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대안군묘지명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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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8-11-15 15:49 조회1,406회 댓글0건본문
<'眞興은 이름' 밝힌 주인공은 유득공>
[연합뉴스 2007-10-05 11:57]
황초령 진흥왕순수비
박철상씨 "유득공 금석학 김정희에 영향"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한국 금석학을 개척한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이 분야에서 이룩한 '위대한 업적'으로는 크게 두 가지가 거론된다.
하나는 무학대사비로 알려졌던 북한산 비봉의 고비(古碑)가 신라 진흥왕(眞興王)의 순수비 중 하나임을 밝혀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흥이 시호(諡號.죽은 뒤에 붙은 이름)가 아니라 생전의 이름임을 밝혀낸 것이다.
하지만 진흥이 생전 이름임을 처음으로 밝혀낸 주인공이 추사가 아니라 조선 영-정조 시대에 활동한 저명한 북학파 지식인 유득공(柳得恭.1749-1807)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고문헌연구가인 박철상씨는 유득공 사거(死去) 200주년을 기념해 대동한문학회(회장 이종문)가 6일 경북대 우당교육관에서 개최하는 학술대회에 발표할 논문 '조선 금석학사에서 유득공의 위상'이란 글을 통해 이같은 사실을 구명했다.
주최측이 미리 배포한 논문에 따르면 유득공은 1798년 10월15일에 태학사(太學士)인 홍양호(洪良浩)가 소장한 신라시대 고비 탁본 5종 중 지금은 황초령비라고 부르는 '진흥왕 북순비'(眞興王北巡碑)를 검토한 결과 이런 사실을 확인했다.
유득공은 "이 비는 함흥부(咸興府) 황초령(黃草嶺)에 있는데, (비문에서 비를 세운 연대를) 무자(戊子)라고 한 것은 (신라) 진흥왕 29년으로 중국에서는 진(陳)나라 임해왕(臨海王) 2년(568)이니 지금으로부터 1천226년 전이다. 우리나라 고비는 당연히 이 비를 으뜸으로 쳐야 할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나아가 유득공은 그 자신의 비문 판독을 근거로 "(황초령 비문에서) 불교 승려를 도인(道人)이라 칭한 것은 육조(六朝)시대 풍습이며 이 때는 고구려가 막 강성할 때인데 진흥왕이 어떻게 국경을 넓혀 북쪽으로 옥저의 땅까지 이르렀는지 모르겠으나 삼국사(三國史.삼국사기)에는 누락되어 있다"면서 "이 비석이 북순(北巡.북쪽으로 순수)하던 날에 세웠으므로 (이 비석에서) 진흥태왕(眞興太王)이라 (표기)한 것은 호칭(생전 이름)이지 시호가 아니다"고 말했다.
진흥이 시호가 아니라 생전에 부르던 이름이라는 이와 같은 유득공의 발견은 뒤에 김정희에게 고스란히 계승된다.
박씨는 비단 이 뿐만 아니라 김정희의 금석학 연구 곳곳에는 유득공의 영향이 짙게 묻어난다면서, 추사가 유득공을 접할 수 있었던 통로로 추사가 유득공의 아들 유본학(柳本學.1770-?)과 가깝게 교유한 사실을 주목했다.
유득공이 현재까지 한국사 최초의 묘지명(墓誌銘)으로 알려진 고려초기 김은열(金殷說) 묘지명을 직접 구해서 읽고 판독한 것도 밝혀졌다.
박씨는 한림대 김용선 교수가 '고려묘지명집성'을 기획하면서 경주김씨족보(1985년 발행)에서 찾아내 수록한 김은열 묘지명과 유득공이 직접 판독한 김은열 묘지명을 비교한 결과, 족보에 채록된 묘지명에는 모두 23글자가 탈락됐으며, 판독 또한 군데군데 다르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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