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김영남(金英男)과ㅏ 김영남(金穎南)은 다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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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작성일08-02-22 02:14 조회1,416회 댓글2건본문
대부님, 감사합니다.
두 사람 모두 서울에 거주하였으며, 각기 다른 인물입니다.
계암일록이나 매원일기에 등장하는 안동김씨는 '상락공의 후손'이라고 특별히 적지 않은 경우에는 대부분 후김입니다.
이들은 풍산현에 거주했던 것으로 보아 현 소산리에 거주하는 후김으로 보입니다.
계암일록에도 우리 문중 선조님이신 휘 영남(英男) 할아버지 기록이 있는데, 얼마 읽지 못해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 梅園日記 十
丙寅 十二月 二十七日 (1626년 인조 4년) 음력 12월 27일
朝前土主招汝熙兄及我, 食後與汝熙兄同往, 土主喩以不可不遷之意, 已而京居上洛姓孫金英男稱名者, 自巡營來到, 持憲府公文, 而所謂公文, 皆不論無理之語, 皆可駭憤. ○是日雨.
조반 전에 고을 원이 여희 형과 나를 불렀다. 식후에 여희 형과 함께 갔더니 묘를 옮기지 못하는 뜻이 불가함을 말한다. 이미 상락공의 성손으로 서울에 사는 김영남(金英男)이라는 자가 감영에서 도착하였는데, 헌부의 공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른바 공문이라는 것이 모두 논리에 맞지 않는 무리한 말들이었다. 모두가 놀랍고 분했다. ○이 날 비가 왔다.
■ 梅園日記 十一
丁卯 正月 六日 (1627년 인조 5년) 음력 1월 6일
自改歲之後, 金時讓刦遷塋墓之令尤急, 差使員李榮仁, 怯於時讓之威, 頻頻來督, 京來人金英男, 雖其兇暴, 土主亦多發未安之語, 憂遑悶迫, 罔知所措, 捧招於官門, 以十日爲限.
설을 쇤 뒤부터 김시양이 묘를 옮기라고 으르는 명령이 더욱 급해졌다. 차사원 이영인이 김시양의 위세를 겁내 더욱 자주 와서 독려하였다. 서울에서 온 김영남(金英男)이 비록 흉포할지라도 고을 원은 미안하다는 말을 많이 하였다. 걱정만 하면서 허둥대다가 번민하는 사이에 닥쳤기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지둥하였다. 관문의 봉초는 (이 달) 10일이 기한이었다.
◆溪巖日錄 一
庚戌 九月 十九日 (1610년 광해군 2년) 음력 9월 19일
晴, 而實歷見, 夕與察訪, 徃靑坡見金僉知潁男令公, 訪舊誦詩.
맑음. 이실이 방문했다. 저녁에 찰방과 함께 청파동에 가서 김영남(金潁男) 첨지 영공을 뵈었다. 옛터를 방문해 시를 읊었다.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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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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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김영남(金英南)>이란 새 인물의 등장입니다.
충렬공 묘소 이야기를 밝혀 내기위해 매원일기와 계암일록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시는 님의 끈기와 열정에 감복할 뿐입니다.
새 이야기를 고대합니다.
김영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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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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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梅園日記 등장인물 金英男과 溪巖日錄 등장인물 金潁男이 同名異人이라는 사실 잘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