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간위 / 계암일록, 매원일기] 북애 김기 관련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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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작성일08-08-15 09:02 조회1,941회 댓글0건본문
북애 김기 관련 자료
<계암일록> -----------------------------------------------
癸卯 十二月 三日 (1603년 선조 36년 음력 12월 3일)
北厓兄病甚危, 徃候焉, 自厓兄病, 吾輩逐日候問, 比來病劇, 日夜奔候, 諸族及隣里, 亦皆聚候.
북애 형 병세가 심히 위중해서 병문안을 갔다.
북애 형이 병이 든 이래로 우리들은 매일 병문안을 갔는데
이번부터 병세가 아주 나빠져 매일 밤 자주 병세를 물었다.
친족들과 이웃 사람들 역시 모두 병세를 물으러 몰려들었다.
• 比 : ‘此’의 오자.
▲北厓兄 : 김기(金圻)
○김기(金圻) 김부인의 아들이다. 자는 지숙(止叔). 오천 북쪽 언덕에다가 서실을 짓고서 호를 삼았다. 평생 바깥일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 힘썼고, 시례(詩禮)에 마음을 쏟았다. 큰집에서 재산을 나눌 때에도 많이 가지려 하지 않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욕심을 적게 하니 눈 위에 비치는 달과 같은 깨끗한 마음을 지녔다. 착하지 못한 사람을 만나면 얼굴을 마주 보고 엄중하게 책망을 하였다. 세상에서 남과 만남에 있어서는 절대로 위세와 재산으로서 교만하게 하지 아니하였고, 또한 가난함으로써 천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월천 선생께서 그를 퍽 중하게 여겨 특별히 뽑아 도산서원의 원장으로 삼아 그로 하여금 『퇴계선생문집』 및 수적(手迹)을 펴내어 세상에 널리 반포하게 하였다. 뒤늦게 순릉참봉(純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은혜에 감사하고 사퇴한 뒤 돌아왔다. 도산서원 원장을 두 번이나 역임하였다. 대암(大菴) 박성(朴惺)이 지은 전기에 이르기를,
‘공의 성은 김(金)이요 이름은 기(圻), 자는 지숙(止叔)이다. 참된 효성과 우애가 있었으며 부친상을 당하자 3년 동안 여묘하였고, 큰형을 섬김에 있어서 공손하였으며, 깨끗하여 세속에서 벗어났고, 집안 사람들의 가업을 일삼지 않았다. 수석 사이에 서실을 짓고서 북애(北厓)라고 이름을 붙이고서 경사를 두루 보면서 배고픔을 참았으며, 문을 닫고 죽조차 거의 계속 먹지 못하였으나 그곳에 처함에 편안한 듯하였다. 늘그막에 이르러 참봉에 제수되니 왕명을 받고서 드디어 돌아왔다. 57세에 이르러 졸하니 친구들이 슬퍼하지 아니함이 없었다.’라 했다. 대암(大菴)은 현풍(玄風)에 산다. 학행(學行)으로 관리의 추천에 응하여 정랑을 지냈다. - <국역 선성지> 165~166쪽
癸卯 十二月 四日
晩朝還家, 食後旋下, 初昏北厓兄, 奄至棄背, 痛哭痛哭.
아침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가 식후에 되돌아 내려갔다.
초저녁에 북애 형이 문득 세상을 등졌다. 통곡하고 또 통곡한다.
癸卯 十二月 七日
成服, 始來家, 又與諸兄, 徃羊塲, 看厓兄葬山.
성복하였다. 처음으로 집에 왔다.
여러 형들과 함께 양장(羊塲)에 가서 북애 형 장례를 치를 산을 살펴보았다.
△羊塲 : 경북 예안면 오천리 뒷산으로 광산김씨 예안파의 선영이 있다.
선성(宣城) 묘소재사(墓所齋舍) 총명(總名)
○방잠(方岑) 단성현감(丹城縣監) 김만균(金萬鈞)을 장사한 산인데 직계 후손이 없어서 방계 후손 김효로(金孝盧)의 자손들이 그 재사를 수호한다. - <국역 선성지> 94쪽.
오천(烏川)
현 남쪽 7리에 있다. 녹전산(祿轉山)이 서쪽으로부터 내려와 구불구불하게 다시 솟아 금학봉(金鶴峯)이 되었고, 또 동쪽으로 달려서 높이 우뚝한 것은 산남봉(山南峯)이다. 이 봉우리가 마을의 주봉이다. 동쪽으로 어탄산(魚呑山)을 마주 보고 있으며 방잠산(方岑山)이 서남쪽으로 빙 둘러 있고, 그 중간을 사계(沙溪)가 안동부 북쪽 세현(細峴)으로부터 예안현 경계에 이르러 정곡수(井谷水)와 함께 합해져서 콸콸 흘러 칠곡(七曲)을 이룬다. 예부터 전해오기를, ‘시내 좌우측에는 초목이 아주 무성하여 항상 나무꾼과 목동들이 왕래하였으며 고려 말에 황재(黃載)라는 사람이 동구 밖 들판에 살았다.’고 한다. 광산후인(光山後人) 김효지(金孝之)가 안동 풍산으로부터 황재(黃載)의 사위가 되어 이 마을에 살게 되었는데, 황재는 고려 때의 효자이다. 이 사적은 국사 및 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김효지는 아들이 없어 조카인 김간(金澗)을 입후하였는데 그 역시 아들이 없어서 종손자인 생원 김효로(金孝老)로써 시양(侍養)하게 하여 그로 인해 예안 고을 사람이 되어 그 후손이 잇달아 그곳에 살았다. 대홍수를 만나서 그 들판으로부터 이사를 하여 마을로 들어와서 터를 잡고 살았다. 시내 좌우편에는 자손들이 번성하게 살고 있다. 단성현감 김만균이 김간의 사위가 되었는데 판서 김담(金淡)의 아들이다. - <국역 선성지> 158~159쪽.
산천(山川)
○방잠산(方岑山) 마을의 남쪽에 있다. - ‘오천(烏川)’을 말함. <국역 선성지> 159쪽.
○묘(墓)의 재사(齋舍) 마을 남쪽 방잠산(方岑山) 아래에 있다. 사마 김유가 묻힌 산이기 때문에 자손들이 재사를 세우고 사람을 들여서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 <국역 선성지> 160쪽.
각명(各名)
○북애(北厓) 시내 북쪽에 있다. 주인 김기(金圻)가 서실(書室)을 지어서 거처하며 고요히 자신을 수양하는 장소로 삼고서 그곳을 ‘계북정사(溪北精舍)’라고 하였다. - <국역 선성지> 160쪽.
<매원일기> -----------------------------------------------
■ 梅園日記 一
癸卯 十一月 二十九日 (1603년 선조 36년 음력 11월 29일)
聞北厓危重往候之, 則疾已革矣. 粥□□入口, 而精神如舊, 手書小詩, 以示親舊, 言永訣之意, 詞甚□切, 所不忍覩, 是夜侍宿.
북애 숙부 병환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갔으나 병세는 이미 위독한 상태였다.
죽조차 드시지 못할 정도였으나 정신은 예전처럼 맑았다.
손수 짤막한 시를 써서 친구들에게 보여 영원히 이별하는 뜻을 나타내셨다.
문장이 매우 애절하여 차마 지켜볼 수가 없었다. 이 날 밤에 모시고 잤다.
■ 梅園日記 一
癸卯 十二月 三日
還來, 往候北厓, 病尤劇矣.
(능골 재사에서) 돌아와 북애 숙부 병문안을 갔다. 병세가 극히 심해졌다.
癸卯 十二月 四日
以寒疾不得往候, 是日酉時乃殞, 力疾往哭之.
감기 때문에 (북애 숙부) 병문안을 가지 못했다.
이 날 유시(오후 5~7시)에 끝내 돌아가셨다. 간신히 가서 곡을 했다.
癸卯 十二月 五日
往治喪.
초상을 치르러 갔다.
癸卯 十二月 六日
如昨.
어제와 같았다.
癸卯 十二月 七日
成服, 食後又往見喪主.
성복하였다. 식후에 또 가서 상주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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