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하멜표류기" 중 전남병사 휘 적 공의 기록

페이지 정보

김완식 작성일08-04-22 21:22 조회1,553회 댓글1건

본문

 


전라도 지방에서 우리의 생활

  1656년 3월초 우리는 말을타고 한양을 떠났다. 강까지 벨테브레와 평소 안목이 있던 몇명이 동행했고 나룻배에 몸을 실었을때 그들은 되돌아 갔다. 그것이 벨테브레를 본 마지막이었다. 우리는 다시는 그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했다. 


우리는 영암 시로 들어가 예전과 똑같은 도시를 지나쳤다. 우리가 머문 모든 새 도시에서 국비로 숙박하고 전과같이 새로운 말과 식량을 제공받았다. 며칠 후 우리는 병영(강진)에 도착했다. (하멜은 이곳을 Duijtsiang or Tiolla Peingh , 라 부름. 클릭하면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음. ). Peingse (Pyongsa-평사)의 지방 군사령 관은 지방관의 즉각적인 지휘하에 있었다. 우리는 경위관에 의해 한양에서 보내진 세명을 인계하라는 명령을 받은 사령관에게 건네졌다. 명령을 수행중이던 부사령관은 한양에서 12마일 거리에 살고 있었 다. 우리는 즉시 현지가옥에서 함께 살았고, 3일이 지난 후 3명이 합류 해서 모두 33명이 되었다. .


4월에 우리는 제주도에 있었던 동물의 가죽을 받았 다. 이것은 한양으로 보낼만큼 중요하지도 않고 별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제주도에서 10마일 남짓한 하변 가까운 곳에서 거명된 품목을 받을 수 있었다. 이 물건 덕분에 우리는 다시 의복을 갖춰입고 새로 머무를 곳에서 필요한 것들을 마련할 수 있었다. 총독은 우리에게 한달에 두번 시장이나 시청앞 광장의 풀을 뽑고 깨끗이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657년초에 지방관은 뇌물혐의로 자리에 서 물러났다. 그는 백성과 양반모두에게 사랑받았고 백성들은 왕에게 그를 너그러이 대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들의 중재덕에 그는 사형은 면하고, 다른 자리를 하나 얻었다.


2월에 새로운 지방관이 도착했다. 그로인해 우리의 상황이 나빠졌다. 전에는 땔감으로 쓸 장작을 받았으나 이번에 직접 잘라서 써야했다. 게다가 그는 우리를 혹사시켰다. 땔감을 얻기위해 우리는 산지를 6마일가량 돌아 다녀야 했다. 그가 심장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우리는 행복해 했다. 


11월에는 새로운 지방관이 도착했다. 그로인해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우리가 그에게 옷 살 돈이나 다른 급여를 요구했을 때 그는 단지 왕으로부터 정량의 쌀만 제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했다. 가까스로 우리는 삶을 지탱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나무를 나르느라 옷이 헤어져서 새 옷이 필요했는데 그런 이유로 우리는 지방관에게 구걸을 허용해 달라고 했으나 그런 예의 없는 행동은 중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했다.


지방관은 일주일에 4일간을 농가나 절에서의 구걸을 허용했는데 이곳에는 그런 곳이 많이 있었다. 농민이나 승려들은 매우 궁금해 하며 우리나라와 사람들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돈을 주면서 매우 즐겨 들었기 때문에 이런 구걸은 금전적으로 대성공이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겨울을 지낼 새 옷을 구입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이번 겨울은 한양에서 겪었던 것보다 훨씬 덜 추웠다. 

*주: 11월 4일 김적 공이 전남병사의 직을 받고 부임을 하게 됩니다. 이후 1658년 연초에 그 직을 이임하게 됩니다


1658년 이전의 지방관을 대신하여 새로운 지방관이 부임했다. 새로 부임한 지방관은 우리의 행동의 자유를 제한했고 각자 아마포 세 필에 대한 대가로 매일 일을 시켰다. 일을 함으로해서 옷이 더 빨리 낡았기 때문에 우리는 탐탁치 않케 생각했다. 게다가 음식 이 부족하고 생활비도 많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20일 동안 주기적으로 살던 곳을 벗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한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나무를 잘라 농부에게 팔아서 삶을 지탱할 수 있었다. 


지방관은 우리가 살던 곳에 질병이 퍼져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우리들중 몇몇은 열이 매우 심각했다. 조선인들은 질병을 몹시 두려워했다. 지금까지 행동의 자유가 제한되어 우리는 수도나 일본영토 근처에 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달에 두 차레 잔디 가꾸는 임무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환자를 돌보기 위해 우리들 중 두 명을 남겨두고 떠나야 했다.  


1659년 4월 왕이 서거했다. 청나라 사람들의 인정 하에 장자가 왕위를 계승했다. 나무를 팔고 승려들에게 구걸하는 일이 전처럼 계속 되었는데 농부들에게 보다는 승려들에게 구걸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그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이 많아서 우리의 관습이나 우리가 가 보았던 다른 나라들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하기만 했다면 몇일 밤 동안 이야기 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조선은 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왕은 그들의 허가 없이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다. 이것은 형식적인 것 이었으나 절차를 거쳐야 했다. 


1661년 봄에 또다른 지방관이 부임했다. 그는 우리들에게 매우 호의를 가지고 대했다. 그는 종종 자신이 이 일을 처리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우리들을 오래전에 이미 우리들 나라로 돌려 보내게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지방관으로 있는동안 우리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계속된 가뭄으로 수확량이 감소하여 올해와 그 이듬해 극심한 식량부족 사태가 닥쳤다. 1662년 봄에는 기아로 수천명이 죽었고 도처에 노상강도가 들끌었다. 이런 이유로 왕의 군대가 도로를 끊임없이 순찰하고 다녔다. 그들은 또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사체를 치우는 임무도 맡고 있었다.

몇몇 마을은 강도들에 의해 약탈 당하고 왕에게 바칠 물품이 저장된 창고도 털렸다. 굶주림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도토리와 나무껍질과 뿌리로 연명했다.


굶주림이 3년간 계속된 1663년초에 수많은 사람이 굶어죽어서 나라 전체의 인구가 감소되었다. 남쪽으로 강어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비에 의존하는 일이 적었기 때문에 여전히 벼를 재배할 수 있었다. 그렇치 않았다면 인구 전체가 죽었을 것이다. 어떤 때는 지방관이 우리에게 월마다 주는 쌀을 줄 수 없었다. 그때문에 그는 왕에게 우리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 달라는 내용의 서신을 썼다. 2월에 우리들을 세 도시로 분산시키라는 명령이 왔다. 우리는 22명이었는데 이로써 12명은 여수 좌수영으로, 5명은 순천으로 나머지 5명은 남원( van Hove는 Namman이라 함. 으로 보내졌다. 


우리는 이 이동에 대해 많은 후회를 했는데 Duijtsiang 에서는 멋진 정원이 있고 우리나라 풍에 맞게 정원을 가꾼 멋진 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새로 시작하기 위해 이런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럴 시간도 부족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이런 이동이 나가사기로 가게 되었던 우리 동료들에게는 행복했던 상황이었던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이 순간을 예견할 수 없었다

 참고: www.hendrick-hamel.henny-savenije.pe.kr/indexk2.htm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재미있는 이야기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