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의 후궁 명빈김씨(明嬪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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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8-04-06 10:43 조회2,980회 댓글6건본문
좌회님과 영윤대부님께서 소개해 주셨던 성종의 후궁 명빈김씨의 묘를 다녀왔습니다.
명빈김씨(明嬪金氏). 무산군(茂山君) 묘역
▲ 무산군 사당 효정사(孝貞祠)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은 무산군의 후손인 이경인(李敬仁 : 1575 ~ 16420)이 병자호란의 치욕을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탄천변에 내려와 정자를 짓고 한운야학(閑雲野鶴)으로 소일하였는데 , 그 후 정자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정자동이 되었다고 한다. 이 효정사는 본래 정자동에 있었는데 1989년 분당 신도시 사업으로 인하여 철거됨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이전 복원하였는데, 정자동 사당 주위에 있었던 백송(栢松)을 주재목으로 하여 복원하였다 한다.
▲ 명빈김씨. 무산군 묘역 전경
▲ 무산군 묘소
무산군(茂山君) - 휘는 종(悰), 자는 낙지(樂之), 시호는 효정(孝貞). 어머니는 명빈 안동김씨로 1남 3녀를 두었다. 배위 군부인 평산신씨는 증 좌찬성 수(銖)의 딸이다. 8남 2녀를 두었다.
공은 어려서는 학업에 정진하여 학문은 물론 서예에도 뛰어나 당세의 명필로 알려졌다. 또한 왕자로서 효행이 지극하였고 형제간에도 우애와 청렴으로 수신하였다. 공은 연산군 때 무오사화 · 갑자사화로 사림파가 대량으로 숙청당하고 음요학정(淫謠虐政)으로 국사가 날로 어지러워지는 것을 종친들과 탄식하며 대책을 논의하던 중 어머니 안동김씨가 신변의 위험함을 듣고 친정인 안동 춘양으로 피신하도록 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 후 중종반정에 의해 폐정개혁을 일으켜 새로운 기풍의 시대에 장동 옛집(현 서대문 로터리)으로 환가하였다. 그 후 학문과 서예에 전념하던 중 1525년(중종 20)에 36세로 한창 학예를 펴려고 할 때 애석하게 별세하였다. 묘소는 북한산이 시작되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울대리로, 어머니 명빈 김씨 묘하 술좌에 쌍폄장으로 모셔졌다.
공의 12대손 예조판서 응진(應辰) 때에 이르러 `애친경형왈효(愛親敬兄曰孝), 청백자수왈정(淸白自守曰貞)'하였던 기풍을 기리고자 홍문제학 김세균(金世均)이 시장(諡狀)을 찬하였고, 응진이 행장을 찬하여 효정(孝貞)의 시호를 받았다.
▲ 무산군 묘표 . 茂山君之墓
▲ 무산군 묘소 후경
▲ 명빈김씨(明嬪金氏) 묘소 전경
▲ 명빈김씨(明嬪金氏) 묘비 - 숙의(淑儀) 증명빈김씨(贈明嬪金氏) 계림김씨(鷄林金氏) 지묘(之墓)
명빈김씨(明嬪金氏) - 익원공 휘 사형의 증손인 효소공 휘 작(碏)의 따님으로 성종의 후궁에 간택되어 성종의 12번째 왕자인 무산군(茂山君)과 휘숙옹주, 경숙옹주, 휘정옹주를 낳았다.
성종의 묘지문에 의하면 성종의 승하 당시(1494년) 품계는 정4품 소원(昭媛)이었다. 그 후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중종 10년(1515년) 정3품 숙용(淑容)의 기록이 보인다. 가정12년(중종 28년 1533년) 양주군 울대리에 조성 된 묘표 "淑儀 鷄林金氏 之墓" 의 음기를 보면 중종 28년 이전에 종2품 숙의(淑儀)에 봉해 졌음을 알 수 있다. 명빈의 품계를 증직 받은 사실이 왕조실록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숙종조에 편찬된 선원계보도에 명빈김씨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숙종 이전에 빈으로 증직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새로 건립한 묘비문에 의하면 무산군의 후손인 태안군(泰安君), 부안군(扶安君), 춘계군(春溪君)의 공(功)이 있어 성종조의 후궁중에 유일하게 빈(嬪)에 봉해졌다는 기록으로 보아 선조조(임진왜란 종전 후) 명빈에 봉해진 것으로 보인다.
김작(金碏) 1427(세종 9)∼1488(성종 19)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위경(衛卿), 호는 상곡(相谷)으로 좌의정 김사형(金士衡)의 증손이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종숙(金宗淑)의 아들이다.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세종 29년(1447) 생원(生員)이 되고, 단종 2년(1454)에 문음(門蔭)으로 선공감 녹사(繕工監錄事)에 이어 전농시 직장(典農寺直長)이 되었다. 세조 4년(1458) 통례원 봉례랑(通禮院奉禮郞)이 되고, 세조 8년(1462)에 종부시 소윤(宗簿寺少尹)이 되었다. 1464년에는 경차관(敬差官)이 되어 경기도 여러 읍의 옥사(獄事) 관리실태를 조사 보고하는데 공헌하고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다.성종 8년(1477)에는 첨정(僉正)으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그뒤 도승지 · 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성종 13년(1482)에는 형조 참의(刑曹參議)가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경기도 관찰사가 되고 1484년에는 병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으며, 성종 18년(1487)에는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올랐다. 시호는 효소(孝昭)이다.
태안군(泰安君) 1520∼1592
휘는 팽수(彭壽). 무산군의 5남이다. 오위도총부 부총관직에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상주에서 이일(李鎰) 순찰사의 패전과 충주에서 신립(申砬) 도순변사의 패전으로 난의 위급함을 직감하고, 70대의 노구를 이끌고 호종임무를 맡아 젊은 종친을 지휘하여 선조의 몽진을 임진강까지 호종하던 중 극심한 폭우속에서 호가를 앞세워 도강을 독려하고 순사하였다. 이로 인해 정의대부 태안군에 봉해지고 승헌대부 오위도총관에 추증되었다.
부안군(扶安君) 1524∼1598
휘는 석수(碩壽), 무산군의 6남이다. 처음엔 품계를 부안정을 받고 1554년 중종 승하 시 혼전(魂殿) 입직(入直)의 공으로 부안도정으로 품계가 올랐다가 후에 부안군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젊은 종친들을 지휘하여 선조의 몽진에 호가한 공으로 용만록선무종훈이 되었다. 1593년 10월 선조대왕이 의주 몽진에서 서울로 환도하니 선릉 · 정릉 두 능에 변이 있어 공은 아우 영원군(永原君)과 성혼(成渾)과 더불어 두 능에 봉심(奉審)하였는데 그 때 기록은 <승정원일기>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춘계군(春溪君) 1557∼1620
휘는 원. 시호는 정헌(靖憲). 무산군의 8남인 영원군의 차남이다. 처음 품계가 춘계부령에서 춘계도정, 명선대부에 오르고 임진왜란 때 선조의 몽진을 호가하여 <호가용만록(扈駕龍灣錄)>에 원종공신으로 기록되고 그의 공을 높이 여겨 승헌대부 춘계군으로 증직되었다.
▲ 명빈김씨(明嬪金氏) 묘표 - 淑儀 鷄林金氏 之墓
▲ 명빈김씨(明嬪金氏) 묘표 - 전면 淑儀 鷄林金氏 之墓, 후면 嘉精 12年
▲ 명빈김씨(明嬪金氏) 묘비 후면 기록 - 안동김씨 효소공 휘 작의 따님이며 祖는 증 의정부영의정 휘 종숙(宗淑) 증조는 증 의정부좌찬성 휘 승(陞)의 기록이 보이며, 태안군. 부안군. 춘계군의 공이있어 명빈에 증직되었으며 성종조의 후궁중에 유일하게 빈에 증직되었다는 기록이다.
▲ 명빈김씨(明嬪金氏) 묘소 좌.우 문인석
▲ 명빈김씨(明嬪金氏) 묘소 장명등
▲ 명빈김씨(明嬪金氏) 묘소 후경. 사패산 정상과 우측에 북한산 오봉이 보인다.
▲ 답사를 마치고 명빈김씨(明嬪金氏) 묘소에서....
왜 묘비에 안동김씨를 계림김씨라 했을까?
1533년(중종 28년)에 세운 구비(舊碑)에도 계림김씨라 음기(陰記)되어 있습니다. 전주이씨 무산군파 종중의 이달우님에 의하면 이미 명빈김씨가 안동김씨라는 사실은 알고 있는 사항이며 처음 묘비를 세울 당시 김알지의 후손인 신라김씨라는 의미로 계림김씨라 했다고 전언(前言)이라 합니다.
▲ 묘소 주변 봄의 전령사들.
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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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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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봄날 따뜻한 기운이 물씬 전해집니다. 대부님 덕분에 귀한 사진을 봅니다.
부안군(扶安君) 설명 살펴보시고, 수정해 주셨으면 합니다.
김발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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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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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감사합니다. 수정하였습니다.
김좌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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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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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발용님 참으로 부지런 하십니다. 즉시 달려가 답사보고서를 올리니 그 노력 그 정성에 감복합니다.
의문점이 완전히 해소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영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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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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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오늘 저의 육대조 삼형제 오대조 오형제 배위분 열분 도합 열여덟분을 한자
리에 모시는 緬禮 를 치루었습니다 고단한 몸으로 홈에 들어와 발용씨의
발로 뛴 결과물 성종의 후궁 명빈김씨 취재기사를 대합니다 목마른 자의
갈증을 풀어주듯 적절한때 궁굼증을 해소해주는 신속함과 필요한 방증을
적절히 첨부해주신 덕분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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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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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놀랍습니다. 그동안 논란이 되어 왔던 명빈에 대한 문제가 님의 노력으로
*태종의 빈-안정공(휘 구덕)의 따님
*성종의 빈-익원공파 효소공(휘 작)의 따님
라고 명쾌하게 정리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몸으로 확인하신 발용대부님의 적극성에 감탄입니다.
또 명빈 묘비 비음기를 기막힌 포토샵으로 보정하여 탁본 작업이 무색할 만큼 재창조해 놓으신 테크닉은 이젠 전문가를 뛰어 넘습니다.
감사합니다.
관리자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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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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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감사합니다. 본 홈 김작란과 익원공파란에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