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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공 묘역 성역화사업-묘비문에 포함될 내용(수정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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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8-03-03 12:08 조회1,603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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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공 묘역 성역화 사업이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신 문영공 묘비문의 체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묘지명> 국역문,

2. 구 묘비에 기록되어 있던 <문영공 묘지석 발견 및 이장 경위> 국역문

3. 구 묘비에 기록되어 있던 <추기> 국역문

4. 신 제작문인 <중건기>

 

이에 묘지명 국역문에 이은 나머지 묘비문을 여러 학자들의 번역문을 기초로 정리하였습니다. 중건기는 좌회님의 것을 윤문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의 수정과 의견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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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英公 墓誌石 發見 및 移葬 經緯


 嗚呼라 公의 墓所가 失傳된 것이 어느 때부터인지도 모르다가 一九四二年 봄에 公의 墓誌石이 京畿道 開豊郡 臨溪面 佳井里 馬山 동쪽 언덕에서 發見되었는데 張氏들의 무덤 부근이었다. 이에 받들어 살핀 다음 옛 자리에 그대로 守護하려 했으나 張氏들의 放恣한 惡行과 非常의 勢力으로 인하여 부득이 翌年인 一九四三年 봄에 京畿道 安養市 冠陽一洞 뒷산 언덕 艮坐에 移安하였다. 이때 配位이신 齊平郡夫人 陽川許氏 靈壇도 함께 세웠다. 이 산은 翼元公의 十六代孫인 讚源氏의 先山으로서 한 葬地를 獻納해 준 것이다.  

 지금 서 있는 墓碑石은 閔公이 撰한 墓誌文 記錄을 다시 引用한 것이다.  閔公은 歷史의 巨匠이기에 當時에 誌石에 새길 글을 부탁하였는데 그 事實을 記錄함에 있어 매우 뜻 깊고 오묘하며 모범되게 밝혔다고 後世에 傳해 지고 있어 그 記錄을 찾으려 했으나 萬의 하나도 엿볼 수가 없었다.

 다만 일부 깎이고 떨어져 나간 것이 있어 恨이 되나 중간에 빠진 것을 임의로 補識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한 토막의 고깃덩이로도 온 솥의 고기 맛을 알 수 있듯이 玉에 작은 티가 있어도 璞玉이라고 하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으리라. 


公 歿後 六百二十五年 後인 一九四六年 十月  日.

文英公 二十一代孫 若浩 謹識.

文英公 二十一代孫 舜默 謹書幷篆.

文英公 二十二代孫 達演 幷識



追記

그 後 讚源씨 後孫이 이 山을 他人에게 賣渡할 때 文英公 墓 領域 三百餘坪을 우리 派門中에 喜捨하여 提,按,翼 三派 共同名義로 登記를 畢하였다.

                  


重建記 

 嗚呼라 公께서 高麗 中後期에 文武將相으로서 活躍하시다가 歿하신지 六八七年의 歲月이 흘렀도다. 그동안 墓所 守護에 어찌 迂餘曲折이 없으련만 公의 遺骸와 墓誌石이 온전히 遺傳되어 왔으니 이 어찌 天佑神助요 多幸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後孫된 道理를 다하고자 지난 一九四三年에 移安 造成된 公의 墓域을 이제 本 宗會에서 聖域化함에 있어 公의 精神과 業績을 높이 推仰하는 後孫들 가운데 學術 專門家들이 모여 文獻과 實證을 바탕으로 한 歷史的 考察과 檢證을 통하여 高麗末 宰相의 最高品階에 걸맞는 傳統 樣式 墳墓로 重建하게 되었으며 墓誌銘을 國譯하여 新墓碑를 세웠고 부속 石物을 建立하게 되었도다. 본 墓域 聖域化 事業 과정에는 五十萬 후손들의 知慧와 力量이 總集結되었으며, 事業을 主觀하는 宗中 任員들의 熱과 誠을 다하는 치밀한 計劃과 推進이 있었도다. 이는 온 後孫들의 힘이요 자랑이요 矜持로다. 이로써 文英公 선조님의 崇高한 精神과 빛나는 業績은 더욱 아름답고 永久하게 傳授될 것이며 白凡 金九선생과 같은 民族의 큰 스승과 棟梁들이 무수히 出現하여 國家와 民族 歷史에 크게 貢獻하는 계기가 되리라 굳게 믿고 懇切히 祈願할 뿐이로다.


                                       西紀 二00八年  月  日

                                     文英公(諱 恂) 宗中 後孫一同



댓글목록

김성회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성회
작성일

  잘 읽었습니다. 수고 많으십니다.
그런데 &lt;重建記&gt;를 &lt;文英公 墓所 聖域化 事業 後記&gt;로 하면 어떨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