 오후에 광주를 떠난 통학열차가 나주역(羅州驛)에 도착했을 때 광주중학 3학년인
후쿠다 슈조[福田修三] 등의 일본인 학생이 광주여고보 3학년인 박기옥(朴己玉) 등을 희롱하는
것을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 동생 박준채(朴準埰) 등이 후쿠다를 후려치자 학생들 사이에 편싸움이
벌어졌다. 이 싸움은 11월 1일에도 계속되었으나, 2일 하루는 소강상태를 유지하다가 3일 오전
11시경 광주중학의 일본인 학생과 광주고보의 한국인 학생 간에 또 충돌이 일어났다. 이때 광주고보
학생 중 일부는 일본 학생을 편들어 보도한 일본어 신문인 광주일보 본사를 습격하여 그 윤전기에
모래를 끼얹었다.
이리하여 처음에는 개인 간의 감정적 충돌이던 것이 학교와 학교 사이의 충돌로 확대되었고, 나아가
전호남일대의 한국인과 일본인 학생 간의 충돌로 발전하였다. 광주의 학생들은 서슴없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쳤으며, 독서회의 지도자들은 학생들의 항일투쟁을 격려하고 후원하였다.
학교와 경찰에서는 달래고 탄압하는 양면정책을 써서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후 탄압정책을 강화하여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의 학생들을 구속하였다. 그 결과 광주의
신간회지부 ·청년단체 ·사회단체 등은 혼연일체가 되어 투쟁의 전국적 확대에 힘썼고, 학생들을
항일독립운동의 전위대(前衛隊)로 삼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광주 청년계의 지도적 위치에 있던
장석천(張錫天) ·장재성 ·강석원(姜錫元) 등은 ‘학생투쟁 지도본부’를 설치하고, 광주 투쟁을
전국으로 확대하기 위해 활동을 개시하였다. 11월 7일 이후 회합을 거듭한 끝에 장석천은
광주 및 전국 학생의 행동지도, 장재성은 광주 한국인 학생의 행동지도, 국채진(鞠埰鎭)은
전남 각 지방 학생의 지도, 박오봉(朴五鳳)은 노동자 및 노동단체의 지도, 임종근(林鍾根)은
전남 각 공립보통학교 교사와의 연락, 강석원은 외래동지(外來同志)와의 연락, 나승규(羅承奎)는
운동자금 조달 등으로 지도업무를 분담하였다.
학생들의 불 같은 투지와 학생투쟁 지도본부의 열성적인 노력으로 광주학생운동은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비약할 준비를 갖추게 되었고, 11월 12일 제2차 투쟁이 전개되었다.
전날까지 인쇄한 격문을 가지고 등교한 각 학교 학생들은 9시 반을 기하여 일제히 시위운동에
돌입하였다. 학생들이 뿌린 격문은 4종류였는데, 그 중의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검거된 학생들을 즉시 우리 손으로 탈환하자. ② 경찰의 교내 침입을 절대 반대한다.
③ 교우회 자치권을 획득하자. ④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시위의 자유를 획득하자.
⑤ 직원회에 학생대표를 참가시키자. ⑥ 한국인 본위의 교육제도를 확립하라.
⑦ 식민지적 노예교육제도를 철폐하라. ⑧ 사회과학 연구의 자유를 획득하자.
⑨ 전국 학생대표자 회의를 개최하라.
광주학생운동의 영향
제2차 광주학생 가두시위 이후인 12월 2일 서울의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한 중요 공·사립학교와
시내 곳곳에 광주학생운동의 전국화를 위해 학생과 민중의 총궐기를 촉구하는 내용의 격문이
살포되었다. 이에 호응하여 경성 제2고보·경성 제1고보·경신학교(儆新學校)·보성고보(普成高普)·
중앙고보(中央高普)·휘문고보(徽文高普)·협성실업(協成實業)·청년학관·배재고보(培材高普)와
이화여고(梨花女高)·동덕여고(同德女高)·실천여학교(實踐女學校)·경성농업·법정학교(法政學校)·
고등예비학교·전기학교·선린상업(善隣商業)·배화여고(培花女高)·진명여고(進明女高)·
정신학교(貞信學校)·간이상공학교(簡易商工學校) 등이 가두시위 또는 동맹휴학 등으로
학생운동에 참가하였다.
이어서 개성·부산·진주·청주·공주·대전·홍성·예산·조치원·부여·전주·정읍·고창·이리·평양·신의주·
정주(定州)·선천(宣川)·영변(寧邊)·함흥·원산·경성(鏡城)·회령·청진·대구·춘천·해주·사리원 등
각지로 번져 수많은 학교가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여 궐기하였다. 전국 각지의 거의 모든
학교가 참가한 이 운동에는 194개교의 학교와 5만 4000여 명의 학생이 참여하였으며, 그
중 580여 명이 퇴학처분과 함께 최고 5년의 체형(體刑)을, 2,330여 명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광주학생운동은 1919년 3·1운동 이후, 젊은 학생들을 통하여 항일독립정신이 다시 한번 분출된
독립운동사상 격렬하고 힘찬 운동이었다
▣ 김항용 -
▣ 김정중 -
▣ 김태서 -
▣ 김재원 -
▣ 김재익 -
▣ 김주회 -
▣ 김은회 -
1929년 11월 3일은 음력 10월 3일 개천절(開天節)이며, 일본 메이지 천황[明治天皇]의 생일인
메이지절[明治節]이기도 하고 또 전신인 성진회의 창립 3주년 기념일이기도 하였다. 이보다
앞서 10월 30일 오후에 광주를 떠난 통학열차가 나주역(羅州驛)에 도착했을 때 광주중학 3학년인
후쿠다 슈조[福田修三] 등의 일본인 학생이 광주여고보 3학년인 박기옥(朴己玉) 등을 희롱하는
것을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 동생 박준채(朴準埰) 등이 후쿠다를 후려치자 학생들 사이에 편싸움이
벌어졌다. 이 싸움은 11월 1일에도 계속되었으나, 2일 하루는 소강상태를 유지하다가 3일 오전
11시경 광주중학의 일본인 학생과 광주고보의 한국인 학생 간에 또 충돌이 일어났다. 이때 광주고보
학생 중 일부는 일본 학생을 편들어 보도한 일본어 신문인 광주일보 본사를 습격하여 그 윤전기에
모래를 끼얹었다.
이리하여 처음에는 개인 간의 감정적 충돌이던 것이 학교와 학교 사이의 충돌로 확대되었고, 나아가
전호남일대의 한국인과 일본인 학생 간의 충돌로 발전하였다. 광주의 학생들은 서슴없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쳤으며, 독서회의 지도자들은 학생들의 항일투쟁을 격려하고 후원하였다.
학교와 경찰에서는 달래고 탄압하는 양면정책을 써서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후 탄압정책을 강화하여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의 학생들을 구속하였다. 그 결과 광주의
신간회지부 ·청년단체 ·사회단체 등은 혼연일체가 되어 투쟁의 전국적 확대에 힘썼고, 학생들을
항일독립운동의 전위대(前衛隊)로 삼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광주 청년계의 지도적 위치에 있던
장석천(張錫天) ·장재성 ·강석원(姜錫元) 등은 ‘학생투쟁 지도본부’를 설치하고, 광주 투쟁을
전국으로 확대하기 위해 활동을 개시하였다. 11월 7일 이후 회합을 거듭한 끝에 장석천은
광주 및 전국 학생의 행동지도, 장재성은 광주 한국인 학생의 행동지도, 국채진(鞠埰鎭)은
전남 각 지방 학생의 지도, 박오봉(朴五鳳)은 노동자 및 노동단체의 지도, 임종근(林鍾根)은
전남 각 공립보통학교 교사와의 연락, 강석원은 외래동지(外來同志)와의 연락, 나승규(羅承奎)는
운동자금 조달 등으로 지도업무를 분담하였다.
학생들의 불 같은 투지와 학생투쟁 지도본부의 열성적인 노력으로 광주학생운동은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비약할 준비를 갖추게 되었고, 11월 12일 제2차 투쟁이 전개되었다.
전날까지 인쇄한 격문을 가지고 등교한 각 학교 학생들은 9시 반을 기하여 일제히 시위운동에
돌입하였다. 학생들이 뿌린 격문은 4종류였는데, 그 중의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검거된 학생들을 즉시 우리 손으로 탈환하자. ② 경찰의 교내 침입을 절대 반대한다.
③ 교우회 자치권을 획득하자. ④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시위의 자유를 획득하자.
⑤ 직원회에 학생대표를 참가시키자. ⑥ 한국인 본위의 교육제도를 확립하라.
⑦ 식민지적 노예교육제도를 철폐하라. ⑧ 사회과학 연구의 자유를 획득하자.
⑨ 전국 학생대표자 회의를 개최하라.
광주학생운동의 영향
제2차 광주학생 가두시위 이후인 12월 2일 서울의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한 중요 공·사립학교와
시내 곳곳에 광주학생운동의 전국화를 위해 학생과 민중의 총궐기를 촉구하는 내용의 격문이
살포되었다. 이에 호응하여 경성 제2고보·경성 제1고보·경신학교(儆新學校)·보성고보(普成高普)·
중앙고보(中央高普)·휘문고보(徽文高普)·협성실업(協成實業)·청년학관·배재고보(培材高普)와
이화여고(梨花女高)·동덕여고(同德女高)·실천여학교(實踐女學校)·경성농업·법정학교(法政學校)·
고등예비학교·전기학교·선린상업(善隣商業)·배화여고(培花女高)·진명여고(進明女高)·
정신학교(貞信學校)·간이상공학교(簡易商工學校) 등이 가두시위 또는 동맹휴학 등으로
학생운동에 참가하였다.
이어서 개성·부산·진주·청주·공주·대전·홍성·예산·조치원·부여·전주·정읍·고창·이리·평양·신의주·
정주(定州)·선천(宣川)·영변(寧邊)·함흥·원산·경성(鏡城)·회령·청진·대구·춘천·해주·사리원 등
각지로 번져 수많은 학교가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여 궐기하였다. 전국 각지의 거의 모든
학교가 참가한 이 운동에는 194개교의 학교와 5만 4000여 명의 학생이 참여하였으며, 그
중 580여 명이 퇴학처분과 함께 최고 5년의 체형(體刑)을, 2,330여 명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광주학생운동은 1919년 3·1운동 이후, 젊은 학생들을 통하여 항일독립정신이 다시 한번 분출된
독립운동사상 격렬하고 힘찬 운동이었다
▣ 김항용 -
▣ 김정중 -
▣ 김태서 -
▣ 김재원 -
▣ 김재익 -
▣ 김주회 -
▣ 김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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