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간위> 안동민속박물관 학술총서 15권 "안동의 계Ⅲ "에 수록된 월란척촉회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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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홍 작성일08-08-12 18:19 조회1,700회 댓글0건본문
이 글은 제가 쓴 것으로 완본이 아님을 밝힙니다.
완본은 안동민속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으며 이미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이 글은 첫번째 교정 당시의 것으로
완본과는 글을 다듬었을뿐 내용면에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충렬공할아버지와 직접적으로 연관은 없으나 참고자료로 사용될 수 있을지도.. 라는 생각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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續月瀾躑躅會
1. 유래
월란척촉회(月瀾躑躅會)는 400여년 전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와 퇴계 이황(退溪 李滉)선생을 중심으로 시작된 유림모임이다. 모임의 장소는 도산면 원촌리 낙강 줄기의 위쪽에 위치한 월안사(月安寺)라는 작은 암자에서 행해졌다. 월안(月安)은 ‘달빛이 고요하게 머무른다’는 뜻인데 후에 월란사(月瀾寺)로 개칭되었다. 월란(月瀾)은 ‘달빛 물결이 넘쳐흐른다는 뜻이다’. 농암과 퇴계 두 선생은 서로 내왕하면서 철쭉꽃이 만발할 때면 이곳에 올라 시를 짓거나 문학을 강의했다. 이곳을 아낀 퇴계선생과 그 제자인 만취당 김사원(晩翠堂 金士元)․간재 이덕홍(艮齋 李德弘), 성재 금난수(惺齋 琴蘭秀), 월천 조 목(月川 趙穆) 등은 월란사에서 기숙을 하며 공부를 했을 정도였다. 어쨌든 두 선생의 회동에 제자들이 따라오면서 자연스럽게 창계되었다.
그 후 농암과 퇴계선생이 차례로 타계하고 세월이 흘러 암자도 무너져 빈터만 남았는데, 1860(철종 11)년에 만취당의 후손인 천사 김종덕(천사 김종덕)이 선조의 유적지를 기념하기 위해 폐사지에 월란정사(月瀾精舍)를 창건하였다.*1) 당시 개기고유문(開基告由文)은 고계 이휘녕(古溪 李彙寧)이, 상량문은 운산 이휘재(雲山 李彙載)가 지었다. 또, 이건(移建)시의 개기고유문은 목재 이만유(穆齋 李晩由), 상량문은 봉강 이만여(鳳岡 李晩輿)가, 기문(記文)은 기산(奇山) 김 과 암 이만 이 각각 지었고 중건 때의 기문은 범암 류연즙(汎庵 柳淵楫)이 지었다. 그 후 1902(고종 6)년에 개건하였고 그 뒤에 중건과 중수를 거듭하여 지금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1993년에 유서 깊은 이곳을 기념하기 위해 월란칠대기적비를 세워 월란척촉회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권오봉(權五鳳)․이근필(李根必)․김창회(金昌會)․류창훈(柳昌勳) 등이 논의하여 ‘속월란척촉회’를 결성한 이래 지금까지 계승되어 오고 있다.
2. 구성과 운영
1) 구성
월란척촉회의 가입은 상당히 까다롭다. 회원의 가입조건은 유림의 후손 집안에서 장남인 경우에만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회원으로 등록되기 위해서는 유림의 추천이 있어야 하며, 정기 모임 때 기존회원들의 수락이 있어야만 회원으로 활동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회원의 직함이 자손대로 유임되기 때문이다. 아닌 경우가 있지만 이것은 특별한 사례이다. 형제가 가입된 것이 의성 사촌의 안동 김씨 문중에서 두 사례, 부자(父子)가 가입된 것이 진성 이씨와 영천 이씨에서 각각 한 사례가 있다.**2) 회원의 성씨는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어, 이것이 유림의 연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으나, 주로 많은 수를 차지하는 성씨는 진성 이씨와 사촌 김씨이다.
월란척촉회는 1993년도에 퇴계의 후손, 농암의 후손, 퇴계 제자의 후손들에 의해서 속계되어 속월란척촉회라고도 한다. 속계되었을 당시의 계원은 약 180여 명이었으나 15년이 지난 지금 20여 명은 작고하고, 나머지 150여 명 중에서도 50명 정도만 매년 모임에 참석한다.
2) 운영
월란척촉회는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에 모임을 갖는다. 장소는 원칙적으로 월란정사에서 개최한다. 그러나 회원들이 전국각지에 퍼져있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하다가 최근에는 이렇게 하면 원래의 의의에서 벗어난다고 하여 3년에 한번씩은 월란정사에서 한다. 작년과 재작년에 외부에서 해서 올해는 월란정사에서 모임을 가졌다. 속월란척촉회가 발기될 당시의 위원회를 살펴보면 위원장, 부위원장, 총무, 재무, 편간, 직일, 감사로 구성이 되어 있다. 첫 번째 임원진은 발기 당시의 임원들이 그대로 연임되었다. 현재의 월란척촉회는 회장, 부회장, 총무, 감사로 구성되어 있다. 임원의 임기는 2년이며, 연임도 가능하다. 현재 회장은 영천인(永川人) 이유창(李有昌)씨이다.
월란척촉회는 회원의 회비와 찬조금 등으로 운영되는데 우선 회원의 가입 당시에 2만원을 낸다. 그리고 년 2만원을 계속 낸다. 계원들이 모이게 되면 일년의 결산을 하게 된다. 회의 운영은 1994년에 재정된 10개 조항의 회칙과 부칙에 따라 운영되며 아래와 같다.
〈회칙〉
第一條(名稱) 本會의 名稱은 月瀾躑躅會라 稱한다.
第二條(目的) 本會의 目的은 先賢의 敎學從事와 學徒 精神을 바탕에 두고 月瀾躑躅 會를 通하여 頣神賞適하신 옛 陶山儒賢의 學風을 이어박아 道學綱領을 指標로 修養精進함을 目的으로 한다.
第三條(場所) 本會의 會所는 月瀾精舍로함을 原則으로 하되 會員의 決議에 다라 間 或變更할 수도 있다.
第四條(會員) 本會의 會員은 本會會則 第二條의 目的에 積極贊同하고 誠實히 參與 하는 이로 한다.
第五條(任員) 本會의 任員은 다음과 같이 定하고 任期는 二年으로 하되 重任할 수 있다.
° 會長 1名 °副會長若干名 °監事 2名 °總務 2名 °財務 1名
第六條(任員의 選任) 本會의 任員은 總會에서 選任한다.
顧問若干名을 推戴할 수 있다.
第七條(任員의 職能)
1. 會長은 本會를 代表하고 會務全般을 統轄한다.
2. 副會長은 會長을 補佐하며 會長이 有故時에는 그 職務를 代行한다.
3. 監事는 本會의 財政 및 會務執行事項項을 監査하여 總會時 그 結果를 報 告한다.
第八條(會議) 本會의 會議는 定期總會로 하고 總會 日字는 每年 陽曆 五月 첫째 日 曜日로 한다.
第九條(財政) 本會의 財政은 會費 및 贊助로 充當한다.
會費는 一年萬원으로 하되 義務負擔키로 한다.
但 三年以上 年會費를 未納한 時는 自進退會호 看做한다.
第十條(會計) 本會則은 西紀壹九九四年 五月 一日부터 施行한다.
다만 本會則에 未備한 事項은 通常慣例에 따른다.
附則 : 本會則은 西紀 壹九九四年 五月 一日부터 施行한다. 다만 本會則에 未備한 事項은 通常慣例에 따른다.
一. 會則一部改正(別添會則參照)
1. 副會長二人을 副會長若干名으로 改正하고 義城沙村 金昌會氏를 副戶長으로 選任하였음.
2. 年會費 一萬원을 義務負擔으로 定하고 今年度부터 施行키로 하였음.(95년도부터 實施)
3. 今年부터 始作하여 앞으로도 二年以上, 年悔非 未納하시는 분은 自進退會로 看做키로 하였음.(1995年 6月)
3. 기타
1) 月瀾誌序
〃 (국역)
2) 月瀾庵七臺紀蹟碑銘 幷書
月瀾庵錚山東翠屛之腰庵有招隱月瀾考槃凝思朗詠御風凌雲七臺退陶夫子所名而復繫之以詩者也自是宣福諸賢杖屨相講學於斯歌詠於斯更數百載殆無虛歲矣今嶺中諸彦有時禮訪夫子播馥之地磨爾義怡養情性無幽不到及於此庵豎此小石以寓宗仰之忱銘曰
莊誦遺詩感慨繫之水月宛在歌斯詠斯
文學博士 眞城 李家源 謹譔
월란암칠대기적비명. 병서
월란암은 도산 동취병의 산허리에 자리잡고 있다. 암자 주위에는 초은·월란·고반· 응사·낭영·어풍·능운의 일곱 언덕(臺)이 있으나 퇴계 이부자께서 명명하시고 시로써 노래하신 곳이다. 이로부터 예안과 안동의 여러 선현들이 여기를 찾아 더불어 강학하고 시가를 읊조린 것이 수백 년 동안 거의 빠진 날이 없었다. 지금 영남의 여러 선비들이 선생께서 향기를 남기신 자취를 더듬어 도의를 강구하고 성정을 함양함에 찾지 않은 곳이 없더니 드디어 이 작은 돌을 세워 우러러 사모하는 뜻을 기탁하는 뜻을 기탁하였다. 銘에 이르기를
남기신 노래 호연히 읊조릴 제
무량한 감개 솟아오르니
노니시던 자취에 완연히 남은 자연
노래하고 읊조리며 길이 사모하리
문학박사 진성 이가원 삼가 짓다
동래 정석태
성산 이세동 공역
3) 先賢遺囑의 紀蹟과 從師學道
- 月瀾七臺 紀蹟의 意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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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瀾精舍聚會
1. 유래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에 위치하는 월란정사는 도산의 칠대삼곡(七臺三谷; 招隱臺, 月瀾臺, 考槃臺, 凝思臺, 朗詠臺, 凌雲臺, 御風臺, 石潭曲, 川沙曲, 丹砂曲) 가운데 천사곡과 석담곡이 이어지는 강 동편에 위치하고 있다. 월란정사가 있던 위치에는 본래 월란사(月瀾寺)라는 절이 있었다.1) 이 곳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선생과 그 제자들이 기거하면서 독서를 하던 장소로, 퇴계선생은 31세부터 수차례 수년에 걸쳐 머무르면서 공부하였다. 또, 가끔은 제자인 성재 금난수(惺齋 琴蘭秀), 간재 이덕홍(艮齋 李德弘), 만취당 김사원(晩翠堂 金士元) 등과 함께 오르기도 하였다.
그 후 월란사는 세월이 흘러 폐허가 되었는데, 그 자리에 지금의 월란정사가 건립된 것은 1860(철종 11)년이다. 의성 사촌마을의 안동 김씨2) 문중(이하 안동 김씨)에서 선조인 만취당 김사원이 퇴계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한 것을 기념하고자 이곳에 지었다. 그리하여 월란정사는 안동 김씨 문중 소유가 되었다. 현재는 월란정사를 관리하기 위해 안동 김씨와 진성 이씨문중의 공동 소유로 되어있다. 월란정사를 중수한 이후 만취당과 퇴계의 후손들은 선조의 유적인 월란정사를 보존하고 관리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월란정사취회는 생겨나게 된 것이다.
2. 구성과 운영
1) 구성
월란정사취회는 계원의 좌목(座目)을 기록한 별도의 명첩(名帖)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회원의 가입조건이 진성 이씨인 퇴계선생의 후손과 그 제자인 안동 김씨 만취당의 후손 전체를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퇴계선생과 만취당선생의 후손이면 누구나 가능하다. 그러나 성씨는 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월란정사를 관리하기 위한 이 모임은 정사의 재임(齋任) 2인과 회장에 해당되는 수임(首任) 1인을 둔다. 수임의 경우는 반드시 진성 이씨에서 선출하며 재임은 진성 이씨와 안동 김씨 문중에서 각각 한명씩 정한다. 진성 이씨의 경우 전임 재임이 지목하여 선출하고, 안동 김씨의 경우 문중에서 선출한다. 임기는 1년이며 매년 모임에서 새로 선출한다.
2) 운영
회의 운영을 위해 2년마다 한번씩 월란정사에서 모임을 갖는데, 봄에 주로 가진다. 모임의 일자는 정일(定日)을 정해 두지는 않고, 임원진에서 날자가 정해지면 유사가 회원들에게 통문을 띄운다. 모임의 모든 운영비는 안동 김씨문중에서 지출하고 있다. 모임 내용은 월란정사의 보수나 유지관리에 관련한 것이 주가 된다.
회에 딸린 위토는 월란정사 뒤편에 다섯 마지기의 논과 3000평의 밭이 있었지만 세월이 오래되고 안동댐이 생겨나면서 논은 모두 수몰되었으며, 밭은 당시로는 비옥하고 좋은 땅이었지만 현재는 묵어서 거의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당시에 받은 수몰보상금으로 현재는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에 세 마지기의 논을 구입하여 운영하고 있다.
위토가 모두 월란정사 근처에 있었을 때는 안동 김씨 문중에서는 계금을 관리하고 진성 이씨 문중을 대접하는 역할만 했을 뿐 다른 역할이 크게 없었으나, 현재는 위토관리까지도 안동 김씨 문중에서 하고 있으며, 도지 받은 돈이 300,000원 정도에 불과하여 문중기금을 보태어 대접하고 있다.
대접의 경우, 월란취회를 할 때면 두 문중의 사람들이 음력 3월 그믐 즈음에 모여 개와 닭, 그리고 소고기 등을 대접했고 월란정사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여비까지 챙겨주었으나 지금은 도시락을 구입해서 월란정사에 가서 먹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또한, 월란정사 앞에 있던 주사도 예전에는 사람이 살았지만 지금은 무너져버려서 잠을 자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월란취회에서는 향후 퇴계선생과 농암 이현보선생이 산책하던 칠대삼곡의 산책로를 복원하여 조상을 기념하고, 주사를 복원하여 월란정사를 문화재로 등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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