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도공 최유경 선생 묘역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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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8-04-14 21:05 조회2,991회 댓글1건본문
지난 2월 10일 국보 제1호 숭례문이 무너져 내렸다. 이번 화재로 무너진 것은 숭례문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자존심도 무너져 버렸다.
▲ 화재 전 숭례문의 아름다운 야경
숭례문은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당시 축성도감(築城都監)이었던 최유경(崔有慶)의 지휘로 서울의 도성과 숭례문(崇禮門)이 건립되었다. 1962년 해체 수리 때 발견된 숭례문 상량문의 기록에서 숭례문이 세종 29년(1447)과 성종 10년(1479)에도 고쳐 지은 이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 화재 후 숭례문의 처참한 모습
▲ 숭례문 상량문 - 현재 국립박물관 및 유관 부서에는 상량문의 소재가 전혀 파악되지 않고 있으며, 당시 공사도면 책임자였던 재미 건축가 최용완씨가 소장하고 있는 사진이 유일한 자료이다.
최유경 묘역 답사
이번 숭례문화재로 인하여 세간에 많이 알려진 숭례문 축성당시 축성도감(築城都監) 최유경(崔有慶) 선생은 충렬공(휘 방경)할아버님의 증손인 상락군(휘 묘)할아버님의 사위이며, 문온공(휘 구용) 사천김씨(泗川金氏)로 분적한 휘 제안, 안정공(휘 구덕) 할아버님과는 처남 매부 지간입니다.
또한 최유경 선생은 안렴사공(휘 사렴) 할아버님을 주벽으로 모시는 송천서원(松泉書院)에 제향(祭享)되어 있어 우리 문중과는 친밀한 관계입니다.
최유경 묘역
지정번호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0호
지정년월일 : 2003. 4. 21
명칭 : 최유경 묘역
소재지 : 경기 용인시 기흥구 공세동 산1-1
최유경(崔有慶) 1343 - 1413
최유경은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으로 자는 경지(慶之), 호는 죽정(竹亭),본관은 전주(全州)이며 감찰대부 재(宰)의 아들이다. 고려 공민왕 21년(1372) 판도좌랑(判圖佐郞)이 되었고 이어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어 환관(宦官) 윤충좌(尹忠佐)의 교만 방자함을 탄핵했다. 우왕1년(1375) 전법총랑(典法摠郞), 1388 양광도안렴사(楊廣道安廉使)가 되었으며 이 해 요동정벌이 있게 되자 서북면 전운사(轉運使) 겸 찰방(察訪)이 된 후 밀직부사에 올랐다. 조선개국 후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었으며 1395년에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1397년에는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그 이듬해에는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에 올랐다. 같은 해에는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로서 경기우도도관찰출척사(京畿右道都觀察黜陟使)로 나가는 등 여러번 왕의 특사를 지냈다. 1401년(태종1년) 대사헌이 되었고, 1404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使)의 자리에서 사직하였다. 1413년(태종13년) 6월에 별세하니 사패지(賜牌地)인 용인현 자봉산 현 위치에 예장(禮葬)하였다. 태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고 청주(淸州)의 송천서원(松泉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시호는 평도(平度)이다.
▲ 기흥 초등학교 옆 전주최씨 평도공묘소를 알리는 표석
▲ 문화유적 안내판 - 주변은 동백 신도시와의 연계 개발로 도로공사가 한창이다.
▲ 최유경 선생 재실 효렴사(孝廉祠) - 외삼문은 솟을대문으로 '창덕문(彰德門)'이라고 쓴 현판을 달았다. 창덕문 정면 좌우에는 화강석으로 조각된 해태상 2기가 있으며, 1950년대에 새로 건립된 신도비가 세워져있다(원래 신도비는 조선 초에 변계량이 지은 것이라 하는데 기록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 신도비 - 正憲大夫行左參贊議政府事贈諡平度公有慶神道碑
▲ 창덕문
▲ 효렴사(孝廉祠) - 평도공 최유경은 효성과 청렴결백한 성품으로도 이름이 났다. 세종대왕께서 그의 효성을 들으시고 친히 효자정문을 내렸다. 태종조의 청백리로 녹선되기도 하였다. 그의 효자정문은 무려 세 곳에나 있다. 충북 청원군 대율리에 정문이 있고, 용정리에 직산십이정문(稷山十二旌門)이 있으며, 진천에는 그의 6남 사흥(士興)의 정문과 함께 있다. 사당 이름을 ‘효렴사(孝廉祠)’라 한 것은 바로 그의 청렴한 기상과 효행에서 연유한 것이다.
▲ 효렴사(孝廉祠) 뜨락의 운치 - 도시개발의 깃발이 효렴사의 해체를 알리고 있다.
▲ 최유경 선생 묘역은 효렴사로부터 700여 미터 길을 따라 올라간 자봉산 기슭이다. 묘역으로 가는 길가의 저수지
▲ 최유경선생 묘역 입구. 좌측에 안내판이 보인다.
▲ 평도공 최유경 묘역 전경 - 아래쪽이 아들 최사강의 묘
▲ 평도공 최유경 묘소 전경
‘생거진천 사거용인’의 근원
‘용인’하면 떠오르는 말이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라는 성어이다.
예로부터 선현들의 묘역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 용인이다. 그래서 생긴 말인지 몰라도, 이 성어에 얽힌 전설 또한 다양하다. 대부분 사람들이 이중환의 『택리지』에 근거하여 이 말의 근원을 삼고 있는데, 전주최씨 가문에서는 나름대로 이 말의 근원을 제기하고 있다.
평도공 최유경은 생전에는 진천에 살았으며, 세상을 마친 후에는 용인에 영면하고 있다. 이로 인해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라는 말이 생겼다는 것이다.
▲ 正憲大夫行左參贊議政府事贈諡平度公有慶之墓. 一善郡夫人金氏. 上洛郡夫人金氏. 固城縣夫人李氏 祔左
▲ 묘는 조선초기의 형식인 방형쌍분묘(方形雙墳墓)로서 3단으로 구분하여 상계에는 봉분, 묘표 1쌍, 중계에는 문인석 1쌍, 장명등 하계에는 문인석 1쌍을 갖추었다.
▲ 구 묘표 - 비대와 비신이 각각의 돌로 조성되었으며 대석의 상면에 복련을 양각하였다. 건립연대는 숭정기원47년(1674년)으로 9대손 최후랑이 근지하였다.
▲ 고성이씨 묘표는 비대와 비신이 힌 돌로 조성되어 있으며 마모가 심한 편이다. 건립연대는 정통4년(1439년)이다. 1963년에 세워진 묘비에는 상락군부인 김씨, 일선군부인 김씨, 고성현부인 이씨의 이름을 새겼는데 구 묘표에는 세 번째 부인 고성이씨만 새겨져있다. 전주최씨 종중회의 최병갑님의 전화 통화에 의하면 두 분의 묘소는 일찍이 실전하여 새로이 설단을 마련할 계획 중이라 한다.
상락군 부인의 아들인 최사의(崔士儀)는 전주최씨 양도공파의 파조이다.
▲ 장명등은 조선초기 양식으로 동쪽으로만 화창이 뚫려있고 삼면이 막혀있는 독특한 형태이다.
▲ 동쪽으로 화창이 뚫려있다.
▲ 문인석은 중계와 하계에 한 쌍씩 배치하였다. 중계와 하계를 구분하는 대석이 가공되지 않은 자연석으로, 세련되지 않은 자연미가 정겹다.
▲ 최유경 선생 묘역 후경 - 풍수가들에 의하면 천. 지. 인 삼혈이 고루 갖춰진 명당이라 한다.
▲ 묘역의 제비꽃
▲ 최사강 묘비
최사강 (崔士康, 1385~1443)
최유경의 아들. 시호 경절(敬節). 음보(蔭補)로 벼슬에 올라 청요직(淸要職)을 역임,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 승정원동부대언(承政院同副代言)에 특임되었다. 1420년(세종 2) 경기도관찰사 ·호조참판, 1425년 충청도관찰사를 지내고, 1431년 병조판서, 1441년 우찬성, 이듬해 이조판사(吏曹判事)를 겸했다. 두 딸을 성녕군(誠寧君)과 금성대군(錦城大君)에게, 손녀는 임영대군(臨瀛大君)에게 출가시켰다. 6대손이 문충공 최명길이다.
▲ 최사강 묘소 전경
▲ 동강 할미꽃처럼 하늘을 향해 피어있는 묘역 입구의 할미꽃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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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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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문영공 묘소 묘지석 발굴작업 후 곧 이곳을 다녀오셨군요.
잘 감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