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통감,여사제강,동사강목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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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8-04-08 13:46 조회1,745회 댓글0건본문
壬申年(1212) [강종 원년]<1세>
김방경(金方慶)은 안동부(安東府) 회곡동(檜谷洞)에서 아버지 병부상서(兵部尙書) 한림학사(翰林學士) 김효인(金孝印)과 어머니 금관국대부인(金官國大夫人) 금녕송씨(金寧宋氏)와의 3남2녀중 장자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그를 잉태 했을 때 가끔 안개 구름속에 싸이는 꿈을 꾸어 사람들에게 “운기(雲氣)가 항상 코와 입에 닿으니, 아들이 반드시 신선가운데에서 점지해 나오려는 듯하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랄 때는 할아버지 김민성(金敏成)의 보살핌을 받았는데, 혹 자기 의사를 거슬리는 일이라도 있으면 으레 땅바닥에 뒹굴면서 울었는데 소나 말이 도리어 무서워하며 김방경을 피해서 지나갔다 하니 그 성품을 짐작할 만하다.
癸酉年(1213) [강종 2년]<2세>
8월: 고려 고종이 즉위 하였다.
한편 대륙에서는 새로 몽고가 일어나 거란과 대치 하였다. 거란은 그동안 고려를 무수히 짓밟아왔던 숙적이었다. 따라서 고려의 외교노선은 몽고와 거란 사이에 갈등하게 되었다.
己卯年(1219) [고종 6년]<8세>
1월: 몽고군이 거란의 모든 성을 처부수고 마지막으로 강동성(江東城)을 칠 때 고려의 서북면 원수 조충(趙沖)이 몽고의 요구에 의하여 몽고군과 합세하여 강동성을 합락하였다.
丁亥年(1227) [고종 14년]<16세>
김방경(金方慶)이 산원겸 식목록사(散員兼式目錄事)로 관직을 시작 하였다.
辛卯年(1231) [고종 18년]<20세>
김방경(金方慶)이 서북면 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에 임명 되었다.
고려는 무신들의 장기 독재 집권으로 피폐할 대로 피폐해 있었고, 농민들은 굶주리다 못해 민란을 일으키고, 문인들은 세상의 뜻을 잃고 허탈상태에 잠겨들어 갔다.
이때에 몽고에서 살리타이(撒禮塔)에 의하여 드디어 제1차 고려 침공을 감행하였다.
壬辰年(1232) [고종 19년]<21세>
6월: 임시 수도를 강화(江華)로 옮겼다. 약10만에 이르는 개경의 민호(民戶)는 강제로 강화도로 옮기고, 강화도 천도가 적의의 표시가 되어 이해 가을 몽고의 살리타이는 대군을 이끌고 제2차 고려 침공을 감행하였다. 이때에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 타버렸다. 그러나 수전에 미숙한 몽고군은 천형의 요새지인 강도를쳐들어가지 못하고, 내륙지방을 짓밟을대로 짓밟아 엄청난 참상을 당하였다. 살리타이는 처인성(處仁城)에서 사살되었다.
戊申年(1248) [고종35년, 몽고정종3년]<37세>
3월: 북계병마사(北界兵馬使) 노연(盧演)에게 명하여 북계의 여러 성(城)에 있는 백성들을 모두 옮기어 해도(海島)로 들어가게 하였다. 안북부(安北府)에 위도(葦島)라는 곳은 10여 리(里)나 되는 평탄하고 넓은 곳이 있었지만, 바다의 조수(潮水)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는데, 병마판관(兵馬判官) 김방경(金方慶)이 백성들을 시켜 제방을 쌓고 개간(開墾)하여 종자를 뿌리게 하니, 백성들이 처음에는 괴로워 하였으나, 가을이 되자 크게 풍년이 들었으므로 백성들이 그 힘으로 살아나게 되었다. 또한 섬에는 우물이 없어 물길러 간 자가 때때로 몽고병에 사로잡혀 가므로 김방경이 둑을 쌓아 빗물을 저장하여 못을 만들어 여름에는 끌어 물을 긷고, 겨울에는 어름을 뜨게하니 그 걱정이 드디어 사라지게 되어, 사람들이 그의 지혜에 탄복하였다.
庚申年(1260) [원종1년, 몽고중통1년]<49세>
3월: 태손(太孫)이 옛 서울 개경에 환도(還都)하고자 궁궐을 짓기 시작하였다. 대장군 김방경(金方慶)과 장군 김승준(金承俊)등을 출배별감(出排別監)으로 삼아, 창고의 쌀 6천 4백 20휘(角斗)를 꺼내어서, 제왕(諸王)과 백관들에게 나누어 주어, 서울에 집을 짓는 비용에 보태게 하였다.
癸亥年(1263) [원종4년, 몽고중통4년]<52세>
12월: 김방경(金方慶)을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삼았다. [김방경은 법을 지켜 흔들리지 않았고 풍절(風節)이 늠름하였다.] <麗史制綱>
방경은 안동인(安東人)인데, 성품이 엄격하고 굳세어 젊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다. 일찍이 감찰어사(感察御史)가 되어 우창(右倉)을 감독하였는데 청탁이 행하여지지 않았다. 재상(宰相)이 권신(權臣)에게 참소하기를, “지금 어사는 전의 어사가 봉공(奉公)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였다. 때마침 방경이 이르자 권신이 힐책하니, 대답하기를, “전의 어사와 같도록 하려면 나도 또한 그렇게 할 수는 있다. 나는 나라의 창고를 쌓는 것이 요긴하지 여러 사람의 비위를 맞출수는 없다.” 하니, 참소한 사람이 크게 부끄러워 하였다. 견룡행수(牽龍行首)가 되었을 때 금위군(禁衛軍)이 권문(權門)에 다투어 아부 하느라고 숙위(宿衛)가 몹시 게을러지니, 방경이 이에 분노하여 비록 병이 있었으나 휴가를 청하지 아니하였다. 어사대에 들어와서는 법을 지키고 아부하지 않아서 풍채와 절개가 늠름하였다. <東史綱目>
乙丑年(1265) [원종6년 몽고지원2년]<54세>
김방경(金方慶)을 형부상서(刑部尙書)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삼았다.
戊辰年(1268) [원종9년, 몽고지원5년]<57세>
2월: 북계(北界) 40여 성(城)이 글을 올려서 김방경(金方慶)이 이 지역에 다시 와서 진무(鎭撫)하기를 청하니, 왕이 김방경을 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 북계병마사(北界兵馬使)로 삼았다.
방경이 앞서 북계를 진수(鎭守)하면서 백성에게 유애(遺愛)가 있었기 때문이다.<麗史提綱>
己巳年(1269년) [원종10년, 몽고지원6년]<58세>
9월: 임연(林衍)이 추밀원 부사 김방경(金方慶)을 보내어 몽고에 가게 하였는데, 배신(陪臣)의 표문(表文)을 올리기를, “전왕(前王)이 질병에 걸려 크게 위독하므로, 장차 분수를 지켜 목숨을 연장하려고 하여, 간절히 영화를 사양하고 왕위에서 물러 났습니다. 또한 형이 왕위를 사양할 때에는 그 아우에게 전하라는 것은 선왕(先君)의 유언이었고, 또 이 번국(藩國)의 왕위를 하루라도 비워 두기가 어렵습니다. 국왕 왕창(王 )은 진실로 부왕(父王)의 명령을 거슬리거나 신자(臣子)의 상도(常道)에 어긋날까 두려워 하여, 이에 어쩔수 없이 임시로 국사를 맡아보고, 문득 그 사유를 자세히 써서 서둘러서 아뢰는 바입니다.” 하였다.
12월: 유천우(兪千遇)를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김방경(金方慶)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삼았다.
처음에, 천우가 좌승선(左承宣)이 되어 오래 정병(政柄: 관리임명권)을 잡았으므로 사대부(士大夫)가 다 따라붙었다. 방경이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있을적에 길에서 그를 만나 말을 탄채로 읍(揖)하였다. 천우가 말하기를, “나는 명을 받든 몸이라, 3품 이하는 다 은피(隱避)하는데, 그대는 어찌 그러하오?” 하니, 방경이 말하기를, “그대와 나는 다 3품이나 그대가 조삼(早衫) 차림의 명을 받든 몸이니, 내가 예를 행하고자 할 따름이오.” 하여 오래도록 서로 따지다가 방경이, “해가 저물었소.” 하고, 하고 먼저 갔는데, 천우가 이 때문에 유감을 품었다. 그래서 방경의 친족으로 벼슬을 구하는 자는 다 억제 하였으나, 방경은 개의하지 않았다. 뒤에 진도(珍島)를 공격할 때에 천우의 전장(田庄)이 장사(長沙)에 있었으나 방경은 요란 피우지 말라고 경계하였다.<東史綱目>
庚午年(1270) [원종11년, 몽고지원7년]<59세>
봄 정월: 몽고에서 몽가독(蒙哥篤)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서경(西京)에 주둔하게 하였다. 처음에 세자(世子)가 임연(林衍)의 변란소식을 듣고 몽고 군사를 청하니, 몽고에서 바로 몽가독을 파견하여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장차 떠나려고 하는데,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서 세자에게 이르기를, “몽가독이 만약 오랫동안 서경에 머물고 있으면, 임연이 이미 황제의 명령을 배반 하였으니, 반드시 군량미를 공급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땅히 임연과 내통하지 않을 사람을 뽑아서 함께 가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세자가 그 인선(人選)을 어렵게 여기니, 시중 이장용(李藏用)등이 말하기를, “김방경(金方慶)이 두번 북계(北界)의 진무사(鎭撫使)가 되어 백성들에게 남긴 은혜가 있으니, 이 사람이 아니면 불가 합니다.” 하였다. 이에 김방경에게 몽가독을 동반하여 가게 하였다. 김방경이 계책을 말하기를, “몽고 관군(官軍)이 서경에 이르러 만약 대동강(大同江)을 건너면, 왕경(王京)이 저절로 혼란하여져 장차 변란이 일어날까 두려우니, 황제의 분부를 받아서 대동강을 건너지 말게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하니, 모두 말하기를, “좋습니다.” 하므로, 마침내 황제에게 아뢰니, 황제가 이것을 윤허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김방경이 몽가독과 함께 서경에 이르니, 부로(父老)들이 울면서 김방경에게 말 하기를, “공이 만약 여기 있었다면 어찌 최탄(崔坦)과 한신(韓愼)의 일이 있었겠습니까?” 하고, 다투어 와서 음식을 대접 하였다. 이때에 최탄 등은 몽고 군사에게 의지하여 속으로 고려가 허약한 틈을 타서 나라를 방탄할 뜻이 있어서, 몽가독을 후하게 대접하고 날마다 간사한 계략으로 꾀었으나, 김방경이 언제나 계책을 내어 이를 저지 시켰다. 임연은 왕이 몽고 군사를 청하여 옛 서울 개경을 회복할까 염려해서, 황제의 명령을 거역 하고자 하여, 지유(指諭) 지보대(智甫大)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황주(黃州)에 주둔 하게 하였고, 또 신의군(神義軍:三別抄의 하나)으로 하여금 초도(椒島)에 주둔하여 방비 하게 하였다. 최탄과 한신 등이 그 음모를 알고 비밀히 배(舟楫)와 복병(伏兵)을 갖추고, 남몰래 몽가독에게 이르기를, “임연 등이 장차 몽고 관군을 죽이고 제주도(濟州島)에 들어 가려고 하니, 청컨대, 관인(官人)께서 나가서 사냥한다고 말을 퍼뜨리고서 고려 경군(京軍)의 왕래하는 상황을 살펴서 서로 보고하게 하면 우리들은 수군(舟師)으로 보음도(甫音島). 말도(末島)에 진군하고, 관인께서는 군사를 거느리고 착량(窄梁)에 나가면, 저들이 능히 나아가지도 못하고 물러 가지도 못할 것 입니다. 그 정상을 알아낸 다음에 황제에게 자세히 아뢴다면, 왕경(王京)을 빼앗을 수 있으며, 고려의 자녀(子女)와 옥백(玉帛)을 다른 놈들이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몽가독이 기뻐하면서 허락 하였다. 오득공(吳得公)이란 자가 최탄의 내상(內廂)으로 있었는데, 그것을 알고 비밀히 김방경에게 고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어찌 이런일이 있을수 있겠는가?”하니 오득공이 말하기를, “만약 믿지 못하시겠거든, 남몰래 정찰해 보시면 알 것입니다.” 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김방경이 몽가독의 관문(館門)에 나아가니, 여러 군사들이 모두 모이고 최탄 등이 기뻐하는 빛이 있는 것 같았다. 몽가독이 김방경에게 이르기를, “객지에 오래 있어서 무료하므로, 사냥이나 즐기겠는데, 공은 나를 따르지 않으시겠 습니까?” 하였다. 김방경이, “어느 곳에서 사냥할 겁니까?” 하니 몽가독이, “대동강을 건너서 황주(黃州), 봉주(鳳州)에 이르러 초도(椒島)까지 들어 가겠습니다.” 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관인(官人)께서 황제의 분부를 들었을 터인데, 어찌 강을 건너려 하십니까?” 하니 몽가독이 말하기를, “몽고사람이 활쏘고 사냥하는 것을 일삼는 것은 황제께서도 또한 알고 계신데, 그대가 어찌 이를 막는다는 말입니까?” 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내가 사냥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대동강을 건너가는 것을 금지할 뿐입니다. 만약 관인께서 사냥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어찌 반드시 강을 건너 저쪽으로 간 다음이라야 즐겁다는 말입니까?” 하였다. 몽가독이 말하기를, “만약 대동강을 건넜다고 죄를 받는다면 내가 혼자 당할 터인데, 그대에게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까?” 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내가 여기에 있는데, 관인께서 어떻게 강을 건너 갈수있다는 말입니까? 만약 건너고 싶거든, 반드시 황제의 명령을 품신(稟申)해야 할것입니다.” 하였다. 김방경이 비밀히 지보대등을 타일러서 군사를 후퇴 시키도록 하였다. 몽가독은 김방경의 충성과 정직이 천성에서 나오는것임을 알고 크게 그를 공경하고 중하게 여겨서, 사실대로 고하기를, “고려 왕경(王京)을 멸망시키고자 하는 사람은 최탄의 무리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였다.
6월: 김방경(金方慶)을 역적 추토사(逆賊追討使)로 삼아, 군사 6천여 인을 거느리고 몽고 송만호(宋萬戶)등의 군사 1천여 인과 함께 삼별초(三別抄)를 추적하게 하였다.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러 적선이 영흥도(靈興島: 지금의 南陽)에 정박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김방경이 이를 공격하려고 하니, 송만호가 두려워 하여 이를 만류 하였는데, 적은 이에 도망 하였다. 적중(賊中)으로부터 도망하여 돌아온 자가 남녀노소 모두 1천여 인이나 되었는데, 송만호가 ‘적의 도당’이라 하여 모두 사로 잡아 가지고 돌아갔다.
방경이 돌려보내 주기를 행성(行省)에 청하였으나 돌아오지 않은 자가 많았다.<東史綱目>
9월: 김방경(金方慶)이 몽고원수 아해(阿海)와 함께 군사 1천 명을 이끌고 진도(珍島)를 토벌 하였는데, 이때에 적의 기세가 매우 성하여 여러 주.군(州郡)이 멀리서 바라만 보고도 맞이하여 항복 하였다. 적이 장차 나주에 이르려고 하자, 부사(副使) 박부(朴浮)등이 망설이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니, 나주 향리(鄕吏) 정지려(鄭之呂)가 분개하여 말하기를, “만약 성에 올라가서 굳게 지키지 못한다면, 차라리 산골짜기로 군사를 피할 것이지 무슨 면목으로 고을의 수리(首吏)가 되어서 나라를 배반하고 적을 따르겠다는 말입니까?” 하였다. 사록(司錄) 김응덕(金應德)은 성품이 본래 용감 하였는데, 그 말을 듣고 분연히 성을 지키기로 뜻을 결정하고 금성산(錦城山)에 들어가서 지키면서, 가시나무를 꽂아 목책(木柵)을 만들고 군졸을 거느리고 독려 하였다. 적이 포위하고 공격하자, 상처를 싸매고 결사적으로 지키니, 적이 무릇 이렛 동안 밤낮으로 성을 쳤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고을 사람 김서(金敍). 정원기(鄭元器). 정윤(鄭允)등이 와서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니, 왕이 가상하게 여겨서 김응덕에게 7품 벼슬을, 김서 등에게 섭오위(攝伍尉) 벼슬을 내려 주었고, 또 미곡을 내려 주었다. 처음에 적들이 나주를 포위하고 군사를 나누어 전주를 치니, 나주 사람들이 전주 사람들과 항복할 것을 논의 하였으나, 전주 사람들이 또한 망설였는데, 김방경(金方慶)이 도중에서 이 말을 듣고 군사를 버리고 갈길을 재촉하여 남쪽으로 가서 먼저 전주에 통첩하기를, “아무 날에 마땅히 1만 명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고을에 들어갈 것이니, 곧 군량미를 준비하고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다. 전주에서 그 통첩을 나주에 보이니 적이 이 소문을 듣고 드디어 포위를 풀고 가버렸다. 이 뒤로부터 적은 다시 여러 고을을 함부로 노략질 하지 못하였다. 김방경이 탄핵하여 아뢰기를, “토적사(討賊使) 상장군 변윤(邊胤), 장군 조자일(曹子一), 공유(孔愉)는 적이 금성(錦城)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 구원하지 않았으니, 섬에 유배시키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왕이 용서하고 삭직(削職)에만 그쳤다. 공유는 환관과 서로 결탁한 때문에 죄를 면할수 있었다.
겨울 11월: 김방경(金方慶)이 아해(阿海)와 함께 삼견원(三堅院)에 주둔하여, 진도(珍島)를 마주보고 진을 쳤다. 적은 그들이 약탈한 배들에다 모두 괴수(怪獸)를 그렸는데, 강을 가리우고 물에 비치어 배가 움직이면서 굴러가는 것이 마치 날아가는 듯하여, 능히 감당할 수가 없는 형세였다. 매번 싸울적 마다 적군(賊軍)들이 먼저 북을 둥둥 울리고 돌진하여 서로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면서, 여러날 동안 서로 버티었다. 마침 반남(潘南) 사람 홍찬(洪贊) 등이 적중(賊中)으로부터 도망하여 돌아와서 말하기를, “김방경. 공유(孔愉) 등이 남몰래 적과 내통 합니다.” 하니, 아해(阿海)가 그 말을 믿고 다루가치(達魯花赤)에게 보고 하였으므로, 다루가치가 김방경을 소환하여 홍찬과 대질하게 하고, 참지정사 채정(蔡禎)에게 대신 하게 하였다. 아해가 김방경을 오라로써 묶어서 왕경(王京)으로 보내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울었다. 홍찬과 대질 시키니, 홍찬이 무고(誣告)한 것을 자백 하였으므로, 이에 김방경을 석방 하였다.
윤월: 왕이 다루가치(達魯花赤)에게 청하여 다시 김방경(金方慶)을 보내어 적을 토벌하게 하였다.
김방경(金方慶)이 진도(珍島)에 이르니, 적이 모두 배를 타고 성하게 기치(旗幟)를 벌여 세우고 징과 북소리가 바다에 들끓었다. 또 성(城) 위에서도 북을 치고 크게 소리를 질러서 기세를 돋우니, 아해(阿海)가 싸우기를 겁내어 배에서 내려 천막을 쳤다가, 또 물러가서 나주(羅州)에 주둔 하도록 명령 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원수가 만약 물러 간다면 이것은 적에게 약함을 보이는 것이오. 적이 승승장구(勝勝長驅)한다면, 누가 감히 그 예봉(銳鋒)을 감당할 수가 있겠소? 황제께서 만약 문책 한다면 장차 무슨말로 대답 하겠소?” 하니, 아해가 감히 물러가지 못하였다. 김방경이 홀로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공격하자, 적이 전함(戰艦)을 가지고 이를 역습하니, 관군이 모두 달아났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결승(決勝)은 오늘에 달려있다.” 하고, 적진 가운데로 돌진하니, 적이 배를 가지고 포위하여 내몰고 갔다. 김방경의 배에는 화살과 돌이 모두 다 떨어지고, 군사들은 모두 화살에 맞아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이미 진도(珍島)에 가까워지니, 언덕에 적의 군사가 있다가 칼날을 번득이면서 배 가운데로 뛰어 들므로 김천록(金天祿)이 짧은 창으로써 그들을 꺼꾸로 찔렀다. 김방경이 일어나서 말하기를, “차라리 고기의 뱃속에 장사지내는 신세가 될지언정, 어찌 적의 손에 죽을수 있겠는가?” 하고, 바다 가운데로 몸을 던지려고 하니, 위사(衛士) 허송연(許松延). 허만지(許萬之)등이 이를 만류하고 사람들이 모두 결사적으로 싸웠다. 김방경은 호상(胡床)에 걸터 앉아서 군사들을 지휘 하였다. 장군 양동무(楊東茂)가 큰 배를 가지고 공격하여 구원하니 적이 흩어져 갔으므로, 드디어 포위를 무너뜨리고 빠져 나올수가 있었다. 김방경이 장군 안세정(安世貞). 공유(孔愉) 등이 달려와서 구원하지 않은 죄를 따지고 그들을 목 베려 하니, 아해가 만류하여서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辛未年(1271) [원종12년, 元 지원8년]<60세>
5월: 김방경(金方慶), 흔도(炘都) 등이 진도(珍島)를 토벌하여 적을 크게 격파하고 위왕(僞王)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목 베니, 나머지 적당(賊黨)들은 탐라도(耽羅島)로 들어갔다. 이보다 앞서 몽고 관군이 자주 적과 싸워 이기지 못하자, 적이 업신여겨 방비를 마련하지 않았는데, 김방경(金方慶)이 홍다구(洪茶丘)등과 함께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분발하여 적을 치니, 적이 놀라서 흩어져 모두 처자를 버리고 도망갔다. 김방경이 적을 추적하여, 남녀 1만여 인과 전함(戰艦) 수십 척을 사로 잡았다. 적의 도당 김통정(金通精)이 나머지 무리들을 거느리고 탐라도로 들어갔다. 적에게 포로되어 갔던 강화도의 사대부집 여자와 진귀한 보화 및 진도(珍島)의 주민들이 모두 몽고 군사에게 사로 잡혔다. 승화후 왕온은 영녕공(永寧公) 왕준(王 )의 동모형(同母兄)이다. 왕준이 아들 왕희옹(王熙雍)에게 부탁하기를, “만약 싸움에서 이기게 되면, 마땅히 형의 죽음을 구원해야 한다.” 하였는데, 홍다구가 먼저 들어가서 왕온과 그 아들 왕환(王桓)을 죽여 버렸다. 처음에 판태사국사(判太史局事) 안방열(安邦悅)이 옛 서울 개성으로 돌아가는 일에 대하여 태조의 어진(御眞)에다 점을 쳤는데, 반은 살아남고 반은 죽는다는 점괘를 얻고, 죽는 것은 육지로 나가는 것이요, 살아남는 것은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에 적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서 진도에 들어가 웅거하면서 적을 달래기를, “용손(龍孫)은 12대에 끝났지만, 남쪽으로 가면 제경(帝京)을 이룩한다.[龍孫十二盡 向南作帝京]’는 참위설(讖緯說)을 여기에서 징험할수 있다.” 고 하면서, 드디
어 적의 주모자가 되었다. 적이 패배하게 되자, 그는 몸을 뽑아내어 김방경을 만나 보려고 하였으나, 군사들이 그를 쳐서 죽였다. 이 때에 적장(賊將) 유존혁(劉存奕)이 남해현(南海縣)을 점거하고 연해지방을 쳐서 노략질 하다가, 적이 탐라도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그도 또한 배80여 척으로 따라갔다.
11월: 김방경(金方慶)을 중서 시랑(中書侍郞) 평장사(平章事)로 삼았다.<동국통감>
수태위 중서문하평장사(守太尉中書門下 平章事)로 삼았다. <麗史提綱>
12월: 흔도(炘都)가 봉주(鳳州)에서 와서 왕에게 따지기를, “군마(軍馬)가 많이 굶어 죽는데도 양식과 말먹이를 계속하여 보내지 않은 것은 무엇때문 입니까?” 하였다. 흔도가 이것을 구실로 삼았으나, 사실은 참소하는 말을 듣고서 우리나라 안의 사정을 알아보려고 한 것이다. 이리 하여 유사(有司)에서 독려하여 군량미를 수송하였는데, 길이 험하고 멀어서 사람들이 모두 괴로워 하였다. 김방경(金方慶)이 몽고 군사를 염주(鹽州). 배주(白州)로 옮겨 주둔하도록 청하니, 흔도가 그대로 따랐다.
癸酉年(1273) [원종14년, 元 지원10년]<62세>
봄 정월: 문하 시랑 평장사 김방경(金方慶)을 판추토사(判追討事)로 삼고, 추밀 부사(追密副使) 변윤(邊胤)을 추밀사(追密使)로 삼았다.
2월: 중군 행영 병마 원수(中軍行營兵馬元帥) 김방경(金方慶)이 정예(精銳)한 기병 8백 명을 거느리고 흔도(炘都) 등을 따라가서 삼별초(三別抄)를 탐라도에서 토벌하니, 왕이 부월(斧鉞)을 주어서 보냈다.
여름 4월: 원수(元帥) 김방경(金方慶)이 아뢰기를, “흔도(炘都) 등이 군량미를 매우 급하게 요구하니, 마땅히 전라도의 공납미(貢納米)를 가지고 이를 보충 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왕이 재추(宰樞)들에게 그 계책을 물었다. 재추들이 모두 말하기를, “근래에 창고가 텅텅 비어서 경략사(經略使)와 제반 물선(物膳) 공급에도 감당할수 없으니, 청컨대, 경상도의 조세(租稅)를 수송하여 군량미에 보충하게 하고, 전라도의 공납미는 모두 경창(京倉)으로 운반 하게 하소서.”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김방경(金方慶)이 흔도(炘都) 등과 함께 탐라도(耽羅島)의 적을 토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흔도, 홍다구(洪茶丘)등이 반남현(潘南縣)에 주둔 하였다가 장차 출발하려고 하는데, 여러 도의 전함(戰艦)들이 모두 표류하거나 침몰 하였다. 김방경이 흔도 등과 함께 군사 1만 명과 전함 1백 6십 척을 이끌고 추자도(楸子島)에 머물렀다가 바람을 기다려 탐라도로 들어갔다. 중군(中軍)이 함덕포(咸德浦)에서부터 들어가니, 적이 바윗돌 사이에 복병 하였다가 갑자기 뛰쳐나와 크게 소리치면서 항거 하였다. 김방경이 성난소리로 크게 꾸짖고, 대정(隊正) 고세화(高世和)가 뛰쳐나가 적의 가운데로 돌입(突入)하니, 사졸들이 이 기세를 틈타서 다투어 진격 하였고, 장군 나유(羅裕)가 선봉을 거느리고 뒤따라 이르러 적을 죽이거나 생포한 것이 매우 많았다. 좌군(左軍)의 전함 30척은 비양도(飛楊島)로부터 바로 적의 진지를 들이치니, 적들이 바람에 쓰러지듯 달아나서 내성(內城)으로 들어갔다. 관군이 외성(外城)을 넘어 들어가면서 불붙인 화살을 사방으로 쏘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뒤덮고 적의 무리가 크게 무너졌다. 김통정(金通精)은 그 도당 70여 인을 거느리고 산속으로 도망하여 들어갔고, 적장(賊將) 이순공(李順恭). 조시적(曹時適)등은 웃옷을 벗어 몸을 들어내고 항복 하였다. 김방경이 여러 장수들을 지휘하여 내성으로 들어가니 부녀자들이 목을 놓아 울었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적의 괴수를 섬멸할 것이지만, 협박 받아 따른 사람들은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니, 너희들은 두려워하지 말라.” 하고, 다만 김원윤(金元允)등 6인을 목베고, 항복한자 1천3백여 인을 여러 배에 나누어 싣게 하며, 탐라도에 원래 살던 사람들은 전과같이 편안히 자리잡고 살게 하였다. 탐라도가 마침내 평정 되었다. 이리하여 흔도가 몽고군 5백 명을 주둔시키고 김방경도 또한 장군 송보연(宋甫演) 등으로 하여금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주둔하게 하고 돌아왔다. 나주에 이르러 적당(賊黨) 35인을 목 베고 나머지는 모두 불문에 붙이며, 크게 잔치하여 군사들을 먹이고 여러 주(州)의 군사들을 해산 하였다. 김방경이 그 아들 김수(金綬)와 지후(祗候) 김감(金減)과 별장 유보(兪甫)등을 보내어 와서 승첩(勝捷)을 고하니, 왕이 김수(金綬)를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김감을 공부 낭중으로 삼고, 유보를 중랑장으로 삼고, 대정 고세화가 먼저 성을 올라가서 적진을 함락 시켰다고 하여 그를 낭장에 임명하고, 그 나머지는 사람들도 차등있게 상을 주었다. 여러 신하들이 표문으로 적을 평정한 것을 하례 하였다.
6월: 대장군 김수(金綬)를 보내어 원나라에 가서 탐라도(耽羅島)의 적을 평정한 것을 고하였다.
원수(元帥) 김방경(金方慶)이 개선하여 돌아오니, 왕이 붉은 가죽띠(紅정) 1벌을 하사하고, 장사(將士)들에게 크게 잔치 하였다.
윤월: 탐라도(耽羅島)를 평정한 공훈을 논하여, 김방경(金方慶)을 시중(侍中)으로 삼고, 변윤(邊胤)을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로 삼고, 김석(金錫)을 상장군(上將軍)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삼고, 나유(羅裕). 송보연(宋甫演)을 모두 대장군(大將軍)으로 삼았다.
가을 7월: 시중(侍中) 김방경(金方慶)이 소환을 당해서 원나라에 가니, 황제가 금으로 만든 안장과 채색 의복과 금.은을 하사 하였다.
[탐라를 평정한 공로에 대한 상(賞)이다. 김방경은 진도의 싸움때부터 탐라의 정벌까지 마음과 힘을 다하여 험난함을 피하지 않고 조치를 마땅하게 잘 하였으므로 거기에 힘입어 성공하게 된것이다. 그래서 원나라 임금이 조서로 김방경을 불러 승상(丞相)의 다음자리에 앉게하고 어찬(御饌)을 남겨주었으며, 사여(賜與)가 매우 후하여 총애함이 비할데가 없었다.]
<麗史提綱>
甲戌年(1274) [원종15년, 元 지원11년]<63세>
봄 정월: 원나라에서 총관(摠管) 찰홀(察忽)을 보내어 전함(戰艦) 3백 척을 감독하여 만들게 하였다. 또 홍다구(洪茶丘)로 하여금 감독하여 정월 15일부터 역사를 시작하기로 약속하니, 왕이 이에 시중 김방경(金方慶)을 동남도 도독사(東南道都督使)로 삼고, 추밀원부사 허공(許珙)을 전주도 도지휘사(全州道都指揮使)로 삼고, 우복야 홍록주(洪祿週)를 나주도 지휘사(羅州道指揮使)로 삼고, 또 대장군 나유(羅裕)등을 보내어 여러 도의 부부사(部夫使)로 삼아 공장(工匠)과 인부(役徒) 3만 5백여 인을 징집(徵集)하게 하였다. 이때에 역마(驛馬)가 끊어지지 아니하고 여러가지 사무가 번잡한데다가, 기한이 급박하여 몰아치기를 바람과 번개같이 하니,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 하였다.
[배 만들 재목을 변산(邊山: 지금의 부안(扶安)에 있다.)고 천관산(天冠山:지금의 장흥(長興)에 있다.)에서 취했는데, 일을 이달 16일에 시작하여 5월 그믐에 끝내어 크고 작은배 9백척을 금주(金州)에 돌려대니, 사신을 보내어 원에 고하였다.] <東史綱目>
2월: 별장 이인(李仁)을 보내어 원나라에 가서 중서성(中書省)에 상서(上書)하기를, “소방(小邦)에서 중서성의 지시를 받으니, ‘전함(戰艦) 3백 척을 만드는데, 거기에 필요한 공장(工匠). 인부와 재목(材木)등을 배신(陪臣) 김방경(金方慶)등에게 나누어 맡겨서 마련하게 하라’고 하였으나, 공사가 크고 국력이 미약하여 잘 마련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또 가만히 생각하건대, 정월 15일부터 역사를 시작할 때에, 거기에 종사하는 공장. 인부 3만 5백명의 하루 세끼 양식을 계산한다면 3개월간에 모두 3만4천3백12석5두를 지출 하여야 합니다. 또 흔도(炘都)의 군사 4천5백인이 금주(金州)에 도착하였는데, 가지고갈 양식 1천5백70석과 홍다구(洪茶丘)의 군사 5백인이 가지고갈 양식 85석과 제주도에 머물면서 지키는 몽고 관군(官軍)과 소방(小邦)의 군시를 합하여 1천4백인의 7개월간 양식 2천9백4석과 나주(羅州)에 낙후(落後)하여 있는 오로활단치(奧魯闊端赤)의 군량미 8천석과 말먹이(馬料) 1천3백25석을 모두 소방(小邦)으로 하여금 지급하게 하였습니다. 또 중서성 지시를 받으니, ‘봉주(鳳州)의 둔전군(屯田軍)의 매달 부족되는 양곡 2천47석과 소먹이(牛糧) 1천1석7두를 공급하도록 하라’고 하였으나, 이들 종전군(種田軍)에게 그 농우(農牛). 농기(農器). 종자(種子)와 도착한 첫해 가을까지의 양곡을 이미 넉넉히 지출 하였습니다. 그러나 간사한 사람들이 망령되게 일컷기를, ‘둔전(屯田)이 충재(蟲災). 수재(水災)의 손해를 입었다’고 하면서, 함부로 중서성의 지시를 받아 가지고 소방으로 하여금 또 공급 하도록 하는데, 이것은 감히 지시를 어기려고 이렇게 말을 꾸며서 신달(申達)하는 것이 아니라, 해마다 소방으로 하여금 공급하게만 하고 기한이 없으니 실로 민망할 뿐입니다. 모두 면제시켜서 먼곳 사람들에게 혜택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여름 4월: 간의대부 곽여필(郭汝弼)을 보내어 원나라에 가서 표문(表文)을 올리기를, “전번에 홍다구(洪茶丘)가 김방경(金方慶)에게 글을 보내기를, ‘배 3백 척과 뱃사공[梢工]. 수부[水手] 1만5천인을 마땅히 먼저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소방(小邦)은 땅이 좁고 인구가 적은데다가 전란까지 겹쳤습니다. 지난번 탐라도(耽羅島)를 정벌할때의 병졸과 사공들이 모두 배 만드는 역사에 나갔으니, 지금 일본을 정벌하는 군사를 장차 어디에서 차출 하겠습니까? 소방(小邦)의 북계(北界) 여러 성과 서해도(西海道)에서 조세를 포탈한 백성들 가운데 동녕부(東寧府)로 가서 투항한 자들은 모두 배 젓기에 익숙한 자들이니 청컨대 모두 본국으로 돌려 보내어 군사 정원[軍額]에 충당하도록 하여 주소서. 또 경오년(庚午年1270년, 원종11년)으로부터 지금까지 5년동안 군량미를 공급하는 데에도 이미 부족하였는데, 지금 이러한 조선(造船)과 둔전(屯田)및 홍 총관(洪摠管)의 군사와 제주도 주둔군[留守軍]의 군량미를 모두 배신(陪臣)과 백성들로 하여금 공급하게 하였으나, 오히려 능히 계속할수 없자, 특별히 황제의 인자하심에 힘입어 쌀2만 석을 운반하여 군량미를 보충하였으며, 또 양곡 값으로서 비단을 하사하시니, 무엇으로 보답하고 사례하여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공사(公私) 재물이 이미 고갈되었으며 또 배를 만드는 일로 인하여 농사지을 때를 잃게 되었으니, 비단을 주고 양곡을 사는일도 여의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겨울 10월: 도독사(都督使) 김방경(金方慶)에게 중군(中軍)을 거느리게 하고, 박지량(朴之亮). 김흔(金炘)을 지병마사로 삼고, 임개(任愷)를 부사로 삼았다. 추밀원부사 김선(金先)을 좌군사로 삼고, 위득유(韋得儒)를 지병마사로 삼고, 손세정(孫世貞)을 부사로 삼았으며, 상장군 김문비(金文庇)를 우군사로 삼고, 나유(羅裕). 박보(朴保)를 지병마사로 삼고, 반부(潘阜)를 부사로 삼아, ‘삼익군(三翼軍)’이라고 이름 하였다. 원나라 도원수 홀돈(忽敦), 우부원수 홍다구(洪茶丘), 좌부원수 유복형(劉復亨)과 더불어 몽고군사. 중국군사[漢軍] 2만5천명과, 우리나라 군사 8천명 및 사공[梢工]. 수부[水手] 6천7백명과 전함(戰艦) 9백여 척이 합포(合浦)를 출발 하였다. 11일을 지나 배들이 일기도(一岐島)에 이르니, 왜병이 해안 위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박지량. 조변(趙卞)이 뒤쫓으니, 왜인들이 항복하기를 청하다가 다시 싸웠는데, 홍다구가 박지량. 조변과 더불어 공격하여 왜인 1천여 명을 죽였다. 삼랑포(三郞浦)에서 배를 버리고 길을 나누어 진격하였는데, 적병을 죽인 것이 매우 많았다. 왜병이 돌격하여 와서 중군을 충돌하므로 김방경이 큰 화살 한 개를 빼어서 쏘면서 성난 소리로 크게 호통을 치니, 왜인들이 겁에 질려 달아났다. 박지량. 김흔. 조변. 이당공(李唐公). 김천록(金天祿). 신혁(申奕)등이 죽기를 무릅쓰고 싸우니, 왜병이 크게 패하여 시체들이 삼단 깔리듯이 엎어져 있었다. 홀돈이 말하기를, “비록 몽고인 들이 잘 싸운다고 하지만, 어찌 이 이상 더 싸울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여러 군사들이 종일토록 싸우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풀었다. 김방경이 홀돈. 홍다구에게 이르기를, “우리 군사가 비록 수효는 적지만, 이미 적의 땅에 들어 왔으니, 누구나 스스로 힘을 다하여 싸우게 됩니다. 이것은 곧 맹명(孟明)이 배를 불태우고, 회음후(淮陰侯)가 배수진(背水陣)을 친 격입니다.” 하면서, 다시 결전하기를 청하였으나, 홀돈이 말하기를, “<병법에> ‘작은 적이 견고하더라도 큰 적에게 사로 잡힌다.”고 하였는데, 피로한 군사들을 내몰아 큰 적과 싸우게 하는 것은 완전한 계책이 아니니, 회군(回軍)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였다. 유복형이 날으는 화살에 맞아서 먼저 배로 올라갔기 때문에, 드디어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마침 그날 밤에 큰 바람이 불어서 전함이 바위와 벼랑에 부딪쳐 많이 부서졌고, 김선은 물에 빠져 죽었다.
[맹명(孟明)이 배를 불태우고, 회음후(淮陰侯)가 배수진(背水陣)을 친격: 진(秦)나라때 사람 맹명(孟明: 百里奚의 아들)이 진(晉)을 정벌하여 크게 패하였으나, 목공(穆公)의 재등용으로 드디어 황하(黃河)를 건너서 타고간 배를 불태우고 결사(決死)의 각오로 싸워 결국 진(晉)을 이기고 서융(西戎)의 패국(覇國)을 이루었다는 고사(古事)와 한(漢)나라 장군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이 조(趙)나라와 싸울때에 강(江)을 등지고 진(陣)을 친 뒤에 조(趙)나라 군사와 싸워 이겼다는 고사.]
시중 김방경(金方慶)등이 군사를 돌이켰다. 홀돈(忽敦)이 사로잡은 동남(童男). 동녀(童女) 2백인을 왕(王)과 공주(公主)에게 바쳤다.
乙亥年(1275) [충렬왕 원년, 元 지원12년]<64세>
봄 정월: 문하시중 김방경(金方慶)과 대장군 인공수(印公秀)를 원나라에 보내어 표문(表文)으로써 아뢰기를, “소방(小邦)이 근래 역적들을 소탕하는 일로 인하여 몽고 대군의 군량미를 해마다 백성들에게서 거두어 들였으며, 게다가 왜국[倭邦]을 정토(征討)하려고 전함(戰艦)을 수리 건조하는 일 때문에 장정(壯丁)들은 모조리 공사 부역에 나가고 노약자들만이 겨우 밭을 갈고 씨를 뿌렸는데, 시절이 일찍이는 가물고 늦게는 큰물이 져서 곡식을 제대로 거두지 못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라의 비용마저 피폐한데, 더구나 싸움에 다치고 물에 빠져 죽어서 돌아오지 못한자가 많으니 비록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느 세월에 소생(蘇生)될는지 기약할수 없습니다. 만약 다시 일본을 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에 필요한 전함과 군량미를 실로 소방에서 능히 감당할수 없습니다. 삼가 간절한 정성을 굽어 살피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겨울 10월: 김방경(金方慶)을 첨의 중찬(僉議中贊)으로 삼았다. <여사제강>
丙子年(1276) [충렬왕2년, 元 지원13년]<65세>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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