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덕사 07년 추향과 16년의 회고(1) : 90년-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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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8-03-11 10:02 조회1,460회 댓글0건본문
지난 2007년 11월 4일 제가 소속 되어 있는 제학공파 비안공문중의 07년 추향이 있었습니다. 벌써 16회의 향사와 정기총회가 거행되었습니다.
이에 세덕사와 제학공파 비안공 문중회가 창설되던 초기에서 부터 오늘이 있기까지의 과정을 회고해 보았습니다.
부끄럽기도 하고, 또 작게는 자랑스럽기도 한 지난 날들입니다. 일단 한 매듭으로 묶어 정리하고자 기록해 보았습니다.
제 개인의 주관적이고 좌정관천(坐井觀天)의 시각이기에 오류와 침소봉대, 누락과 수치 부분이 많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아울러 그동안 이끌어 주시고 보살펴 주신 본 문중회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올립니다.
<세덕사 07년 추향과 16년 회고>
1)일시 : 2007. 11. 4. 10:00시--14:00시
2)장소 : 충북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402번지 세덕사
3)참가자 : 안동김씨 제학공파 비안공 문중회 종친 및 일반 종친 제위 약 40명
4)내용 : 비안공(휘仁甲) 외 16위 선조님 시제 봉행 및 제16회 정기총회
1. 16년의 감회
지난 2007년 11월 4일, 제16회째 맞이하는 제학공파(提學公派) 비안공문중회(比安公門中會)의 합동 시제(時祭) 봉행(奉行) 및 정기총회가 충북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세덕사(世德祠)에서 있었다. 재실 숭모재(崇慕齋)의 초석(礎石)을 다지고 사당(祠堂) 세덕사를 완성한 뒤 문중회를 조직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벌써 16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본 문중회에 초창기부터 깊숙이 관여해 온 나로서는 실로 감회가 컸다.
지난 1990년, 양덕공(휘 時說) 종가(宗家)인 우리 집 단독의 판단과 출자로 사당(世德祠)과 재실(崇慕齋)을 건립하던 단계에서부터 본 문중회는 시작되었다. 이 토지(800여평)는 본래 양덕공(휘 時說)을 모시기 위한 위토(位土)였다. 경제적 여유가 별로 없던 우리 집 형편으로 그 엄청난 건축 공사를 진행하자니 많은 무리가 따랐다. 2년여에 걸쳐 엄친(泰燮-양덕공 13대 종손)께서는 많은 고통을 감내(堪耐)하시면서도 굳은 신념으로 건축 일을 진행시키셨다. 또한 부친께서는 자식들인 나와 우리 형제들에게도 재실과 사당 건립에 대한 경제적 제공과 적극적 참여를 요구하셨다. 아마도 부친께서는 정대(正大)하고 보람 있는 일이요, 종가(宗家) 제례(祭禮)의 기본인 이 일의 추진은 후손된 우리 모두의 사명이요 의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리라. 나는 이런 아버님께 기쁘고 적극적인 마음과 자세로 보좌(補佐)해 드렸다.
이 기간 일요일이면 자주 괴산엘 내려갔다. 그리고 방학때면 약 10여일씩 머물면서 건축일을 도와 드렸다. 빠듯한 봉급으로 살아가는 나의 살림살이에서도 일부를 잘라 건축비에 보태기도 했다. 건축공사가 어느 정도 진행되어 가자 각 건물에는 이름을 정하고 현판도 붙였다. 재실명인 <숭모재>(崇慕齋)는 유명 서예가 손경식(孫敬植-海淸)님에게서 서예를 받았고, 부친의 호를 딴 <청담정거>(靑潭靜居)는 서예사전에서, 사당명 <세덕사>(世德祠)는 한석봉 서첩에서 집자(集字)하여 현판을 만들었다.
<1991년 여름. 건축 초기-필자의 자 용진, 재실 현관에서(당시3세, 현 21세) >
<1992년 1월. 건축 초기 모습(설에 조카들이 한 자리에서>
<재실>
<사당>
<사당-세덕사 현판>
<재실-숭모재 현판>(손경식님의 글씨)
<재실 사랑채-청담정거 현판>(靑潭은 부친의 호임)
<92년 가을, 일단 건물만 지은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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