水軍名將傳 金方慶 - 민현식(閔賢植)
페이지 정보
김태영 작성일08-04-08 14:32 조회1,850회 댓글3건본문
水軍名將傳 金方慶
김방경은 안동(安東)사람으로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 후손이다.
고려(高麗) 고종(高宗)때부터 관인(官人)이 되어 삼별초(三別抄)란에 진도(珍島), 탐라(耽羅)를 공격하여 전공을 세우고 몽고(蒙古)에서 일본(日本)을 원정할 때도 두 차례나 고려군의 도원수(都元帥)로 출정하여 크게 전공을 세워 시중(侍中-지금 首相)이 되었다.
방경은 천성이 충직하고 신의가 두터워 구차하게 소절(小節)에 몸을 굽히는 일이 없고 고전(古典)을 많이 알아 지식이 풍부하였다.
十六세때 벌써 식목록사(式目錄事)가 되었는데 시중(侍中) 최종준(崔宗峻)은 그의 성실함을 사랑하여 예로써 그를 대접하고 중요한 일을 모두 맡겼다.
그의 부친은 효인(孝印)이란 사람으로 성품이 엄격하고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과거(科擧)에 급제하고 벼슬은 병부상서(兵部尙書)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다. 방경의 모친이 잉태(孕胎)하였을때 꿈에 여러번 구름이 몸을 싸고 돌았으므로 양친은 이상히 생각하여 「이 애기는 아마 신선(神仙)이 인간에 태어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어려서는 조부(祖父) 민성(敏成)의 집에서 자랐는데 성미에 맞지 않는일이 있으면 길거리라도 가리지 않고 흙바닥에 누웠으나 지나던 우마(牛馬)도 이를 피하여 가므로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방경은 벼슬이 높아져도 항상 사람 대하기를 겸손한 태도로하고 몸 가짐을 검박하고 부지런하여 늙어서도 낮에 눕는 일이 없었다. 한때 나이 늙어 임금에게 은퇴할 것을 말하였더니 왕은 몽고(蒙古)에서 다시 일본을 치게 되면 고려(高麗)에서도 원수(元帥)를 택하여야겠는데 방경이 아니고는 이 자리를 감당할 사람이 없고 또 방경이 아니면 원주(元主)가 인준을 아니할 것이니 연로하나 나라를 위하여 은퇴하지 말라고 한것이나 그후 제이차 일본 원정에 참가하였던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노후에도 건강하였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나이 이미 늙었으나 두발(頭髮)이 희지 않고 춥고 더운때에 병에 걸리는 일이 없었다. 관위(官位)에 있을 때나, 아니 있을 때나 나라를 근심하기를 제집과 같이하여 나라에 일이 벌어지면 왕은 반드시 방경을 불러 의논하였다.
서북면 병마판관(西北面 兵馬判官)이 되었을때 몽고군이 내침(來侵)하니 방경은 여러 고을의 백성들을 위도(韋島)에 피란 시켰다. 위도는 넓이 십여리나 되는 평탄한 들이 있어 농사를 지을수 있으나 바다 밀물이 들어와 개간할 수 없었던 것을 방경은 제방(堤防)을 쌓고 개간하여 농사를 짓게 하였다. 처음 제방을 쌓을 때는 백성들이 고역을 시킨다고 하여 오히려 방경을 원망하였으나 가을이 되어 크게 추수를 하니 모두 살길이 열렸다고 기뻐하였다. 또 섬엔 우물이 없어 늘 육지로 왕래하면서 물을 길러 오기 때문에 가끔 몽고군에게 포로되는 일이 있었는데 방경은 저수지를 만들어 이런 폐단을 없이 하기도 하였다. 방경은 이와 같이 민생을 제도(濟度)하는 경륜도 밝았던 것이다. 왕궁을 지키는 근위장교(近衛將校)가 되어서나,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어서나 법을 지키고 권신(權臣)들에게 조금도 아첨하는 일이 없고 항상 충직한 절개를 간직하고 있었다.
원종十년 권신(權臣) 임연(林衍)은 권신 김준(金俊)을 죽이고 전권하게 되자 몽고에 적의를 품고 재거를 기도하였으나 원종이하 근실들이 친몽(親蒙)책에 기울어져 강도(江都)를 버리고 개성으로 환도하려고 함에 왕을 별실에 가두고 왕제 안경공(安慶公) 창(淐)을 세웠다. 이 소식을 원나라로 부터 돌아오던 원종이 듣고 원 세조(元. 世祖)에게 호소하니 세조는 곧 장수를 보내어 강력한 내정간섭을 하고 고려군신들을 꾸짖었다. 그 사신이 돌아갈 때 방경도 국서를 가지고 같이 원나라에 갔었다. 세자는 세조에게 군사를 청하여 그 세력으로써 본국의 권신을 누르려하였는데 세조는 말하기를 「지금 몽가독군(蒙哥篤軍)이 서경(西京)에 오랫동안 주둔하게 되면 임연(林衍)은 이미 명령을 거역한 자라 반드시 군량(軍糧)을 공급하지 않을테니 세자는 적임자로 하여금 대책을 강구하게 하라」고 하였다. 세자는 누구를 이 일에 맡겨야 잘 처리 해낼는지 몰라 인선(人選)에 애를 쓰고 있을때 시중 이장용(李藏用)은 방경이 아니면 이런 중대사를 맡을 사람이 없다고 하여 세자도 방경을 쓰기로 하였다. 방경은 관군(官軍)이 서경에 도착한 다음 다시 대동강을 건느면 서울에서는 큰 혼란이 일어나 불의의 변이 일어날 것이니 절대로 강을 건너지 말 것을 주장하여 세조의 승낙을 얻었다. 그런데 출동 도중 원종(元宗)이 다시 복위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와 회군하여 대기 하였다.
원의 세조는 서경(西京)에 동녕부(東寧府)를 두고 최단(崔坦)으로 총관(總管)을 삼았다. 이때 방경이 몽고의 장수 몽가독(蒙哥篤)과 서경에 와 있었는데 최단은 몽고군을 이용하여 난을 일으키려고 백방으로 책동하였다. 한편 임연(林衍)은 몽고에 대항하려고 지보대(智甫大)를 시켜 야별초(夜別抄)를 거느리고 황주(黃州)에 주둔하게 하고 신의군(神義軍)으로 하여금 숙도(橚島)에 주둔하게 하였다. 단(坦)등은 이를 알고 몰래 배(船)와 용사를 모아놓고 몽가독에게 말하기를 지금 연(衍)등이 반란을 일으켜 몽고군을 치려고 준비하고 있으니 장군은 사냥간다고 핑계하고 강을 건너 남하하여 고려군의 동향을 살피면 우리는 배로 보음도(甫音島)로 진출하겠으니 장군은 육로로 군사를 거느리고 착량(窄梁)에 나가면 고려군은 해륙 모두 길이 막혀 도망가지 못할 것이라고 충동하여 임연의 야별초군을 칠 것을 획책하였다. 그러나 단(坦)의 호위병으로 있던 오득공(吳得公)이 이 사실을 방경에게 연락하였으므로 방경은 즉시 몽가독 숙소를 찾아갔다. 출동준비를 갖추고있던 몽가독은 방경을 보자 시치미를 떼고 「우리는 무료하고 심심하여 사냥을 나가려는 참이니 같이 아니가겠는가」하고 행동을 감추려고 하였다. 방경은 「어데로 사냥갈 셈이냐?」물으니 「대동강을 건너 황주(黃州)를 거쳐 숙도(橚島)에 가겠다」하였다. 이에 방경은 「세조는 대동강을 넘는 몽고병은 처벌한다는 명을 내린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어찌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강을 건너려 하는가?」하고 강경히 힐책하니 몽가독도 다시는 강을 건널 생각을 못하였다. 이와 같이 방경은 당시의 절대한 권세를 부리는 몽고장군도 억누를 만한 위험을 갖춘 장군이요, 인격자이었던 것이다. 몽가독은 방경의 충직한 인격을 존중하여 서울을 멸하려던 자는 최단뿐이 아니라고 모든 내막을 사실대로 알려 주었다. 만일 몽고군이 출동하였더라면 서울을 점령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니 이를 막은 장군의 공은 나라를 능히 보존할수 있었다. 양차에 걸쳐 북경(北境)을 다스림에 방경장군의 명성(名聲)과 덕망(德望)은 비할 데 없었다.
김방경의 아들 김흔(金忻)과 김순(金恂)은 아버지 방경을 따라 일본원정에 참가하여 공을 세워 김흔은 진국상장군(鎭國上將軍)이 되고 김순은 전중관(殿中官)이 되었으며 사위(壻) 조변(趙忭)도 방경을 따라 일본에 원정하여 공을 세웠다.
김방경(金方慶)의 해상활동은 삼별초(三別抄)의 난을 평정한 진도(珍島)공략과 제주(濟州)공략이고 원장 흔도(忻都, 一名 忽篤)와 함께 2차에 걸쳐 감행한 일본(日本)원정이다.
삼별초(三別抄)의 난이란 고려가 몽고(蒙古)의 침략을 받아 강화도(江華島)로 천도하여 39년 만에 원종(元宗)은 몽고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여 개경(開京)으로 환도한데 반기를 들고 일어난 반동군의 난리인 것이다.
당시 고려국내의 여론은 개경(開京)환도 문제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복잡한 암투가 흐르고 있었다. 지금까지 고식적이기는 하나 일시적 방편으로 몽고와 강화를 지속해오다가 몽고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여 농성하고 있던 강화도를 포기하고 개경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몽고에 아주 굴복하고 마는 것이므로 나라의 체면문제로 정부내의 의견이 일치할수 없었다.
원종(元宗)을 중심으로한 문신(文臣)일파는 대개 환도를 희망하나 임연(林衍)을 중심으로한 무신(武臣)일파는 반대하였다. 즉 임연일파가 반대하는 이유는 강도를 중심으로 때를 따라 몽고에 항쟁을 계속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원종(元宗)은 몽고에 갔다가 개경에 돌아와 이내 환도할 것을 포고하고 강도내의 모든 계급과 기구를 옮길 것을 명하였다. 이에 대하여 삼별초(三別抄)를 중심으로 한 무신일파는 불복의 태도를 취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 삼별초에는 국인으로서 몽고에 잡혀갔다가 도망해온 자를 모아 신의군(神義軍)이란 한 부대를 편성하여 좌.우별초(左右別抄)에 이를 합친 것으로 외적 방위에 상당히 활약하여 몽고에 대한 적의는 매우 강하였다. 그래서 개경에 환도하여 길이 몽고에 굴복하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여기 원종(元宗)이 사람을 강화에 보내어 삼별초를 파하고 그 명부를 빼앗아온 것이 결국은 화근이 되어 반란을 일으킨 원인이 되었다. 그들은 조정이 명부를 몽고에 보내어 삼별초의 관계자를 모조리 죽이려는 것이 아닌가하여 불안과 반발을 일키고 있을때 삼별초의 지휘관인 배중손(裵仲孫)이 몽고병이 강도를 점령하고 인민을 살육하려 한다 하고 개경과의 교통을 끊고 군졸을 격동시켰다. 그리고 배중손등은 왕족 승화후 온(承化候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관부를 설치하여 관리를 임명함으로써 중앙 정부에 대한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도내의 인심은 불안에 휩쓸리고 문.무관중에는 도망하는자, 또는 수졸(守卒)로서 탈출하는 자가 많이 생기므로 배중손등은 하는 수 없이 함선 천여척에 공사재물과 도내의 자녀를 싣고 남으로 진도(珍島)에 내려가 거기를 근거지로 하고 연안 각지를 침공하여 한때는 남해에 한 왕국을 세운 듯 한 감이 있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장군 김방경(金方慶)과 몽고원수 아해(阿海)와 함께 진도의 삼별초군을 치게 하였다. 삼별초군은 나주(羅州)를 포위하고 또 전주(全州)를 공격하여 그 형세가 위급하게 됨에 나주인은 할수 없이 전주인과 항복할 것을 의논하였던바 전주인은 아직 결정짓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는 말을 도중에서 들은 방경은 단기(單騎)로 밤을 새워가며 전주로 달려가 말하기를 「모일(某日)에 1만 병(兵)을 거느리고 입성할터이니 빨리 군량준비를 하라」고 하였다. 전주에서 이 통고를 곧 나주에 전달하니 적은 관군의 대부대가 이르는줄 알고 포위망을 풀고 돌아갔다. 방경은 이와 같이 임기응변하는 기지(機智)도 풍부하였던 것이다.
김방경군은 아해(阿海)군과 함께 삼견원(三堅院)에 주둔하면서 진도의 적과대치하고 있었다. 적은 선함(船艦)이 많고 수상훈련이 잘 되어 행동이 신속하고 날래어 싸움이 있을때 마다 적은 먼저 돌격하여와 관군은 간신히 이를 막을 정도였다. 방경이 진도에 이르니 적은 벌써 배에 올라 각처에다 기를 꽂고 나팔소리, 북소리 요란할 뿐 아니라 육지 성위에는 성원하는 큰 소리 천지를 뒤 흔드는 듯 하였다.
이 활발한 적의 기세에 기가 눌린 아해(阿海)는 겁을 먹고 배에서 뛰어내려 나주로 물러가려고 하였다. 방경은 비겁한 아해의 행동을 보고 「만일 원수가 퇴각하면 적은 우리의 약한 것을 보고 공세를 취할것이니 그 때는 패전의 책임을 누가지겠는냐」고 강경히 말하니 아해도 감히 후퇴하지 못하였다.
역습을 받은 관군은 전세불리하여 몇 겹으로 적의 포위를 당하였다.
방경은 「승패는 오늘에 달렸다」하고 용감하게 앞을 달려 적중에 돌격하니 방경의 부하는 사력을 다하여 싸웠으나 화살이 다 없어지고 또 장병은 모두 중상을 입고 일어날 수 없게 되었다. 배는 바닷물에 밀려 진도 해변가로 들어가니 바닷가에 서있던 한 적졸이 칼을 뽑아들고 선중으로 뛰어 들었다. 김천록(金天錄)이 단창으로 적졸을 찔렀으나 형세 위급함을 본 방경은 적의 손에 죽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하고 바다에 몸을 던져 죽으려 하였다. 부상을 입은 병사들은 방경의 위급한 것을 보고 다시 일어나 아픔을 무릅쓰고 싸울때 장군 양동무(楊東武)가 함대를 몰아쳐 들어왔으므로 겨우 적의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다. 방경이 이와 같이 위기에 처했을지라도 조금도 당황하는기색이 없고 평소와 같이 침착하고 위엄을 잃지 않았다. 또 방경은 천성이 강직하여 불의(不義)에 굴하지 아니하였으니 몽고군의 원수 아해(阿海)가 수전에 임할 때 마다 겁을 집어먹고 싸우지 못하는 것을 원나라 황제에 고발하여 아해를 파면시키고 흔도(忻都)를 후임으로 보내기로 하였다. 몽고 원수 흔도(忻都)가 새로 부임하자 방경은 흔도와 면밀한 작전과 준비를 갖춘 다음 재차 진도 총공격을 개시 하였다. 이때 적은 벽파정(碧波亭)에 집결하고 있었다. 방경은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벽파정으로 처들어가고 좌우(左右)군 도합 백여척도 일제히 처들어가니 준비를 소홀히 하고 있던 적은 중군을 막으려 하였으나 원장(元將) 홍다구(洪茶丘)가 불을 지르며 협공하여 적의 진지는 무너지고 크게 패하여 도망하였다.
진도를 점령한 방경은 쌀 4천석과 보물, 무기등 많은 전리품을 얻었으나 전부 서울로 보내고 양민(良民)으로서 적에 잡혔던 자는 모두 석방시켜 집으로 돌아가게 하니 도내 인심이 모두 방경에게로 돌아왔다.
적은 이 싸움에 대패하고 제주도(濟州道)로 도망하여 거기에다 진지(陣地)를 구축하였다. 성을 내성과 외성 두겹으로 든든히 쌓고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진지를 구축한 것이다.
진도에서 도망하여 올때에 적의 일당 가족외에 수많은 도민을 배에 싣고 왔으므로 적의 세력은 홀만히 볼 수 없었으며 또 적의 행동은 극히 대담하고 활발하였다. 본토(本土) 육지로 건너와 양민의 재산으로 자심하니 약탈하여 남해 연안일대는 백성들이 모두 피란가고 촌락은 황폐하였다.
그들은 남해연안일대 뿐만아니라 영남(嶺南)을 지나 경기(京畿)지방까지 들어와 마음대로 노략질을 감행하여 도로는 끊어지고 인심은 흉흉하였다.
왕은 다시 김방경(金方慶)을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로 임명하여 제주도를 근거지로 하고 차츰 그 세력이 커져가는 삼별초(三別抄) 잔당을 토벌하게 하였다.
방경은 다시 수군을 정비하고 육군을 훈련시켜 1만여명으로 제주(濟州)공략을 시작하였다. 방경의 관군이 제주도에 이름에 적은 요소에 복병(伏兵)을 하고 필사의 기세로 대항하였다. 그러나 방경은 대정(隊正) 고세화(高世和)를 선두로하고 장군 나유(羅裕)를 후군으로하여 전군을 몰아 돌격하니 적은 진지를 버리고 후퇴하였다. 이때 좌군(左軍)전함 30척이 비양도(飛揚島)로부터 직접 적진으로 처들어가니 적은 당해내지 못하고 자성(子城)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적은 자성으로 쫓겨들어가 성문을 굳게 닫고 방어전태세를 취하였으나 관군은 사기충천하여 외성(外城)을 넘어들어가 불을 사방에 지르고 총공격을 하니 적은 대패하여 두목 김통정(金通精)은 산중으로 도망하였다가 자살하여 죽고 적장 이순공(李順恭)등은 항복하였다. 싸움은 이곳으로 일단락짓고 자성(子城)을 완전점령한 방경은 도내에 방을 붙여 이번 싸움은 반란주모자들을 처 없애자 한것이고 백성들을 해치려한 것이 아니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고 위무하여 도내 민심을 수습하였다. 적의 두목 6인은 길에서 목베이고 그들의 친당(親黨)과 항복한 1천3백여명은 배에 실려 돌아왔다.
몽고군 5백과 고려군 1천을 수비로 제주도에 남겨두고 나주(羅州)로 돌아온것이다. 진도(珍島)공략과 제주(濟州)공략에 두차례나 승리하고 돌아온 방경은 왕의 극진한 개선장군의 환영을 받고 공(功)으로 시중(侍中-지금의 首相)이 되었다.
당시 몽고(蒙古)의 세력은 중원(中原) 4백여주를 손아귀에 넣고 멀리 중앙아세아(中央亞細亞)에까지 미쳤던 때라 고려를 예속시킨 세조(忽必烈)는 다시 일본(日本)을 정복하려고 꾀하였다.
몽고 세조는 고려인 조이(趙彛)의 진언(進言)으로 일본에 사신을 보낼수있다는 말을 듣고 원종(元宗) 7년(AD1266) 8월에 흑적(黑的), 은홍(殷弘)등을 사신으로 일본에 보냈는데 이들은 그해 11월에 고려에 왔고 고려에서는 송군비(宋君斐), 김찬(金贊)등을 안내자로 정하여 같이 가게 하였다. 그러나 일본까지 가지 못하고 그 이듬해 정월에 거제도(巨濟島)에서 되 돌아갔다. 고려에서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송군비(宋君斐)를 몽고사신으로 따라가게 하여 몽고 세조에게 해상위험으로 일본까지 갈수 없다고 상주(上奏)하였으나 세조는 이들을 책망하고 다시 흑적을 고려에 보내어 고려의 관인으로서 일본에 사신보낼 것을 위촉하였다. 고려에서는 하는 수 없이 반부(潘阜)를 사신으로 일본에 보냈는데 반부는 원종 8년 11월 대마도에 이르고 그 이듬해 정월에는 축전(筑前)에 이르러 몽고의 국서방물(國書方物)을 태재부(太宰府)에 바치었다. 일본에서는 가마구라(鎌倉)로 사신을 띄우고 가마구라에서는 경사(京師)로 사신을 보내어 사연을 조정에 알리었다.
몽고의 국서방물을 받은 일본 조야(朝野)는 상하가 소연(騷然)하여 어찌할바를 모르는 국왕은 신년연(新年宴)을 중지하고 각 지방 신사(神社)에는 봉폐를 올리어 국란을 고사(告祠)지내는 한편 관서연해(關西沿海)에 수비를 강화하였다.
원종 12년 정월에 몽고에서는 다시 조량필(趙良弼), 강윤소(康允紹)를 사신으로 일본에 보내어 원(元)나라에 조공할 것을 종용했으나 일본의 집정자 북조시종(北條時宗)은 단연 이를 거절하고 조량필(趙良弼)을 쫓고 서해변, 즉 구주(九州) 방면의 방위를 엄히 하였다.
일본은 앞서 아명종세(我明宗世)에 그 무신 원뢰조(源賴朝)가 가마구라(鎌倉)에 막부(幕府)를 열고 정치를 전재하다가 3대에 적통이 끊어지고 그 처족 북조씨(北條氏)가 대대로 정권을 잡고 집권자가 되었는데 이 때의 집권자인 북조시종(北條時宗)은 몽고국서의 사령이 거만하다하여 답사를 주지 않고 쫓아 보내던 것이다.
몽고는 수년을 두고 일본에 사신을 여러차례 파견하여 조공할 것을 책유하고 한편으로는 군비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원종 14년에는 경상도에서 전함을 만들게 하고 그 이듬해 에는 총관(總管) 찰홀(察忽)을 파견하여 전함 3백척을 조영케 하였다. 그리하여 끝내 일본의 거절을 당한 몽고는 원종 15년 11월에 원장(元將) 흔도(忻都), 홍다구(洪茶丘)가 거느린 몽고군 및 한인군(漢人軍)과 김방경(金方慶)이 거느린 고려군으로 편성한 연합군인 일본 원정군을 일으키었다. 본시는 이해 7월에 출정할 예정이었으나 고려는 6월에 원종(元宗)이 돌아가고 8월에 충렬왕(忠烈王)이 즉위하였기 때문에 연기하여 10월에 출발한 것이다.
앞서 김방경과 홍다구는 일본원정이 결정된 그해 정월부터 전라(全羅), 경상(慶尙), 서해(西海), 동계(東界), 교주(交州)도의 공쟁과 인부 3만 5백명을 동원하여 전라도의 변산(邊山)과 천관산(天冠山)에서 재목을 발취하여 대선, 경쾌선, 급수선 각 3백척을 그 해 6월 하순까지 제조완료 하였다.
원종 15년(AD1274) 10월 3일 합포(合浦-지금의 昌原郡 馬山浦)를 출발한 연합군 3만8천7백명과 전함 9백척으로 편성된 대선단은 3일만에 대마도(對馬島)에 상륙하였다. 대마도 좌수포(佐須浦)를 지키던 적장 조국(助國)은 이를 막을 길이 없어 아들 형제와 함께 전사하고 많은 족인(族人)과 가사(家士)들도 모두 전사하는 틈에 가사(家士) 소태랑(小太郞)과 병위차랑(兵衛次郞)이 도망하여 하가다(博多)에 달려가 급변을 고하였으므로 이를 태재부에 전달하였다. 도내에 불을 질러 소탕전을 완료한 연합군은 14일에 일기도(壹岐島)에 도착하니 적장 경륭(景隆)이 수하병을 거느리고 맞아 싸웠으나 역시 전멸 당하고 말았다.
연합군은 다시 남하하여 구주(九州) 서남단의 비전송포군(肥前松浦郡-지금 長崎縣)을 공략하고 연이어 축전 하가다만(筑前博多灣-福岡縣)에 도착한 것은 19일 이었다. 연합군이 이르는 곳마다 당해내지 못하는 왜병은 궁지에 빠졌으나 결사적으로 기습하여오니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방경장군의 신변에는 장검이 번적거리는 맹렬한 육박전이 벌어져 형세는 매우 위급하였으나 방경장군은 조금도 당황하는 빛이 없고 큰 바퀴와 같이 태연하게 일보도 뒤로 물러서는 일이 없이 큰 소리로 왜적을 꾸짖으니 왜적도 위엄에 눌려 감히 대항하지 못하고 달아났다. 고려군은 역전하여적을 크게 무찌르니 적의 시체는 섬을 덮을 지경이었다.
원(元)의 도원수 흔도(忻都)도 고려군의 전투를 보고 감탄하면서 「몽고군이 싸움에는 익숙하다하나 고려군을 따를 수 없다」고 말하였다.
방경은 원장 흔도(忻都)에게 진언하기를 병법(兵法)에 멀리 나라를 떠나온 군대는 그 사기가 강하여 당해내지 못한다 하였으니 일거에 적진을 무찔러 승리를 거두자 하였으나 원장(元將) 유복형(劉復亨)은 부상을 당하고 먼저 배에 올라 돌아온 뒤로 또 육전에는 익숙하나 수전에 경험이 없는 몽고군인지라 도원수 흔도도 겁을 집어먹고 적은 날로 늘어가고 강화돼가는데 적진에 깊이 들어가는 것은 안전한 전략이라 할 수 없으니 돌아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주장하여 종내 듣지 않았다.
이 싸움에 고려장군 박지량(朴之亮), 김흔(金忻), 조변(趙忭), 이당공(李唐公), 김천록(金天祿), 신혁(申奕)등 격전끝에 전사하였다.
몽고원수 흔도(忻都)도 끝내 김방경의 말을 듣지 않고 회군하여 모두 배로 돌아왔더니 그날밤 해풍이 크게 불어 전함은 태풍에 휘쓸려 전멸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통에 고려 좌군사(左軍使) 김선(金銑)이 익사(溺死)하고 많은 병사를 잃었는데 물에 빠져죽은 자 총수는 1만3천5백명이나 되었다.
일본기록에 보면 21일 여명(黎明) 지하도(志賀島) 해상에는 전함 1척이 있었는데 적장은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그 도졸(徒卒) 2백2십인을 생금하여 수성(水城)에서 참수(斬首)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이 제1차 일본원정으로 성공하지 못하고 돌아온 사실이다.
전후의 고려는 더욱 피폐하여 국민이 도탄에 빠지게 됨에 충렬왕(忠烈王)은 그 이듬해에 김방경을 원나라에 보내어 국가의 정황을 말하기를 지금 고려는 젊은 장정은 많이 전사하고 공역으로 끌려가 노악이 겨우 농사를 지을뿐인데 농사 또한 흉년이 들어 다시는 일본원정에 전선(戰船)과 양미(糧米)를 부담할 수 없다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원세조 홀필렬(忽必烈)은 소지(素地)를 굽히지 않고 고려로 하여금 함선군수(艦船軍需)를 마련케 하고 탐라(濟州道)에 목마장을 두는 한편 충렬왕 원년(元年) 2월에는 두세충(杜世忠), 하문저(何文著), 살로도정(撒魯都丁)을 국사로 하고 고려인 서찬(徐贊)을 향도(嚮道)로 하여 다시 일본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일본 태재부(太宰府)에서는 하늘이 도와 신풍(神風)이 불어 싸움에 이겼다 생각하고 또 왕년의 원한을 잊지 못하여 그해 9월7일 원사(元使) 두세충(杜世忠)등 일행을 가마구라(鎌倉) 농구(籠口)에서 참수하고 병력을 증강하여 해안경비를 한층 강화할 뿐 아니라 전국의 신사(神社)를 동원하여 고사(古祠)를 드리게 하였다.
충렬왕 5년에 남송(南宋)을 정복하여 완전히 중원(中原)을 판도에 넣은 몽고는 그 여세를 뻗쳐 일거에 일본을 항복 받으려고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이란 관부(官府)를 고려에 두고 충렬왕 7년(AD 1281) 5월에 마침내 군사를 동로군(東路軍), 강남군(江南軍) 양군에 나누어 동로군은 전함 900여척에 몽고군 3만과 고려군 1만을 싣고 출발시키니 강남군은 전함 3천5백과 강남병 10만이 합치기로 되었다. 그리하여 동로군은 5월3일 김방경, 흔도 지휘하에 합포(合浦)를 출발하고 강남군은 6월에 송나라 항장(降將) 범문호(範文虎) 지휘하에 영파(寧波)를 출발하였다.
앞서 김방경은 이미 노경에 들어 인퇴할 것을 왕에게 청한 일이 있었던 만큼 방경은 노경이면서 뱃길의 위험을 무릎쓰고 다시 동정(東征)의 길에 올랐던 것이다.
고려 도원수 김방경, 부장 박구(朴球), 김주정(金周鼎)휘하 고려군은 그해 21일 일기(壹岐)를 공략하고 계속해서 무나가다(宗像) 해상으로 진출하여 6월5일 지하도(志賀島), 능고도(能古島)에서 합치어 이 지방을 공략하였다. 일본은 앞서 일차대전의 경험이 있으므로 서해연안에 성축을 높이 쌓고 구주(九州) 가마구라(鎌倉)에 참전한 관동군(關東軍)의 중원군 결사대의 항전으로 지하도(志賀島)지방의 공략은 성공하지 못하고 다시 병력을 비전(肥前)의 응도(鷹島)방면으로 집중하는 한편 고려군의 별동대는 무나가다(宗像)해상으로 나가 장문(長門) 산구현(山口縣)을 공략하여 전선을 확대 하였다.
한편 원나라 도독(都督) 아라환(阿剌罕)이 도중에 병을 얻어 좌승상(左丞相) 아탑해(阿塔海)가 대체했기 때문에 범문호(範文虎)가 지휘하는 강남군의 도착이 늦어지다가 6월 하순에 가서야 일기도(壹岐島)에 도착하였으므로 응도(鷹島)를 중심으로 집결중인 동로군과 합류되어 1개월간으로 일기(壹岐), 평호도(平戶都), 응도(鷹島)로 하가다(博多)만의 근해 해상과 육지에서 공략전을 전개하였다. 또 7개월에는 군사력을 응도(鷹島)로 집결시켜 일대상륙작전을 계획하였으나 적은 각지에서 중원군이 집결되고 필사적으로 대항하므로 전국은 불리하게 되었다. 앞서 강남군이 도착하기 전에 때마침 삼복(三伏)이어서 고염을 이기지 못하는 진중에는 유행병(流行病)이 휘쓸어 3천여명이 병사하니 몽고의 장수들은 누차 회군할 것을 모의하였으나 홀로 김방경장군만은 강경히 싸울 것을 주장하여 몽고장수들도 감히 다시는 말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8월 1일 밤에 강력한 태풍이 또 일어나 연합군 전선은 태풍에 휩쓸려 모조리 부서지고, 깨지고, 뒤집어져서 강남(江南)군은 10만과 몽한군(蒙漢軍) 3만이 익사하고 고려군은 장병 초공(梢工), 수부(水夫) 총원약2만 천명중에서 겨우 1만9천3백9십여명이 생환하였다. 그리하여 양차에 걸친 일본원정은 끝내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김방경장군은 여러번 해전에 참가하여 우리나라 역사상 유명한 수군명장(名將)중의 한 사람이다. -끝-
1962년 4월 일
정훈감(政訓監) 해군대령(海軍大領) 민현식(閔賢植)
<출전> 水軍名將傳 (海軍本部政訓監室發行)
김방경은 안동(安東)사람으로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 후손이다.
고려(高麗) 고종(高宗)때부터 관인(官人)이 되어 삼별초(三別抄)란에 진도(珍島), 탐라(耽羅)를 공격하여 전공을 세우고 몽고(蒙古)에서 일본(日本)을 원정할 때도 두 차례나 고려군의 도원수(都元帥)로 출정하여 크게 전공을 세워 시중(侍中-지금 首相)이 되었다.
방경은 천성이 충직하고 신의가 두터워 구차하게 소절(小節)에 몸을 굽히는 일이 없고 고전(古典)을 많이 알아 지식이 풍부하였다.
十六세때 벌써 식목록사(式目錄事)가 되었는데 시중(侍中) 최종준(崔宗峻)은 그의 성실함을 사랑하여 예로써 그를 대접하고 중요한 일을 모두 맡겼다.
그의 부친은 효인(孝印)이란 사람으로 성품이 엄격하고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과거(科擧)에 급제하고 벼슬은 병부상서(兵部尙書)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다. 방경의 모친이 잉태(孕胎)하였을때 꿈에 여러번 구름이 몸을 싸고 돌았으므로 양친은 이상히 생각하여 「이 애기는 아마 신선(神仙)이 인간에 태어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어려서는 조부(祖父) 민성(敏成)의 집에서 자랐는데 성미에 맞지 않는일이 있으면 길거리라도 가리지 않고 흙바닥에 누웠으나 지나던 우마(牛馬)도 이를 피하여 가므로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방경은 벼슬이 높아져도 항상 사람 대하기를 겸손한 태도로하고 몸 가짐을 검박하고 부지런하여 늙어서도 낮에 눕는 일이 없었다. 한때 나이 늙어 임금에게 은퇴할 것을 말하였더니 왕은 몽고(蒙古)에서 다시 일본을 치게 되면 고려(高麗)에서도 원수(元帥)를 택하여야겠는데 방경이 아니고는 이 자리를 감당할 사람이 없고 또 방경이 아니면 원주(元主)가 인준을 아니할 것이니 연로하나 나라를 위하여 은퇴하지 말라고 한것이나 그후 제이차 일본 원정에 참가하였던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노후에도 건강하였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나이 이미 늙었으나 두발(頭髮)이 희지 않고 춥고 더운때에 병에 걸리는 일이 없었다. 관위(官位)에 있을 때나, 아니 있을 때나 나라를 근심하기를 제집과 같이하여 나라에 일이 벌어지면 왕은 반드시 방경을 불러 의논하였다.
서북면 병마판관(西北面 兵馬判官)이 되었을때 몽고군이 내침(來侵)하니 방경은 여러 고을의 백성들을 위도(韋島)에 피란 시켰다. 위도는 넓이 십여리나 되는 평탄한 들이 있어 농사를 지을수 있으나 바다 밀물이 들어와 개간할 수 없었던 것을 방경은 제방(堤防)을 쌓고 개간하여 농사를 짓게 하였다. 처음 제방을 쌓을 때는 백성들이 고역을 시킨다고 하여 오히려 방경을 원망하였으나 가을이 되어 크게 추수를 하니 모두 살길이 열렸다고 기뻐하였다. 또 섬엔 우물이 없어 늘 육지로 왕래하면서 물을 길러 오기 때문에 가끔 몽고군에게 포로되는 일이 있었는데 방경은 저수지를 만들어 이런 폐단을 없이 하기도 하였다. 방경은 이와 같이 민생을 제도(濟度)하는 경륜도 밝았던 것이다. 왕궁을 지키는 근위장교(近衛將校)가 되어서나,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어서나 법을 지키고 권신(權臣)들에게 조금도 아첨하는 일이 없고 항상 충직한 절개를 간직하고 있었다.
원종十년 권신(權臣) 임연(林衍)은 권신 김준(金俊)을 죽이고 전권하게 되자 몽고에 적의를 품고 재거를 기도하였으나 원종이하 근실들이 친몽(親蒙)책에 기울어져 강도(江都)를 버리고 개성으로 환도하려고 함에 왕을 별실에 가두고 왕제 안경공(安慶公) 창(淐)을 세웠다. 이 소식을 원나라로 부터 돌아오던 원종이 듣고 원 세조(元. 世祖)에게 호소하니 세조는 곧 장수를 보내어 강력한 내정간섭을 하고 고려군신들을 꾸짖었다. 그 사신이 돌아갈 때 방경도 국서를 가지고 같이 원나라에 갔었다. 세자는 세조에게 군사를 청하여 그 세력으로써 본국의 권신을 누르려하였는데 세조는 말하기를 「지금 몽가독군(蒙哥篤軍)이 서경(西京)에 오랫동안 주둔하게 되면 임연(林衍)은 이미 명령을 거역한 자라 반드시 군량(軍糧)을 공급하지 않을테니 세자는 적임자로 하여금 대책을 강구하게 하라」고 하였다. 세자는 누구를 이 일에 맡겨야 잘 처리 해낼는지 몰라 인선(人選)에 애를 쓰고 있을때 시중 이장용(李藏用)은 방경이 아니면 이런 중대사를 맡을 사람이 없다고 하여 세자도 방경을 쓰기로 하였다. 방경은 관군(官軍)이 서경에 도착한 다음 다시 대동강을 건느면 서울에서는 큰 혼란이 일어나 불의의 변이 일어날 것이니 절대로 강을 건너지 말 것을 주장하여 세조의 승낙을 얻었다. 그런데 출동 도중 원종(元宗)이 다시 복위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와 회군하여 대기 하였다.
원의 세조는 서경(西京)에 동녕부(東寧府)를 두고 최단(崔坦)으로 총관(總管)을 삼았다. 이때 방경이 몽고의 장수 몽가독(蒙哥篤)과 서경에 와 있었는데 최단은 몽고군을 이용하여 난을 일으키려고 백방으로 책동하였다. 한편 임연(林衍)은 몽고에 대항하려고 지보대(智甫大)를 시켜 야별초(夜別抄)를 거느리고 황주(黃州)에 주둔하게 하고 신의군(神義軍)으로 하여금 숙도(橚島)에 주둔하게 하였다. 단(坦)등은 이를 알고 몰래 배(船)와 용사를 모아놓고 몽가독에게 말하기를 지금 연(衍)등이 반란을 일으켜 몽고군을 치려고 준비하고 있으니 장군은 사냥간다고 핑계하고 강을 건너 남하하여 고려군의 동향을 살피면 우리는 배로 보음도(甫音島)로 진출하겠으니 장군은 육로로 군사를 거느리고 착량(窄梁)에 나가면 고려군은 해륙 모두 길이 막혀 도망가지 못할 것이라고 충동하여 임연의 야별초군을 칠 것을 획책하였다. 그러나 단(坦)의 호위병으로 있던 오득공(吳得公)이 이 사실을 방경에게 연락하였으므로 방경은 즉시 몽가독 숙소를 찾아갔다. 출동준비를 갖추고있던 몽가독은 방경을 보자 시치미를 떼고 「우리는 무료하고 심심하여 사냥을 나가려는 참이니 같이 아니가겠는가」하고 행동을 감추려고 하였다. 방경은 「어데로 사냥갈 셈이냐?」물으니 「대동강을 건너 황주(黃州)를 거쳐 숙도(橚島)에 가겠다」하였다. 이에 방경은 「세조는 대동강을 넘는 몽고병은 처벌한다는 명을 내린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어찌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강을 건너려 하는가?」하고 강경히 힐책하니 몽가독도 다시는 강을 건널 생각을 못하였다. 이와 같이 방경은 당시의 절대한 권세를 부리는 몽고장군도 억누를 만한 위험을 갖춘 장군이요, 인격자이었던 것이다. 몽가독은 방경의 충직한 인격을 존중하여 서울을 멸하려던 자는 최단뿐이 아니라고 모든 내막을 사실대로 알려 주었다. 만일 몽고군이 출동하였더라면 서울을 점령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니 이를 막은 장군의 공은 나라를 능히 보존할수 있었다. 양차에 걸쳐 북경(北境)을 다스림에 방경장군의 명성(名聲)과 덕망(德望)은 비할 데 없었다.
김방경의 아들 김흔(金忻)과 김순(金恂)은 아버지 방경을 따라 일본원정에 참가하여 공을 세워 김흔은 진국상장군(鎭國上將軍)이 되고 김순은 전중관(殿中官)이 되었으며 사위(壻) 조변(趙忭)도 방경을 따라 일본에 원정하여 공을 세웠다.
김방경(金方慶)의 해상활동은 삼별초(三別抄)의 난을 평정한 진도(珍島)공략과 제주(濟州)공략이고 원장 흔도(忻都, 一名 忽篤)와 함께 2차에 걸쳐 감행한 일본(日本)원정이다.
삼별초(三別抄)의 난이란 고려가 몽고(蒙古)의 침략을 받아 강화도(江華島)로 천도하여 39년 만에 원종(元宗)은 몽고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여 개경(開京)으로 환도한데 반기를 들고 일어난 반동군의 난리인 것이다.
당시 고려국내의 여론은 개경(開京)환도 문제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복잡한 암투가 흐르고 있었다. 지금까지 고식적이기는 하나 일시적 방편으로 몽고와 강화를 지속해오다가 몽고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여 농성하고 있던 강화도를 포기하고 개경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몽고에 아주 굴복하고 마는 것이므로 나라의 체면문제로 정부내의 의견이 일치할수 없었다.
원종(元宗)을 중심으로한 문신(文臣)일파는 대개 환도를 희망하나 임연(林衍)을 중심으로한 무신(武臣)일파는 반대하였다. 즉 임연일파가 반대하는 이유는 강도를 중심으로 때를 따라 몽고에 항쟁을 계속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원종(元宗)은 몽고에 갔다가 개경에 돌아와 이내 환도할 것을 포고하고 강도내의 모든 계급과 기구를 옮길 것을 명하였다. 이에 대하여 삼별초(三別抄)를 중심으로 한 무신일파는 불복의 태도를 취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 삼별초에는 국인으로서 몽고에 잡혀갔다가 도망해온 자를 모아 신의군(神義軍)이란 한 부대를 편성하여 좌.우별초(左右別抄)에 이를 합친 것으로 외적 방위에 상당히 활약하여 몽고에 대한 적의는 매우 강하였다. 그래서 개경에 환도하여 길이 몽고에 굴복하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여기 원종(元宗)이 사람을 강화에 보내어 삼별초를 파하고 그 명부를 빼앗아온 것이 결국은 화근이 되어 반란을 일으킨 원인이 되었다. 그들은 조정이 명부를 몽고에 보내어 삼별초의 관계자를 모조리 죽이려는 것이 아닌가하여 불안과 반발을 일키고 있을때 삼별초의 지휘관인 배중손(裵仲孫)이 몽고병이 강도를 점령하고 인민을 살육하려 한다 하고 개경과의 교통을 끊고 군졸을 격동시켰다. 그리고 배중손등은 왕족 승화후 온(承化候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관부를 설치하여 관리를 임명함으로써 중앙 정부에 대한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도내의 인심은 불안에 휩쓸리고 문.무관중에는 도망하는자, 또는 수졸(守卒)로서 탈출하는 자가 많이 생기므로 배중손등은 하는 수 없이 함선 천여척에 공사재물과 도내의 자녀를 싣고 남으로 진도(珍島)에 내려가 거기를 근거지로 하고 연안 각지를 침공하여 한때는 남해에 한 왕국을 세운 듯 한 감이 있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장군 김방경(金方慶)과 몽고원수 아해(阿海)와 함께 진도의 삼별초군을 치게 하였다. 삼별초군은 나주(羅州)를 포위하고 또 전주(全州)를 공격하여 그 형세가 위급하게 됨에 나주인은 할수 없이 전주인과 항복할 것을 의논하였던바 전주인은 아직 결정짓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는 말을 도중에서 들은 방경은 단기(單騎)로 밤을 새워가며 전주로 달려가 말하기를 「모일(某日)에 1만 병(兵)을 거느리고 입성할터이니 빨리 군량준비를 하라」고 하였다. 전주에서 이 통고를 곧 나주에 전달하니 적은 관군의 대부대가 이르는줄 알고 포위망을 풀고 돌아갔다. 방경은 이와 같이 임기응변하는 기지(機智)도 풍부하였던 것이다.
김방경군은 아해(阿海)군과 함께 삼견원(三堅院)에 주둔하면서 진도의 적과대치하고 있었다. 적은 선함(船艦)이 많고 수상훈련이 잘 되어 행동이 신속하고 날래어 싸움이 있을때 마다 적은 먼저 돌격하여와 관군은 간신히 이를 막을 정도였다. 방경이 진도에 이르니 적은 벌써 배에 올라 각처에다 기를 꽂고 나팔소리, 북소리 요란할 뿐 아니라 육지 성위에는 성원하는 큰 소리 천지를 뒤 흔드는 듯 하였다.
이 활발한 적의 기세에 기가 눌린 아해(阿海)는 겁을 먹고 배에서 뛰어내려 나주로 물러가려고 하였다. 방경은 비겁한 아해의 행동을 보고 「만일 원수가 퇴각하면 적은 우리의 약한 것을 보고 공세를 취할것이니 그 때는 패전의 책임을 누가지겠는냐」고 강경히 말하니 아해도 감히 후퇴하지 못하였다.
역습을 받은 관군은 전세불리하여 몇 겹으로 적의 포위를 당하였다.
방경은 「승패는 오늘에 달렸다」하고 용감하게 앞을 달려 적중에 돌격하니 방경의 부하는 사력을 다하여 싸웠으나 화살이 다 없어지고 또 장병은 모두 중상을 입고 일어날 수 없게 되었다. 배는 바닷물에 밀려 진도 해변가로 들어가니 바닷가에 서있던 한 적졸이 칼을 뽑아들고 선중으로 뛰어 들었다. 김천록(金天錄)이 단창으로 적졸을 찔렀으나 형세 위급함을 본 방경은 적의 손에 죽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하고 바다에 몸을 던져 죽으려 하였다. 부상을 입은 병사들은 방경의 위급한 것을 보고 다시 일어나 아픔을 무릅쓰고 싸울때 장군 양동무(楊東武)가 함대를 몰아쳐 들어왔으므로 겨우 적의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다. 방경이 이와 같이 위기에 처했을지라도 조금도 당황하는기색이 없고 평소와 같이 침착하고 위엄을 잃지 않았다. 또 방경은 천성이 강직하여 불의(不義)에 굴하지 아니하였으니 몽고군의 원수 아해(阿海)가 수전에 임할 때 마다 겁을 집어먹고 싸우지 못하는 것을 원나라 황제에 고발하여 아해를 파면시키고 흔도(忻都)를 후임으로 보내기로 하였다. 몽고 원수 흔도(忻都)가 새로 부임하자 방경은 흔도와 면밀한 작전과 준비를 갖춘 다음 재차 진도 총공격을 개시 하였다. 이때 적은 벽파정(碧波亭)에 집결하고 있었다. 방경은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벽파정으로 처들어가고 좌우(左右)군 도합 백여척도 일제히 처들어가니 준비를 소홀히 하고 있던 적은 중군을 막으려 하였으나 원장(元將) 홍다구(洪茶丘)가 불을 지르며 협공하여 적의 진지는 무너지고 크게 패하여 도망하였다.
진도를 점령한 방경은 쌀 4천석과 보물, 무기등 많은 전리품을 얻었으나 전부 서울로 보내고 양민(良民)으로서 적에 잡혔던 자는 모두 석방시켜 집으로 돌아가게 하니 도내 인심이 모두 방경에게로 돌아왔다.
적은 이 싸움에 대패하고 제주도(濟州道)로 도망하여 거기에다 진지(陣地)를 구축하였다. 성을 내성과 외성 두겹으로 든든히 쌓고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진지를 구축한 것이다.
진도에서 도망하여 올때에 적의 일당 가족외에 수많은 도민을 배에 싣고 왔으므로 적의 세력은 홀만히 볼 수 없었으며 또 적의 행동은 극히 대담하고 활발하였다. 본토(本土) 육지로 건너와 양민의 재산으로 자심하니 약탈하여 남해 연안일대는 백성들이 모두 피란가고 촌락은 황폐하였다.
그들은 남해연안일대 뿐만아니라 영남(嶺南)을 지나 경기(京畿)지방까지 들어와 마음대로 노략질을 감행하여 도로는 끊어지고 인심은 흉흉하였다.
왕은 다시 김방경(金方慶)을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로 임명하여 제주도를 근거지로 하고 차츰 그 세력이 커져가는 삼별초(三別抄) 잔당을 토벌하게 하였다.
방경은 다시 수군을 정비하고 육군을 훈련시켜 1만여명으로 제주(濟州)공략을 시작하였다. 방경의 관군이 제주도에 이름에 적은 요소에 복병(伏兵)을 하고 필사의 기세로 대항하였다. 그러나 방경은 대정(隊正) 고세화(高世和)를 선두로하고 장군 나유(羅裕)를 후군으로하여 전군을 몰아 돌격하니 적은 진지를 버리고 후퇴하였다. 이때 좌군(左軍)전함 30척이 비양도(飛揚島)로부터 직접 적진으로 처들어가니 적은 당해내지 못하고 자성(子城)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적은 자성으로 쫓겨들어가 성문을 굳게 닫고 방어전태세를 취하였으나 관군은 사기충천하여 외성(外城)을 넘어들어가 불을 사방에 지르고 총공격을 하니 적은 대패하여 두목 김통정(金通精)은 산중으로 도망하였다가 자살하여 죽고 적장 이순공(李順恭)등은 항복하였다. 싸움은 이곳으로 일단락짓고 자성(子城)을 완전점령한 방경은 도내에 방을 붙여 이번 싸움은 반란주모자들을 처 없애자 한것이고 백성들을 해치려한 것이 아니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고 위무하여 도내 민심을 수습하였다. 적의 두목 6인은 길에서 목베이고 그들의 친당(親黨)과 항복한 1천3백여명은 배에 실려 돌아왔다.
몽고군 5백과 고려군 1천을 수비로 제주도에 남겨두고 나주(羅州)로 돌아온것이다. 진도(珍島)공략과 제주(濟州)공략에 두차례나 승리하고 돌아온 방경은 왕의 극진한 개선장군의 환영을 받고 공(功)으로 시중(侍中-지금의 首相)이 되었다.
당시 몽고(蒙古)의 세력은 중원(中原) 4백여주를 손아귀에 넣고 멀리 중앙아세아(中央亞細亞)에까지 미쳤던 때라 고려를 예속시킨 세조(忽必烈)는 다시 일본(日本)을 정복하려고 꾀하였다.
몽고 세조는 고려인 조이(趙彛)의 진언(進言)으로 일본에 사신을 보낼수있다는 말을 듣고 원종(元宗) 7년(AD1266) 8월에 흑적(黑的), 은홍(殷弘)등을 사신으로 일본에 보냈는데 이들은 그해 11월에 고려에 왔고 고려에서는 송군비(宋君斐), 김찬(金贊)등을 안내자로 정하여 같이 가게 하였다. 그러나 일본까지 가지 못하고 그 이듬해 정월에 거제도(巨濟島)에서 되 돌아갔다. 고려에서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송군비(宋君斐)를 몽고사신으로 따라가게 하여 몽고 세조에게 해상위험으로 일본까지 갈수 없다고 상주(上奏)하였으나 세조는 이들을 책망하고 다시 흑적을 고려에 보내어 고려의 관인으로서 일본에 사신보낼 것을 위촉하였다. 고려에서는 하는 수 없이 반부(潘阜)를 사신으로 일본에 보냈는데 반부는 원종 8년 11월 대마도에 이르고 그 이듬해 정월에는 축전(筑前)에 이르러 몽고의 국서방물(國書方物)을 태재부(太宰府)에 바치었다. 일본에서는 가마구라(鎌倉)로 사신을 띄우고 가마구라에서는 경사(京師)로 사신을 보내어 사연을 조정에 알리었다.
몽고의 국서방물을 받은 일본 조야(朝野)는 상하가 소연(騷然)하여 어찌할바를 모르는 국왕은 신년연(新年宴)을 중지하고 각 지방 신사(神社)에는 봉폐를 올리어 국란을 고사(告祠)지내는 한편 관서연해(關西沿海)에 수비를 강화하였다.
원종 12년 정월에 몽고에서는 다시 조량필(趙良弼), 강윤소(康允紹)를 사신으로 일본에 보내어 원(元)나라에 조공할 것을 종용했으나 일본의 집정자 북조시종(北條時宗)은 단연 이를 거절하고 조량필(趙良弼)을 쫓고 서해변, 즉 구주(九州) 방면의 방위를 엄히 하였다.
일본은 앞서 아명종세(我明宗世)에 그 무신 원뢰조(源賴朝)가 가마구라(鎌倉)에 막부(幕府)를 열고 정치를 전재하다가 3대에 적통이 끊어지고 그 처족 북조씨(北條氏)가 대대로 정권을 잡고 집권자가 되었는데 이 때의 집권자인 북조시종(北條時宗)은 몽고국서의 사령이 거만하다하여 답사를 주지 않고 쫓아 보내던 것이다.
몽고는 수년을 두고 일본에 사신을 여러차례 파견하여 조공할 것을 책유하고 한편으로는 군비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원종 14년에는 경상도에서 전함을 만들게 하고 그 이듬해 에는 총관(總管) 찰홀(察忽)을 파견하여 전함 3백척을 조영케 하였다. 그리하여 끝내 일본의 거절을 당한 몽고는 원종 15년 11월에 원장(元將) 흔도(忻都), 홍다구(洪茶丘)가 거느린 몽고군 및 한인군(漢人軍)과 김방경(金方慶)이 거느린 고려군으로 편성한 연합군인 일본 원정군을 일으키었다. 본시는 이해 7월에 출정할 예정이었으나 고려는 6월에 원종(元宗)이 돌아가고 8월에 충렬왕(忠烈王)이 즉위하였기 때문에 연기하여 10월에 출발한 것이다.
앞서 김방경과 홍다구는 일본원정이 결정된 그해 정월부터 전라(全羅), 경상(慶尙), 서해(西海), 동계(東界), 교주(交州)도의 공쟁과 인부 3만 5백명을 동원하여 전라도의 변산(邊山)과 천관산(天冠山)에서 재목을 발취하여 대선, 경쾌선, 급수선 각 3백척을 그 해 6월 하순까지 제조완료 하였다.
원종 15년(AD1274) 10월 3일 합포(合浦-지금의 昌原郡 馬山浦)를 출발한 연합군 3만8천7백명과 전함 9백척으로 편성된 대선단은 3일만에 대마도(對馬島)에 상륙하였다. 대마도 좌수포(佐須浦)를 지키던 적장 조국(助國)은 이를 막을 길이 없어 아들 형제와 함께 전사하고 많은 족인(族人)과 가사(家士)들도 모두 전사하는 틈에 가사(家士) 소태랑(小太郞)과 병위차랑(兵衛次郞)이 도망하여 하가다(博多)에 달려가 급변을 고하였으므로 이를 태재부에 전달하였다. 도내에 불을 질러 소탕전을 완료한 연합군은 14일에 일기도(壹岐島)에 도착하니 적장 경륭(景隆)이 수하병을 거느리고 맞아 싸웠으나 역시 전멸 당하고 말았다.
연합군은 다시 남하하여 구주(九州) 서남단의 비전송포군(肥前松浦郡-지금 長崎縣)을 공략하고 연이어 축전 하가다만(筑前博多灣-福岡縣)에 도착한 것은 19일 이었다. 연합군이 이르는 곳마다 당해내지 못하는 왜병은 궁지에 빠졌으나 결사적으로 기습하여오니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방경장군의 신변에는 장검이 번적거리는 맹렬한 육박전이 벌어져 형세는 매우 위급하였으나 방경장군은 조금도 당황하는 빛이 없고 큰 바퀴와 같이 태연하게 일보도 뒤로 물러서는 일이 없이 큰 소리로 왜적을 꾸짖으니 왜적도 위엄에 눌려 감히 대항하지 못하고 달아났다. 고려군은 역전하여적을 크게 무찌르니 적의 시체는 섬을 덮을 지경이었다.
원(元)의 도원수 흔도(忻都)도 고려군의 전투를 보고 감탄하면서 「몽고군이 싸움에는 익숙하다하나 고려군을 따를 수 없다」고 말하였다.
방경은 원장 흔도(忻都)에게 진언하기를 병법(兵法)에 멀리 나라를 떠나온 군대는 그 사기가 강하여 당해내지 못한다 하였으니 일거에 적진을 무찔러 승리를 거두자 하였으나 원장(元將) 유복형(劉復亨)은 부상을 당하고 먼저 배에 올라 돌아온 뒤로 또 육전에는 익숙하나 수전에 경험이 없는 몽고군인지라 도원수 흔도도 겁을 집어먹고 적은 날로 늘어가고 강화돼가는데 적진에 깊이 들어가는 것은 안전한 전략이라 할 수 없으니 돌아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주장하여 종내 듣지 않았다.
이 싸움에 고려장군 박지량(朴之亮), 김흔(金忻), 조변(趙忭), 이당공(李唐公), 김천록(金天祿), 신혁(申奕)등 격전끝에 전사하였다.
몽고원수 흔도(忻都)도 끝내 김방경의 말을 듣지 않고 회군하여 모두 배로 돌아왔더니 그날밤 해풍이 크게 불어 전함은 태풍에 휘쓸려 전멸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통에 고려 좌군사(左軍使) 김선(金銑)이 익사(溺死)하고 많은 병사를 잃었는데 물에 빠져죽은 자 총수는 1만3천5백명이나 되었다.
일본기록에 보면 21일 여명(黎明) 지하도(志賀島) 해상에는 전함 1척이 있었는데 적장은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그 도졸(徒卒) 2백2십인을 생금하여 수성(水城)에서 참수(斬首)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이 제1차 일본원정으로 성공하지 못하고 돌아온 사실이다.
전후의 고려는 더욱 피폐하여 국민이 도탄에 빠지게 됨에 충렬왕(忠烈王)은 그 이듬해에 김방경을 원나라에 보내어 국가의 정황을 말하기를 지금 고려는 젊은 장정은 많이 전사하고 공역으로 끌려가 노악이 겨우 농사를 지을뿐인데 농사 또한 흉년이 들어 다시는 일본원정에 전선(戰船)과 양미(糧米)를 부담할 수 없다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원세조 홀필렬(忽必烈)은 소지(素地)를 굽히지 않고 고려로 하여금 함선군수(艦船軍需)를 마련케 하고 탐라(濟州道)에 목마장을 두는 한편 충렬왕 원년(元年) 2월에는 두세충(杜世忠), 하문저(何文著), 살로도정(撒魯都丁)을 국사로 하고 고려인 서찬(徐贊)을 향도(嚮道)로 하여 다시 일본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일본 태재부(太宰府)에서는 하늘이 도와 신풍(神風)이 불어 싸움에 이겼다 생각하고 또 왕년의 원한을 잊지 못하여 그해 9월7일 원사(元使) 두세충(杜世忠)등 일행을 가마구라(鎌倉) 농구(籠口)에서 참수하고 병력을 증강하여 해안경비를 한층 강화할 뿐 아니라 전국의 신사(神社)를 동원하여 고사(古祠)를 드리게 하였다.
충렬왕 5년에 남송(南宋)을 정복하여 완전히 중원(中原)을 판도에 넣은 몽고는 그 여세를 뻗쳐 일거에 일본을 항복 받으려고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이란 관부(官府)를 고려에 두고 충렬왕 7년(AD 1281) 5월에 마침내 군사를 동로군(東路軍), 강남군(江南軍) 양군에 나누어 동로군은 전함 900여척에 몽고군 3만과 고려군 1만을 싣고 출발시키니 강남군은 전함 3천5백과 강남병 10만이 합치기로 되었다. 그리하여 동로군은 5월3일 김방경, 흔도 지휘하에 합포(合浦)를 출발하고 강남군은 6월에 송나라 항장(降將) 범문호(範文虎) 지휘하에 영파(寧波)를 출발하였다.
앞서 김방경은 이미 노경에 들어 인퇴할 것을 왕에게 청한 일이 있었던 만큼 방경은 노경이면서 뱃길의 위험을 무릎쓰고 다시 동정(東征)의 길에 올랐던 것이다.
고려 도원수 김방경, 부장 박구(朴球), 김주정(金周鼎)휘하 고려군은 그해 21일 일기(壹岐)를 공략하고 계속해서 무나가다(宗像) 해상으로 진출하여 6월5일 지하도(志賀島), 능고도(能古島)에서 합치어 이 지방을 공략하였다. 일본은 앞서 일차대전의 경험이 있으므로 서해연안에 성축을 높이 쌓고 구주(九州) 가마구라(鎌倉)에 참전한 관동군(關東軍)의 중원군 결사대의 항전으로 지하도(志賀島)지방의 공략은 성공하지 못하고 다시 병력을 비전(肥前)의 응도(鷹島)방면으로 집중하는 한편 고려군의 별동대는 무나가다(宗像)해상으로 나가 장문(長門) 산구현(山口縣)을 공략하여 전선을 확대 하였다.
한편 원나라 도독(都督) 아라환(阿剌罕)이 도중에 병을 얻어 좌승상(左丞相) 아탑해(阿塔海)가 대체했기 때문에 범문호(範文虎)가 지휘하는 강남군의 도착이 늦어지다가 6월 하순에 가서야 일기도(壹岐島)에 도착하였으므로 응도(鷹島)를 중심으로 집결중인 동로군과 합류되어 1개월간으로 일기(壹岐), 평호도(平戶都), 응도(鷹島)로 하가다(博多)만의 근해 해상과 육지에서 공략전을 전개하였다. 또 7개월에는 군사력을 응도(鷹島)로 집결시켜 일대상륙작전을 계획하였으나 적은 각지에서 중원군이 집결되고 필사적으로 대항하므로 전국은 불리하게 되었다. 앞서 강남군이 도착하기 전에 때마침 삼복(三伏)이어서 고염을 이기지 못하는 진중에는 유행병(流行病)이 휘쓸어 3천여명이 병사하니 몽고의 장수들은 누차 회군할 것을 모의하였으나 홀로 김방경장군만은 강경히 싸울 것을 주장하여 몽고장수들도 감히 다시는 말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8월 1일 밤에 강력한 태풍이 또 일어나 연합군 전선은 태풍에 휩쓸려 모조리 부서지고, 깨지고, 뒤집어져서 강남(江南)군은 10만과 몽한군(蒙漢軍) 3만이 익사하고 고려군은 장병 초공(梢工), 수부(水夫) 총원약2만 천명중에서 겨우 1만9천3백9십여명이 생환하였다. 그리하여 양차에 걸친 일본원정은 끝내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김방경장군은 여러번 해전에 참가하여 우리나라 역사상 유명한 수군명장(名將)중의 한 사람이다. -끝-
1962년 4월 일
정훈감(政訓監) 해군대령(海軍大領) 민현식(閔賢植)
<출전> 水軍名將傳 (海軍本部政訓監室發行)
댓글목록
김종태님의 댓글
![]() |
김종태 |
---|---|
작성일 |
음! 중시조 할아버님이 대단한 분이셨군요! 더구나 대양수군의 명장이셨다니....뭉클합니다.
김정중님의 댓글
![]() |
김정중 |
---|---|
작성일 |
대마도,하까다,떼제부. 작년 재작년 할아버님을 생각하며 다녀온 길 기억이 새롭습니다
관리자님의 댓글
![]() |
관리자 |
---|---|
작성일 |
귀한 자료 구하셨습니다. 수군명장전도 있었다니--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홈에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