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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과 망명지의 세 여인] ①어머니 곽낙원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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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8-08-12 16:44 조회1,7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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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과 망명지의 세 여인] ①어머니 곽낙원 여사
쿠키뉴스  기사전송 2008-08-11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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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 문화]대한민국 건국의 뿌리로 일컬어지는 백범 김구(1876∼1949). 오늘날 평화는 아주 쉬운 단어이지만 100년, 아니 60년 전만 해도 평화는 목숨과 바꾸는 희생을 의미했다. 건국 60년을 맞아 대산문화재단(이사장 신창재)이 마련한 ‘2008 대학생 동북아대장정’팀을 따라가 본 망명지 중국에서 김구의 발자취에는 어떤 희생이 숨어 있을까.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어머니 곽낙원 여사와 아내 최준례, 그리고 김구의 피신을 도왔던 처녀 뱃사공 주아이빠오(朱愛寶)는 백범이 말한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어져서 죽게 되었다”는 역설 속에 어른거리는 인물이다. 세 여인의 헌신 흔적을 따라가 본다.

①어머니 곽낙원 여사

1934년 3월22일 녹음이 우거진 중국 상하이 푸동 부두에 웨이하이(威海)발 기선 한 척이 뱃고동 소리를 울리며 막 정박했다. 보따리와 짐가방을 이고 진 수백 명의 승객 가운데 유독 키 작은 한 할머니가 두 손자의 손목을 잡고 하선을 서두르고 있었다. 할머니는 백범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였다.

중국인으로 변성명을 하고 갑판객(3등칸 승객)들 사이에 섞여 있었기에 음식물 제공은커녕 승객명부에도 없는 불법 탑승객. 곽 여사가 두 손자를 데리고 일제하 조국을 탈출하는 과정은 백범의 중국망명 과정보다 더 파란만장하다. 이보다 앞서 김구가 상하이에 도착한 1919년 4월 상하이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단 500여명이 불과했다.

그에게 상하이는 초행길이 아니었다. 1922년, 아들을 쫓아 건너와 1925년 11월까지 3년여를 머물다 간 뒤 9년만에 다시 밟은 망명지였다. 아들 김구의 목에는 60만원이라는 거액의 현상금이 붙어있었다. 김구는 당시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지금의 노신공원) 폭발사건의 주도자라고 스스로 밝힌 직후 상하이에서 130㎞ 떨어진 지아싱에 피신해 있었다.

곽낙원은 상하이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곧장 지아싱으로 내려온다. 9년 만의 상봉인데 어머니의 첫마디는 준엄했다. “나는 지금부터 ‘네’라는 말을 고쳐 ‘자네’라 하고, 잘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말로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네. 듣건대 자네가 군관학교를 하면서 많은 청년을 거느린다 하니,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나도 체면을 보아주자는 것일세.”(‘백범일지’ 중)

어머니는 김구보다 큰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유달랐다. 돌아가실 때까지 손수 옷을 꿰매 입고 밥을 지었으며 평생 다른 사람의 손으로 당신 자신의 일을 시키지 않은 어머니였다. 김구는 어머니가 담가준 우거지김치를 즐겨 먹었다.

지금도 상하이 시내 곳곳에는 채소 가게가 들어서 있다. 그러나 곽낙원은 배추나 푸성귀를 살 돈이 없어 파장까지 기다렸다가 상인이 내버린 흐물흐물한 배추 가닥을 들고 와 소금에 절였다. 상상할 수 없는 바닥 생활에도 이골이 나있었다.

김구가 일본 밀정 스치다(士田讓亮)를 죽인 일로 사형선고를 받고 인천 감영에 수감 되어 있을 때다. 어머니는 인천항의 물상 객줏집 침모로 있으면서 받은 품삯으로 아들의 옥바라지를 하였다. 그가 출옥한 지 얼마 후 친구들이 위로한답시고 기생을 불러 주연을 베풀었을 때, 어머니는 아들을 불러 호되게 나무란다. “내가 여러 해 동안 고생을 한 것이 오늘 네가 기생을 데리고 술을 먹는 것을 보려고 한 것이었더냐.”

그리고 훗날 그가 신민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17년 징역형을 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살이를 할 때 어머니는 면회 와서 말했다. “나는 네가 경기 감사를 한 것보다 더 기쁘게 생각한다. 우리 식구는 잘 있으니 염려 말아라. 옥중에서 네 몸이나 잘 돌봐라.”

곽낙원은 키 1m50㎝도 안 되는 ‘단구의 거인’이었다. 상하이 시절, 영경방(永慶方) 10호 2층에 살 때 부근 채소가게에서 팔다 버린 쭉정이를 모아 우거지김치를 담그던 어머니. 귀국한 후에도 밤낮으로 상하이에 두고 온 자식을 잊지 못하고 얼마 안 되는 생활비를 아껴 약간의 돈을 부쳐오시던 어머니. 홍구 사건 후 빈번히 찾아와 고향집을 포위하고 감시하는 일경을 피해 스스로 망명길에 오른 어머니였다.

이후 김구는 어머니를 모시고 고난의 행군을 시작한다. 난징∼창샤∼구이핑∼리우쩌우∼치장으로 이어지는 망명 후반기에 곽낙원은 임정 식구들과 동고동락을 마다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있었기에 백범은 자신의 역사적 임무가 무엇인가를 누구보다 명철하게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삶에 존재하는 거짓으로부터 진실을 구별한다. 사랑과 연민의 원천인 곽낙원의 가슴은 백범 정신의 가장 민감한 바로미터였다. 독립운동에 뛰어든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자식에 대한 사랑에서 인류 보편을 향한 사랑으로 발전한다. 그러한 사랑의 질적 변화 과정에 주목하지 않고 백범의 건국 정신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곽낙원은 1939년 4월26일 망명지 치장에서 숨을 거둔다. ‘2008 대학생 동북아 대장정’팀과 함께 찾은 치장은 고온다습한 안개의 도시였다. 건강한 사람도 숨이 턱턱 막히는 땅. 그는 광시(廣西) 지방의 풍토병인 인후증에 걸렸지만 아들에게 일절 알리지 않았다.

리우쩌우 시절부터 걸린 병이었다. 120여 명의 임정 식구와 함께 중국 교통부에서 내준 여섯대의 차량에 나누어 타고 리우쩌우∼치장을 거슬러 오르는 망명길은 1939년 4월6일부터 5월3일까지 거의 한 달이나 걸렸다. 일본군의 난징 함락 이후 거세지는 공습을 피해 산길로, 뱃길로 에둘러오는 동안 인후염은 더욱 깊어졌다. 병원에 갔을 때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었다.

김구는 어머니를 충칭 화상산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하루의 삶을 이으려고, 삶을 찾으려고/주린 창자를 움켜쥔 후 거리 거리를 헤매는 군중/때때로 정기없는 두 눈에서는 두 줄기의 눈물이 흐르며/핏기없는 입술을 악물고 떨고 있나니/토막(土幕)에 있는 처와 자식이 힘없이 누워 있음을 생각함이다.”(황순원 ‘가두로 울며 헤매는 자여’-1931년 작시)

지저분한 옷차림에 굶주린 듯 퀭한 눈동자를 뜬 노파는 오늘 상하이에도 치장에도, 서울에도 즐비하다. 가난한 입성의 노파를 보면 곽낙원 여사를 떠올릴 일이다. 어린 손자의 손목을 잡고 거리를 헤매거나 기차 대합실에서 망연자실한 채 갈 곳을 몰라 서성이는 노파. 아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고향을 떠나 떠돌이로 평생을 살아온 강철같은 여인.

대한민국의 건국은 곽낙원 같은 어머니가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상하이·치장=글·사진 국민일보 쿠키뉴스 정철훈 전문기자 c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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