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약재(문온공)선조님과 동방(대과에 함께 합격하신분)-9-장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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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8-03-05 14:21 조회1,771회 댓글0건본문
장하(張夏)
생몰년 미상. 고려 말기의 관인. 본관은 결성(結城). 용문(用文)의 아들이다.
홍건적이 침입하였을 때 개경을 수복한 공으로 1363년(공민왕 12) 전의주부(典儀注簿)로서 2등공신에 올랐다.
1372년 신돈(辛旽)이 제거된 뒤 이보림(李寶林) 등과 함께 간관으로 있으면서 신돈의 일당인 김문현(金文鉉)을 탄핵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378년(우왕 4) 밀직부사에 올랐으며, 1381년 가뭄이 무척 심하자 밀직제학으로서 개경 대정(大井)에 비를 빌었더니 비가 내려 포상을 받았다. 다음해 각 도의 산성순심사(山城巡審使)에 임명되었다.
1383년 한양부윤으로 있으면서 의성에서 왜구를 쳐부수기도 하였고, 몰래 숨어들어온 왜구의 간첩 3명을 체포하는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1388년(창왕 즉위년) 제도(諸道)의 안렴사(安廉使)를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로 개편하였는데, 이때 경상도도관찰출척사(慶尙道都觀察黜陟使)가 되었다.
다음해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올랐으나, 1390년(공양왕 2) 명나라에 몰래 숨어들어가서 이성계(李成桂)일파를 모함하였다는 윤이(尹彛)·이초(李初)의 사건에 연루되어 탄핵을 받고 먼곳으로 유배를 당하였다가 얼마 뒤에 풀려나왔다.
조선개국 후에는 결성군(結城君)에 봉하여졌다.
불사이군의 뜻 꺾지 않은 "장하"
옛날부터 각 지방마다 자기지역의 특성을 한마디로 집약해서 표현하는 말들이 전해 내려온다. 힘센 사람들이 많은 지역에서는 “주먹자랑하지 마라.”
부자가 많은 지역에서는 “돈 가진 자랑 하지 마라.” 등의 말들로, 각각 지역적인 특징을 압축해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홍성지역에서는 어떤 말들이 전해 내려올까?
우리 홍성에서는 “홍성에 와서 인물 자랑 하지 마라.”는 말이 전해내려 온다. 아마도 이 말은 홍성지역에서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는 지역적인
특성이 담겨있다고 보여 진다.
홍성군지에 보면 우리 홍성사람의 성격을, 선비기질로서 시비정신이 강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시비정신은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고 떳떳하게 말하는 성격이라는 것이다. 홍성에서는 이것을 “경오를 따진다”, “경오 밝다”, “경오에 어긋났다” 등으로 사용한다. 이러한
홍성사람들의 전통적인 성격이, 한용운? 김좌진? 성삼문, 김복한 같은 훌륭한 인물들을 배출한 배경이 아닐까 생각된다. 또한 고려 말에 불사이군을
외치며 낙향한 충신들도 홍성사람들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홍성군 서부면 중리에 가면, 능동 마을이 있다. 능동이란 마을 이름은, 고려말의 충신이었던 장하(張夏, 1316-1399)의 묘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장하는 결성장씨 시조로서 고려말의 충신이다. 공민왕 때에 신돈의 잘못을 날카롭게 비판하는가 하면, 홍건적이 침입하였을 때 큰 공을 세웠으며,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친 훌륭한 관리였다. 일찍이 나라에 큰 공을 세워서 문하시랑 평장사로 결성군(結城君)에 봉군되었다. 또한 그의 공으로 인해 홍성군 구항면 일대에
땅을 하사 받았다.
장하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의 운명이 위태롭자,
“큰집이 쓰러지는데 나무 한가지로 어떻게 떠받칠 수 있으며, 병이 쓸개에 박혔는데 아무리 명의가 있은들 무슨 도리가 있겠는가?” 라는 말을 남기고
결성 박철동으로 내려왔다. 이곳에서 작은 서당을 짓고 은거하였다. 서당의 이름을 평산별서((枰山別墅)라고 한다. 이곳에서 평생 후학들을 기르다가
1399년에 84세로 별세했다. 이태조가 여러 번 불렀지만 끝끝내 듣지 않고 불사이군의 뜻을 꺾지 않았다.
장하는 고려 말에 목은 이색 등과 함께 정사를 바로잡아서 회복시켜보려고 무척이나 노력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사실들은, “潔身自靖하였으며
고려가 망하자 矢心罔僕 不仕我朝하니, 그 精忠貞節을 사람들이 칭송한다.” 는 말로 오래오래 전해지고 있다. 특히 장하의 묘아래 세워진 신도비에는
장하의 인물평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고려 말기에는 임금이 어둡고 정치가 어지러웠다. 아! 오직 장공만은 충의가 강직하여서 조정에서 임금을
보좌함에 그 말이 충성스럽고 곧아 군신의 의리에 밝아 강상을 붙들어 유지하니 누가 높이 우러러 보지 않으랴. 백대토록 빛날 것이로다.”
장하의 묘는 서부면 능동마을에 있다. 또한 장하가 작은 정자를 짓고 말년을 보낸 평산별서 터와 우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아쉽게도 건물을 모두
허물어지고 주춧돌과 돌더미가 집터였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장하의 아들인 중로(仲魯) 역시, 고려에서 벼슬이 대신의 위치에 있었지만 아버지를
따라서 낙향하였다. 중로의 아들 3형제를 비롯한 후손들은 결성을 중심으로 하여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후손들은 왕촌(旺村),
교촌(校村), 묵동(墨洞), 초지(草枝), 백인(百仁) 등 5개 지파를 형성하며 내려왔다. 지금의 결성장씨들은 대개가 이들의 후손이다.
김정헌(동화작가, 구항초등학교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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