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 600년 종산(양주포천은 세조왕릉 터) 배경과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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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회 작성일08-09-29 06:10 조회2,136회 댓글0건본문
안동김씨(양주포천) 묘역은 세조왕릉 터
평론해설 김좌회
1. 시대(1392년 조선개국 전후)
태조 이성계 1392년 조선개국
세조 (1417-1468) 재위기간 14년 (1455-1468)
안동김씨 동래정씨
김사형(1341-1407)좌정승(영의정)
김 승(1366-1436)밀직사사 정흠지(1378-1439)형조판서
김종숙(1400-1470)상락부원군 정창손(1402-1478)영의정
김질(1422-1478)좌의정
김작(1427- ) 형조판서
김적(1429- ) 장남 김수동(영의정)
김무(1442- ) 공조판서 청백리
2. 김 질(金礩)
1450년(문종 즉위년) 추장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주부에 제수된 이후, 사간원 우정언을 거쳐 1455년(세조1)에는 성균관 사예에 이르렀다. 이 무렵 성삼문 박팽년 등의 집현전학사와 함께 단종복위를 꾀하는 서명운동에 위험을 느끼자, 1456년 장인인 정창손과 함께 세조에게 고변하여 이른바 사육신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 뒤 세조의 철저한 신임을 받아 佐翼功臣 3등에 추봉되고 판군기감사에 승진되었다. 이어 승정원의 동부승지·우부승지·좌승지를 거쳐, 1459년에는 병조참판이 되면서 세조의 국방정책 수립에 참여하고 상락군(上洛君)에 봉하여졌다. 1463년에 공조판서에 오른 뒤 병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1466년 의정부우참찬에 승진되었다. 1468년(예종 즉위년)에는 우의정에 올랐다. 이어 좌의정에 승진된 뒤 영의정 韓明澮와 申叔舟 등과 함께 이른바 院相勢力을 형성하였다. 이들 원상세력과 함께 나이 어린 예종과 성종 초기에 국정서무를 주관하였다. 上洛府院君에 진봉되었다.
3. 정창손(鄭昌孫)
문종·세조대의 관력과 정치활동
문종이 즉위하자 우부승지를 거쳐 1451년(문종1) 대사헌이 되었고 이어 제학·대제학을 지내면서 1453년(단종1) 이조판서가 되었고 1455년(세조1) 우찬성과 이조판서를 겸하였다 1456년에 사위 김질 성삼문 박팽년이개 하위지유성원 단종의 외숙인 권자신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모의하였는데, 정창손이 세조에게 고변하였다 신임을 얻은 그는 1457년 좌의정. 그후 영의정으로 14년 재직하였다
4. 정흠지(鄭欽之)
1408년(태종8) 사헌부지평, 1411년 식년문과에 급제, 1435년(세종17) 함길도도관찰사, 형조판서 1439년 망, 묘는 남양주 진접읍 장현리 봉현마을(재)
5. 광릉(세조) 능지결정에 관한 전설
제1설 안동김씨 문중에 전하는 전설
양주광릉을 포함한 현재의 포천 종산
세조 직접 수차례 왕림 묘터 관산함
양주와 포천의 흙 무게로 세조왕릉 결정
현재의 포천종산 다시 김질에게 돌려 줌
정창손의 아버지 정흠지 묘소 구전은 없음
제2설 동래정씨 문중에 전하는 전설
현재 광릉으로 최종결정(세조)
정흠지등 산소터를 인근에 천장 후 세조릉 구축(예종)함
6. 기 타
修 心 좌의정 金 礩
心中懷抱眼看情 悲喜都由念裏生 孤殿幾多窮憤恨 公寃雖解漫愁成
마음속의 그 회포는 눈을 통해서 일어나고 기쁨슬픔은 그모두가 마음에서 생긴다오
외로운 궁궐에 얼마나 괴로움 많았던가 공의 원한 풀어짐에부질없는 근심 생긴다오
정창손 신도비 서거정 찬
天地絪縕 奎壁晶熒 公乃梃生 公又蜚英 光風霽月 豁乎心胷 泰山北斗 巍乎儀容
하늘과 땅이 기운을 모우고 규성과 벽성이 찬란히 빛나도다.
공께서 이 정기를 받아 태어나니 공 또한 빛났어라!
광풍인듯 제월인듯 가슴속은 확트이고 태산처럼 북두처럼 그 모습이 우뚝하다.
일찍부터 이름떨쳐 풍호운룡 하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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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조의 능상에서 내려다 보면 군사가 도열한 듯한 나무가 밀고 들어오는 앞산은 군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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