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아, 화림촌(花林村)_01 선조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라간 길

페이지 정보

윤식, 발용 작성일08-11-27 22:28 조회2,429회 댓글0건

본문

 

아, 화림촌(花林村)

- 안김(安金) 최고(最古)의 선영(先塋)을 찾아서 / 01 선조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라간 길

사진 발용 / 글 태영, 윤식 

◈ 일시 : 2008년 11월 21일~23일
◈ 장소 : 안동시 녹전면 능골, 서삼리 화림촌, 예천 물계서원 등
◈ 참가 : 3명 - 발용, 태영, 윤식

후손 발용(勃鏞), 태영(泰榮), 윤식(胤植)이 화림촌(花林村)을 답사하여 삼가 사진을 찍고 기록하다. 

2008년 11월 21일(금요일) 17:00시 서울을 출발했다. 중시조이신 충렬공(휘 방경) 관련 기록을 집대성한 ‘충렬공실기’(가칭)에 수록할 사진 촬영차 2박 3일 일정으로 안동으로 향하는 길이다. 내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길을 놓쳐 21:35분경에야 안동 영호루에 도착해 야경을 촬영했다. 강바람이 제법 차갑다.

andong0811_001.jpg

▲ 영호루 야경. 영호루는 지금의 자리 반대쪽에 있었다. 옛 터에는 영호루 유허비가 서 있다.

안동 시내로 들어가 숙소를 잡고 늦은 저녁을 먹었다. 촬영 대상지가 여러 군데인 데에다 안동과 대구에서 배영동 교수, 장동익 교수를 만나기로 약속한 터라 일정이 빡빡하다.

 

숙소에 돌아와 머리를 맞대고 촬영 순서를 의논했다. 어느새 자정을 넘었다. 그제야 발용 종친이 어렵게 구입한 ‘서삼동 벽화고분(西三洞 壁畵古墳)’을 잠깐 펼쳐 본다. 1980년 12월 안동대학 박물관 발굴조사단이 안동시 녹전면(祿轉面) 서삼동(西三洞) 산204번지 야산에서 고려시대 고분 1기를 발굴조사한 보고서다. 이 책의 내용은 2008년 1월 항용 종친이 안동김씨대종회 홈페이지(http://andongkim.net)에 처음으로 ‘고려시대 묘지제도’에 관한 석사논문을 소개한 뒤 4월부터 본격적으로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서울을 떠나기 불과 며칠 전 발용 종친과 통화를 하던 중 이 책에 대한 관심을 보이자 발용 종친이 수소문 끝에 서울을 떠나기 바로 전날 오후에 가까스로 손에 넣었다며 차 안에서 웃으며 건네준다. 이때까지도 화림촌이나 서삼동 고분군을 답사하리라고는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자그마한 야산 하나를 답사해도 하루 해가 짧은데, 바쁜 일정에 능골 인근을 샅샅이 뒤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단지 자료라도 읽어 볼 생각뿐이었다. 그 때문에 이번에는 여느 답사와 달리 메모나 시간 기록도 거의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일찍 일어나 아침을 먹고 능골로 향했다. 09:00시 구송 삼거리에서 충렬공 신도비를 카메라에 담고, 능골로 들어가 충렬공 묘소를 정밀 촬영했다. 미처 연락을 하지 못한 데에다 마침 안동 장날이라 봉회 종친이 출타 중이었다.

andong0811_002.jpg

▲ 충렬공 신도비. 능골 충렬공 묘소에서 1km 정도 떨어진 구송 3거리에 있다.

andong0811_003.jpg

▲ 음수재

andong0811_004.jpg

▲ 능골 충렬공 묘소

충렬공 묘소 맞은편 안산 쪽으로 건너갔다.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을 찾아 올라갔더니, 광산김씨 김광악의 묘다. 충렬공 묘소 산송사건 때문에 요즘 읽고 있는 매원일기의 주인공 김광계의 아우이다. 매원일기(김광계)와 계암일록(김령)에는 광산김씨 예안파 문중인들이 이곳 능골에 묘를 쓴 사례가 다수 있다. 구체적인 장소를 몰라 숙젯거리였는데 자연스레 의문이 해결되었다.

andong0811_005.jpg

andong0811_006.jpg

▲ 건너편에서 바라본 충렬공 묘소와 재실 전경

점심 시간에 맞추어 배영동 교수를 만나기 위해 서둘러 능골을 나왔다. 사신리의 느티나무를 지나 감애로 향하다가 길이 약간 꺾이는 곳을 지날 때였다. 무심코 지나치는데 커다란 돌표석에 적힌 글귀가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번쩍 한다. 길이 꺾이는 지점이라 운전 중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이다.
‘말바위!’
발용 종친과 동시에 그 말이 튀어나왔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태영 종친도 놀라는 기색이 역력하다. 차를 돌릴 장소를 찾으니 앞쪽에 ‘보현경로당’ 마당이 적당해 보였다. 그때였다. 아주 작은 돌표석이 눈에 들어와 박힌다.
‘서삼리’
보현경로당 앞마당에서 차를 내렸다. 마침 주민인 듯한 남자가 지나간다. 조금 전에 지나친 말바위 표석 쪽으로 들어가라고 일러 준다.

andong0811_008.jpg

▲ 말바위골 입구의 표석

좁은 외길이었다. 3분쯤 들어갔을까, 정자가 하나 나왔다. 곁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기념식수한 느티나무가 서 있다. 이런 벽지에 이승만 대통령이 왔던 사연도 궁금한 일이다.
김장철이라 할머니 두 사람이 배추를 거두고 있었다.
“고려장(高麗葬)예?”
주민들은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다. 고려시대 고분에 대해 뭍자 할머니가 웃으며 답한다.
“여서 길따라 주욱 올라가면 하우스 짓는 사람들 있어예. 거서 물어 보소.”
다시 5분쯤 올라갔다. 길이 갈라지는 지점(두 길 모두 중간에 만난다)에 커다란 바위가 길을 막는다. 말처럼 생기지는 않았는데, 이게 말바위인 듯했다. 바위를 지나자 제법 너른 평지가 나타났다.

andong0811_007.jpg

▲ 말바위. 이곳을 지나면 화림촌으로 그 뒤쪽 야산에 고려 고분이 산재해 있다.

권헌규 씨(64세)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계곡 깊은 곳이라 입구의 민가 외에는 사람이 눈에 띄지 않는다. 남자 세 사람과 여자 한 사람이 농사 지을 하우스를 만드느라 바삐 손을 놀리고 있었다. 모두 50대 후반에서 60대로 보였다.
밭으로 들어가 고려시대 고분을 물었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고려장예?” 하고 되묻는다. 다들 알고 있는 눈치다.
“저 산에 고려장이 많아예.”
‘많다니. 고분군(古墳群)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저 위쪽 산에도 고려장이 있고, 저쪽 산 뒤에도 있어예.”
“어릴 때부터 놀던 곳이라예.”
같이 일하던 두 사람과 아낙이 말을 거들고 나선다.
“그 안에 들어가 앉으면 키를 넘어예.”
대형 고분이라는 느낌이 퍼뜩 들었다.
“예전부터 ‘고려장’이라 불렀나요?”
“아뇨. 안동대에서 발굴한 뒤부터 그렇게 불렀지예.”
“그 전에는 뭐라고 불렀나요?”
“이름이 없었지예. 안동대에서 조사하고 나서 고려장인 걸 알았어예.”
“이 동네 이름이 뭐죠?”
“여는 말바위꼴, 여 하우스 짓는 밭 위쪽은 화림뜰이라 카지예.”
경상도 억양이라 ‘화림들(들판)’을 ‘화림뜰’이라고 발음했다.
발용 종친과 태영 종친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고 있었다.
우리 눈에는 동일 지역으로 보이는데 무슨 까닭인지 주민들은 하우스가 있는 밭을 경계로 달리 부르고 있었다.

“그러면 혹시 절 같은 게 없나요?”
“아주 옛날부터 절이 있었다케예. 저기 산에 허옇게 보이지예. 그기 아카시아라예. 거 위로 들어가면 커다란 절터가 있어예.”
“그 돌들 갖다 집 지을 때 쓰기도 했어예.”
다른 사내도 절터를 잘 안다는 듯이 답한다.
“그럼 화림촌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나요?”
“그런 말은 몬 들었는데…….”
“여는 그냥 말바위꼴, 저 위는 화림뜰이라예.”

<계속>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