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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충간위 / 계암일록] 충렬공 묘소에 협장한 분묘는 최소 5기_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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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8-08-14 17:04 조회1,2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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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答諸姪

兒輩來見諸書 慰慰 吾無恙 聞慶八筥之站 己有勿赴之關 可喜 翰林葬山 定於上洛公墓下云 於吾意 恐未合當 前用上洛墓上 今用其下 則上洛之墓 果非所謂挾葬耶 吾以是 未知用之之爲安也 此意 前日欲告於日休兄弟 而每因忙擾 不果 今以此告 如何 明器欲圖送 而此邑 無磨匠云可怪


조카에게 답함.

아이들의 모든 글(諸書)을 보니 기쁘고 나도 근심이 없다. 문경(聞慶) 팔거(八筥)의 역참(驛站)에는 벌써 부임하지 말라는 관문이 있었으니 기뻐할만 하다. 한림(翰林)의 장사지낼 산(葬山)을 상락공(上洛公)의 묘하에다 정하였다고 하는데 내 생각에는 합당하지 못할가 두렵다. 전에는 상락공의 묘소위에 쓰고 지금은 그 밑에 쓴다면 상락공의 묘는 과연 협장(挾葬)하였다고 이를것이 아니겠느냐? 나는 그래서 쓰는데 편안한 것을 알지 못하지만 이 뜻을 지난 날에 일휴(日休)형제에게 알리려고 하였으나 늘 바쁘고 번거로움으로 인하여 말하지 못하였다. 이제라도 이 뜻을 아뢰는 것이 어떠하냐? 장례에 함께 묻을 기물(明器)을 보내려고 하였지만 이 고을에는 만드는 장인(磨匠)이 없다고 하니 이상 스럽다.


출전: 국역설월당선생문집


김부륜 [金富倫, 1531~1598] 

본관 광산(光山). 자 돈서(惇敍). 호 설월당(雪月堂). 아버지는 참판을 지낸 유(綏)이며, 어머니는 순천김씨(順天金氏)로 판서를 지낸 수홍(粹洪)의 딸이다. 일찍 학문이 뛰어나 소년시절인 16세에 글을 읽다가 중국의 유학자 명도(明道) 정호가 16세에 주강채와 도를 논하였다는 대목을 보고서 이황(李滉)을 찾아가 배움을 청하였다고 한다.

지방교육을 비롯한 학문 진흥에 많은 공헌을 한 조선 중기의 학자. 향교를 중수하고, 학령(學令) 수십조를 만들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산을 털어 향병(鄕兵)을 도왔고,《심경(心經)》, 《태극도(太極圖)》, 《대학》,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등을 연구하였다. 저서로는 《설월당집》 6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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