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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사공(휘 효건) 자료_계암일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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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작성일08-03-14 13:53 조회1,533회 댓글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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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를 살펴볼 수 없는 형편이라 부탁드립니다.
판결사공(휘 효건) 할아버지 배위께서 심씨이신지 살펴봐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 溪巖日錄 五
己巳 二月 七日 (1629년 인조 7년 음력 2월 7일)
晴而寒, 先妣諱日, 病未與祭, 哀痛尤劇, 食後兒輩回自祭所, 夕金叅奉孝彦過自安東, 歷以志來也, 子開及而實至, 夜話更僕, 三更後始寢.
○前三嘉宰 金孝建, 沈一松姪女夫也, 其婦翁以其子皆饒, 資財偏與壻孝建破其券, 詣一松盡分之, 又於其同氣曾分異, 而其弟貧乏, 以奴婢更分之如婦家時, 此其人所不及處也, 聞來嘉歎, 此人甚可尙.
맑고 추움. 돌아가신 어머니 생신날이다. 병 때문에 제사에 참여하지 못해서 애통함이 더욱 심하다. 식후에 자식들이 제소(祭所)에서 돌아왔다. 저녁에 참봉 김효언이 들렀는데, 안동에서 이지(김광계)를 만나러 왔다. 자개와 이실이 왔다.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어도 끝이 없었다. 삼경이 지나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전 삼가현감 김효건은 심일송의 조카사위이다. 그 장인이 자식들 모두 살림이 넉넉해서 사위인 김효건에게 재산을 치우치게 (많이) 주었더니, 김효건이 그 문서를 파기하고는 “소나무 한 그루까지 남김없이 모두 (똑같이) 나누어야 한다. 동기간에 달리 나누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그 아우(처가의 아우 즉 처남이나 처제 또는 동서를 말함)가 몹시 가난하여 아무것도 없자 노비를 다시 나누어 처가와 똑같게 하였다. 그 사람의 도리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널리 퍼졌다는 뜻). 들려오는 소리가 감탄스럽다. 이 사람(김효건)이 참으로 가상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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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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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암일록4 (1626년9월14일 rlagyrjs
 <溪巖日錄>四.  丙寅  九月 十四日
○亨及而實來, 聞其大略, 時讓會其姓族金景建 三嘉縣監 金孝建等五六人, 張其威勢, 翰林兄墳, 則姑待京中公文, 尙州兄墳, 先令移出, 聞來駭嘆, 奈何奈何, 讓也見曾祖碣文, 麾斥之曰, 豈可以此爲格乎, 其意實欲並動曾祖墓也, 痛惋莫甚, 仍與而實挑灯相議, 適時讓抵書見訊, 汝熙亦至.

<계암일록> 4. 1626(인조4)년 9월 14일
형(亨-?)과 이실(名-?)이 왔다. 그 대략을 들으니, 시양이 그 姓族인 김경건, 삼가현감 김효건 등 5-6인과 함께 그 위세를 펴려한다고 한다. 한림형(김해)의 분묘 문제는 잠시 서울의 공문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데 상주 형의 분묘는 먼저 다른 곳으로 옮기라는 명령이다. 들려오는 해괴한 탄식을 어찌 하랴 어찌 하랴. 시양이 증조(김효로)의 묘갈문을 보고는 손짓하여 불러서 꾸짖어 말하기를 “어찌 이것을 법식이라고 하겠는가” 하였다 한다. 그의 생각은 실로 증조의 묘소도 아울러 움직이려는 것이니, 너무나 원망스러움이 막심하다. 이에 이실과 더불어 등불을 돋우며 의논하고 시양에게 가서 반대하는 글로써 만나 따지기로 하였는데 여희(名-?) 역시 도착했다
 

김좌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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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원일기(1626년9월14일) 김효건
 <梅園日記> 十. 丙寅. 十四日
 聞方伯自安東來, 奠上洛之墓, 爾·以直先往, 余與汝熙兄繼往, 到知禮齋舍, 移時方伯乃來, 余輩入見叙寒暄畢, 言刧遷塋墓之事, 聲色俱厲, 余輩不能措一辭, 唯唯而已, 行祭後, 又獨招我, 又入見, 從容狎坐, 論辨移日, 喩以不可勒遷之意, 終乃解釋云, 勒遷本非吾意, 京居同姓之論, 如此云云, 三嘉 縣監 金孝建·榮川人金景建諸人, 以上洛子孫, 助奠于方伯, 到家則安德 李奉事慶生氏, 率二子來余家, 二子以試場擧子來矣.

<매원일기>10.  1626(인조4)년 9월 14일
 듣건대, 방백(김시양)이 안동에서 와서 상락공의 묘소에 제사를 올린다고 한다. 직(直-名)에게는 먼저 가라고 말하고 나와 汝熙, 형은 함께 이어서 갔다. 지례의 재실에 도착하여 잠깐 있으니 방백이 바로 왔다. 우리들이 들어가 뵙고 문안인사를 드리고 나니 선대의 묘를 강제로 옮기는 건을 말하는데 목소리와 표정이 엄하였다. 우리들은 한마디도 끼어들지 못하고 그저 예, 예만 할 뿐이었다.

 제사를 봉행한 후 또한 나를 홀로 부르기에 들어가니 조용히 가까이 앉히기에 나는 세월이 흐른 그동안의 과정을 사리에 맞게 따지면서 강제로 이장하지 못할 뜻을 밝히자 끝내는 이해하겠다고 말하면서 ‘강제로 이장하라는 것은 본래 내 뜻이 아니라 서울에 있는 동성 일가들의 여론이 이렇다’며 운운하였다. 삼가 현감인 김효건, 영천인 김경건 등은 상락공(김방경)의 자손으로 방백을 도와 제사를 올렸다. 집에 도착하니 안덕, 이봉사 경상씨 등이 두 아들을 데리고 내 집에 왔다. 두 아들은 과거시험 보려고 온 것이다.
 

김좌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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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건과 김효건은 4촌 형제간이며 수원 두릉리 입향조 김언침의 손자들이다
효헌공 김찬은 이들의 막내 작은 아버지이다.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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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님 감사합니다.
판결사공과 휘 경건 할아버지께서 4촌간이셨군요.
보책에 기록된 휘 경건 할아버지 기사란을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두릉리에 입향하신 지 얼마 안 돼 예안현 인근으로 옮기신 건지, 처가로 옮기셔서 그 후손들이 영남지방에 세거하신 것인지 궁금합니다.
'형(亨-?)'은 계암(김령)의 아들 '요형', '이실(名-?)'은 이지(김광계)의 동생, '여희'는 '황여희'로 김광계와 혈연 관계입니다.

김좌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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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김언침(1514-1584) 의
장남 림(琳)(1538- ?) 경건(慶建)
차남 근(瑾)(1540-1597) 효건(孝建)
삼남 찬(瓚)(1543-1599) 홍건(弘建)
림(琳)이 처가(영주)로 떠남(현재 세거중)
방백(관찰사)김시양과 삼가현감 김효건의 기록은 좀 더 있음 (문중 번역중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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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님 감사합니다.
휘 림 할아버지 배위와 휘 경건 할아버지 배위, 그리고 그 아드님 휘자와 배위,
휘 홍건 할아버지 배위도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이 할아버지들 장인의 휘자도 함께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충익공과 판결사공 기록이 더 있다니 내용이 무척 궁금합니다.
광김 예안파 기록과 이 시기에 충익공과 판결사공께서 활동하신 다른 기록들을 모아 보면 새로운 사실들이 더 많이 발견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제 휘 영남 할아버지(안동에 헌부 문서를 가지고 가서 능골에서 산역 일을 처리하신 분)에 관한 것만 밝혀지면 대충 윤곽이 파악될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