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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지방의 안동김씨 혼맥(4)그 밖의 집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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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8-11-20 17:29 조회1,9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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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지방에 안동김씨와의 혼맥은 광산김씨, 풍산류씨, 의성김씨 이외에도 청주정씨, 영양남씨, 고성이씨, 전주류씨, 한산이씨등 명문가와

혼인하여 모두 나열할 수 없다.

 

그 외의 집안들

진주강씨 박사공파.


안동지방에 혼맥으로 이어지는 집안은 아니지만 , 안동김씨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집안이 있으니

진주강씨 박사공파이다.  진주강씨의 80%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안동지방에도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집안이 박사공파이다. 


박사공 (博士公) 강계용(啓庸)은 고려중엽이후인 원종(元宗)때 인물로 문과에 급제하고 국자박사(國子博士)벼슬을 역임하였으며, 고려 원종15년 서기 1274년 일본을 정벌(征伐)할때에 김방경 서장관(通信使 金方慶 書狀官)으로 일본에 종행(從行)하였다가 환국(還國)하여 진산부원군(晋山府元君)에 봉해진후 벼슬을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사실이 고려말 공민왕(恭愍王)때의 대학자인 양촌(陽村) 권근(權近)선생이 지은  6세손 공목공(恭穆公) 시(蓍)의 묘지명(墓誌銘)에 나타나있고 양촌문집에도 기록되어있다. 박사공께서 일본에 들어갈 때에 아드님 급사공(給事公) 인문(引文)께서도 함께 따라가셨는데 고려 충렬왕(忠烈王)7년 서기1281년에 이르러서 중국 원(元)나라 세조(世祖)가 일본을 정벌할 때에 급사공이 일본에 다녀온 바 있어 지리를 잘 안다하여 또다시 통신사 서장관으로 발탁되어 일본에 들어가는 중도에 험난한 파도와 시달려가며 일본군과 싸우는 동안에 겪은 고초가 너무나 컷기 때문에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후 다시는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자손들에게도 글을 배워 벼슬길에 나가지 말라는 훈계를 내렸다. 그렇기 때문에 급사공의 아들 어사공(御史公) 사첨(師瞻)과 손자 정용위대장군(精勇衛大將軍) 창부(昌富) 진원부원군 창귀(昌貴) 삼사좌윤(三司左尹) 창수(昌壽.)까지는 과거를 거치지 않고 음직으로 벼슬을 하였으며 박사공의 5세손인 문경공(文敬公) 군보(君寶) 대(代)에 이르러 과거길을 밞기 시작하여 조선조 5백년 동안에 140여명의 문과 급제자가 탄생되었으며 박사공을 중시조(中始祖)로 모시고 있고 전국에 산거하고 있는 후손이 진주강씨 전체의 80%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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