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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덕사 07년 추향과 16년의 회고(4) : 98년-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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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8-03-20 11:05 조회1,45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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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엔 제3대 임원이 구성되었다.

 회장-태섭(양,유임), 부회장-용달(좌), 달응(좌), 인회(양), 원응(충), 준응(충), 감사-태걸(양), 상천(충), 총무-영회(양)

 이때부터 본격적인 문중사가 진행되었다. 당시 우리 문중의 제일 큰 숙제는 제학공파의 가장 대표적 선조님이신 충익공 하담선조님(휘 時讓)의 유고문집 <충익공하담선생유고>(忠翼公荷潭遺稿)의 국역 사업이었다. 지난 1987년, 36세인 나는 전설처럼 회자(膾炙)되고 있던 이 비밀스러운 문집이 너무도 보고 싶어 제천의 종손(濟應)댁을 상천(相天)대부님과 함께 찾아 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책은 보지도 못하고 황당한 인상만 받고 헛걸음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1997년, 충익공 문집의 야사류(野史流-부계기문, 자해필담, 하담파적록)를 일부 국역하여 재편집한 아동 교육용 도서  <대동야승1>(김종오 엮음. 1981. 민추위 간) 책 한 권을 선물로 들고 다시 제천 종손댁엘 찾아 갔다. 그러나 겨우 <문집>만 구경했을 뿐 나의 복사 요구는 거절당했다. 그러자 함께 동행했던 상춘대부님께서 자신의 집에 있는 <충익공 유고> 필사본을 빌려 주셨다. 날 듯 기뻤다.

 서울로 돌아와 즉시 이를 복사하여 번역해 보려했다. 그러나 한학(漢學)에 단문(短文)한 나에게 이 국역작업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결국 2년 전 상석대부 소개로 알게 된 충익공 13대손이신 익수(제주의 한학자, 문화재위원)아저씨께 이 사실을 말씀 드리고 번역을 간청드렸다. 고맙게도 동의해주시어 이제부터 본격적인 국역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종손(제응)의 아우님이신 두응대부님을 이해시켜 이듬해인 1998년, <하담문집발간 추진회>를 정식으로 구성하여 본격적인 번역과 윤문 및 편집 작업에 들어갔다. 그제제야 제응종손께서도 마음을 바꾸어 원본 복사를 허락했고, 이를 토대로 번역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로부터 3년 동안 국역 작업은 계획대로 차근차근 진행되어 갔다. 서울에서 약 10여 회의 편집회의가 있었고, 나(서울)와 익수아저씨(제주) 사이에는 수많은 우편물과 이메일이 오고 갔다. 6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량의 타이핑 작업은 나를 꽤나 힘들게 했고, 40여 회에 이르는 원고 교정작업은 참으로 힘들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발간작업은 서서히 진행되어 갔다. 드디어 3년만인 2001년 11월, 세덕사 시제 때 발간식을 가지게 되었다. 익수아저씨의 헌신적인 국역 작업과 두응회장님의 발간비 모금활동, 그리고 우매(愚昧)한 나의 편집과 윤문작업 및 추진회 운영 등이 혼연 융합이 되어 대 성과물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발간 후 이 책은 전국의 국공립 도서관과 주요 대학에 무료로 배부되었고 종친들에게는 판매되었으며, 서점(교보문고)에도 판매용으로 일부가 보내졌다. 감격의 순간들이었다. 충익공 묘소에 가서는 헌정 고유제도 올렸다. 그리고 이 해 정기총회에서 비안공문중회 창립 1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도 만들어 배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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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주년 기념 우표 발행>

 

이때 제4대 임원이 구성되었다.

 회장-두응(충), 부회장-용달(좌), 달응(좌), 인회(양), 태영(양), 좌응(충), 감사-주식(좌), 태현(양), 총무-항용(양)

  2003년엔 충익공파 위토인 괴산읍 능촌리 갱고개의 묵은 밭을 충익공 종손 제응님과 회장 두응님의 출자로 개간 보수하여 경작지로 활용토록 하였다.

 2004년 시제때엔 문중 중요 유물 116점에 대한 전시 및 해설 행사가 있었고 제5대 임원개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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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담공 위토 보수공사 장면>


 회장-두응(충), 부회장-용달(좌), 진응(좌), 경회(양), 상환(양), 상천(충), 규동(충), 감사-주식(좌), 태호(양), 총무-항용(양), 부총무-상석(양), 태선(양)

 2005년 4월엔 우리 문중의 숙원사업인 비안공(휘 仁甲) 묘비 건립(찬자-시양, 역자-항용, 서자-태국) 행사가 열렸다(약 70명 참석). 이 비안공 묘비는 비안공 위토의 일부가 공공용지로 수용되면서 받은 보상비로 건립하게 되었다. 이에 맞추어 양덕공파 종가에서도 단독 출자하여 양덕공(휘 時說) 묘비(건립자-태섭, 찬자-항용, 서자-태국)와 문관석을 건립하였고, 안주공(휘 繁) 묘비(건립자-상석, 찬자-항용, 서자-태국) 등이 건립되는 등 큰 사업들이 성황리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6년 4월엔 연속하여 충익공 후손들의 공동 모금으로 이루어진 충익공(휘 時讓, 찬자-두응, 서자-문응), 합천공(휘 ?, 찬자-두응, 서자-문응), 사휴제공(휘 徽, 찬자-항용, 서자-문응), 도사공(휘 秋萬, 찬자-두응, 서자-문응), 밀양공(휘 鳳至, 찬자-두응, 서자-문응)의 묘비와 각종 석물 건립 및 사초 작업이 이루어졌다(약 60여 명 참석). 정말 놀라운 사업들이 여러 종친들의 합심 협력으로 성공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이제 16년의 세월이 지나자 숭모재와 세덕사도 나이가 들었는지 장마철이 되면 재실과 사당 건물 이곳저곳이 누수되고 지붕 기와 도색이 산화되었다. 이에 금년(2007년) 초가을에 충익공파와 양덕공파에서 모금한 4백만원(각 2백만원 씩)으로 재실과 사당 및 대문 등을 보수하고 기와 도색 작업도 하였다. 그렇게 16년의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고 내 나이도 40대 초반에서 이제 50대 중반을 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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