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병사 휘 일(逸) 공의 유서(諭書)를 손에 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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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식 작성일08-05-27 21:49 조회2,232회 댓글3건본문
오늘 북병사 휘 일 공의 유서를 입수 하였습니다. 작년 가을 우연히 고서적. 문서의 전시 도록을 보던 중 눈에 확 띄는 물건을 보았습니다. 그곳에 북병사 휘 일 공의 유서가 아주 상당한 가격으로 있었습니다. 괜시리 전시 도중에 연락을 하면 소장자가 억지나 부릴까 싶어 전시가 끝난 후 한참 만에 주최 측에 연락을 하니 소장자의 연락처를 알려 주었습니다. 소장자에게는 단지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 가장하고 물건의 유.무를 확인하니 다행히 너무 비싼 가격 때문이었는지 당시에도 소장하고 있다는 말에 무척 기뻤습니다.
가격을 물어보니 처음엔 제시된 가격을 말하므로 좀 더 강하게 구매 의사를 밝히니 30 % 가 할인된 가격을 제시 하더군요. 연락처만 주고받고 그저 모른 척하면서 겨울을 보냈습니다. 속으로는 중간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지 않기만을 빌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왜 이 물건이 그 먼 곳에 가 있는지, 어찌 관리 하였기에 이리 되었는지 답답하기도 했습니다.
드디어 지난 4월에 연락을 한 후 먼저 계약금을 보냈습니다. 그런 후 잔금을 치루고 나니 바로 물건이 도착 했습니다 폭 73 cm 정도, 길이 140cm 정도 이며 내용 중 한글자만 일부 파손 되었을 뿐 온전한 상태의 유서입니다.
곧바로 사진을 몇 장 찍어 단국대 김세봉 선생님께 번역을 부탁하는 메일을 보내고 잠시 충주 엄정이 위치한 북쪽 하늘을 봅니다.
조선왕조실록 중 “仁祖 48卷, 25年(1647 丁亥 / 청 순치(順治) 4年) 6月 19日(戊子) 1번째 기사
이래·심지한·임전·김일·이경안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戊子/以李䅘爲右承旨, 沈之漢爲校理, 林爲副應敎, 金逸爲平安兵使, 李景顔爲黃海兵使 “ 라는 항목이 있습니다. 위 유서의 발행일은 6월 20일 자로 되어 있으니 조선왕조실록과 정확히 일치되는 것입니다. 옛 것을 살펴 오늘을 밝히는 것 은 고금 이래로 불변의 진리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옛것이 없다면 무었으로 오늘을 밝히겠습니까? 옛것을 잃으니 혹은 옛것으로만 치부해 버리니 “천민 같은” 자본의 논리만 횡행하는 세태가 아닐런지요?
잃어버린 조각을 채우고 깁는 것은 단지 옛 것을 채우고 깁는 것만이 아닌 오늘을 밝히는 그리하여 미래를 밝혀주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가올 세대에게 그리고 먼 훗날의 후대와 후학을 위해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란 생각입니다.
소장자의 말로는 20 여년 전 에 입수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20년을 떠돌다 이제 후손의 손에 들어오신 북병사공께서는 이제 편히 주무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북병사 공께 약속 드립니다. 편히 쉬시도록 모시겠노라고---.
낙흥부원군의 역모에 연루되었다하여 체포를 위해 사관을 보내니 이미 영지인 함경북도 경성의 영지에서 40대 젊은 나이에 이미 죽어 있었다고 기록된 북병사공을 생각건대 여러 회한과 아쉬움이 배어 나옵니다.
국역비변사 등록에 기록된 효종 즉위년(1649) 10월 30일 통제사 천망 : 원숙(元䎘), 김응해(金應海), ○김일(金逸) 을 보건데 만일 김일 공이 통제사가 되었다면 아마도 형제 통제사가 탄생 하였을 것이지요.
그 이후의 기록엔 효종 즉위년(1649) 11월 26일 아뢰기를,
"주강(晝講) 때에 대사헌 임담이 아뢰기를 '지방 곤수(閫帥)의 직임은 통제사의 경우 지위와 명망이 병사보다 위에 있습니다. 유정익은 겨우 북병사 및 부총관으로서 연이어 대간의 논박을 받았음에도 곧 이어 통제사의 명을 받았으니, 뭇사람들의 의견에 이르기를 「정익은 욕심이 많고 방자하여 도리어 원숙(元䎘)만 못하다」고 합니다. 교체를 명하소서'
하니, 임금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원숙의 교체를 논할 때 내가 말하기를 「인재란 갑자기 얻을 수 없는 일이니 흠을 씻어버리고 임용하는 것이 옳다」하였다. 지금 유정익이 도리어 원숙만 못하다고 하니, 만약 이 다음 사람이 또 유정익만 못하다고 한다면 어찌 할 것인가? 시험해 보는 것만 못하다”
하셨습니다. 또 아뢰기를
“'논계(論啓)로 인해 북병사에서 교체된 사람을 이 직임에 시험하는 것은 좋으나, 하필 통제사로서 시험합니까? 조가(朝家)의 사체로 볼 때 결코 이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현재 남쪽에 제구로 인한 걱정이 없지 않고, 전 통제사가 파직된 뒤 그대로 있은 지 오래이다. 그러므로 속히 부임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셨습니다. 또 아뢰기를
“여러 사람의 의견이 이러하므로 정익은 끝내 부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히 처치하시고 그 대임을 내소서”
하니,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은 그러하나, 지금 만약 가벼이 교체하고 용렬한 사람을 대임으로 삼으면 도리어 해는 있고 이익은 없으니, 지금 우선 시험해 보라”
하셨습니다. 또 아뢰기를
“낮은 관인의 포폄(褒貶)에서 중(中)에 들은 자는 특히 작은 과실에 의한 것이라도 법전 안의 도목정(都目政)에서는 그 위 직품에 임명될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병사로서 무거운 논계를 입은 지 두어 달만에 통제사로 승진됨은 징계하는 도리가 아니며, 사체로 볼 때 매우 미안스럽습니다”
하니, 임금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체로는 그러하다. 교체하여 바꾸기는 어렵지 않으나, 반드시 재능이 있고 허물이 없어 정익보다 우수한 자를 얻어야만 대임으로 할 수 있다. 묘당에 물어 합당한 자를 얻어 처리하라”
하셨습니다. 우부승지 신유(申濡)가 아뢰기를
“통제사 유정익의 대임문제를 묘당에 묻는 일을 정원에서 임금님의 뜻을 받들어 분부해야 합니까? 어찌 해야 합니까?”
하니, 임금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정원에서 분부하라"
고 전교하셨습니다.
"인재를 얻기 어려움은 문무가 모두 같으니, 반드시 배양하여 성취되도록 한 뒤에 임용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무리에서 뛰어나고 흠이 없는 자는 천백 가운데에서 겨우 하나 얻을 수 있습니다. 내외의 관직을 비울 수 없다면, 어찌 인재를 다른 세대에서 차용할 수 있겠습니까? 문사도 그렇거늘 더구나 무장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의 무장으로서 명성이 드러나고 직품이 곤수에 이른 자는 이완(李浣)·김응해(金應海)·변사기(邊土紀) 유정익(柳廷益)·김일(金逸)·김시성(金是聲)·원숙(元䎘)·박경지(朴敬祉) 등 약간인에 불과합니다. 이완은 현재 어영대장이고, 김응해는 총융사이니, 통제사의 직임을 맡길 만한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유정익을 후보자로 추천하여 낙점을 받았으나, 대간의 논박이 또 발하였으니 신들은 실로 어떤 사람이 합당한지 알 수 없습니다. 2번 패하였으므로 죽여야 함에도 목공(穆公 : 춘추시대 진(秦)의 임금 )은 맹명(孟明 : 장군 백리해의 아들 )을 교체하지 않았고, 2개의 계란註 001) 문제로 나라를 지킬 장군 재목을 버렸으므로 자사(子思)가 깊이 구변(苟蠻)을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사람으로서 누가 허물이 없겠습니까? 허물은 혹 능히 고치기도 합니다. 한 번 탄핵을 받았다 하여 길이 인물을 버리면, 사랑을 임용하는 도리에 있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으며, 장수된 자가 누군들 마음이 이탈되어 원망을 품지 않겠습니까? 윈숙·변사기는 본래 청근(淸謹)하다는 일컬음을 듣고 있고 유정익·김시성·김일은 글을 잘 하고 계려(計慮)가 있으니, 모두 임용할 만한 사람입니다. 비록 실책은 있으나 어찌 흠을 묻어두고 허물을 포용하는 도리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장수를 임용함에는 또한 많은 술책이 있습니다. 병서(兵書)에 그 욕심을 이용하고 그 용맹을 이용한다는 말이 있고, 군률(軍律)에 공을 세워 속죄하게 한다는 법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율법으로 처단하면 허물을 고치고 스스로 새롭게 하는 길도 없고 인재도 잇대어 얻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유정익은 이미 논박을 입었고 후보자를 고쳐서 추천하더라도 그 대임 역시 앞의 몇 사람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상께서 이미 논의하여 처리하라고 전교하셨는데, 신들의 생각에는 장수의 직임은 사람마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인물의 결핍이 이와 같으므로 부득이 논박을 입은 사람 가운데에서 가려 차출한다면, 중론은 모두 원숙과 유정익이 합당하다고 합니다. 이 두 사람 가운데에서 선정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장수의 임용에 관한 경 등의 논의는 지극하다 하겠다. 새로이 차출한 통제사를 그대로 보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북병사 공을 대신해 유정익이 통제사가 되었고 더불어 북병사 공은 당대에 무장으로서 문재와 무재를 두루 지닌 인재로 평가되고 있음을 봅니다. 낙흥부원군의 일이 아니었다면 엄정에서 전해 오는 야담처럼 통제사 휘 적 공이 동생과 가문을 보존키 위하여 동생에게 비상 약을 보내 자진토록 시키는 비극 적인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북병사 공이 형님의 말씀대로 스스로 목숨을 내어 던져 가문이 보존되었다는 것도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란 것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변사기 같은 장수가 모진 고문 끝에 죽임을 당하고 멸문지화에 이르게 된것을 보면 진정 북병사 공과 통제사 공의 선택이 올바른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平安道水軍兵馬節度使 兼 安州牧使” 諭書는 그러므로 단순한 유서가 아니라 비극적 삶과 의지가 담긴 유서로 제겐 다가옵니다. 북병사 공께서는 방계 후손이나마 불초 소생의 품에서 시름과 고민 잊으시고 편히 안락하소서.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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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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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북병사공(휘 일)의 유서 매입을 축하드립니다.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서 조바심으로 작년 가을 겨울, 금년 봄을 보내고, 끈질긴 집념과 인내로 입수하신 과정을 잘 보았습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사진을 보내 주시면 잘 보정해 보겠습니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축하를 드리며 큰 박수를 드립니다.
김완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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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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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번역문이 오게되면 함께 보내 드리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길 바랍니다.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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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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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깊은 애정과 노력의 결실이라 믿습니다.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