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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 장유의 김응하장군 애도시 두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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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8-02-18 12:55 조회1,4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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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 장유의 김응하장군 시>

출전 : 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 제30권. 칠언율(七言律) 1백 60수(首)

 

김 장군 응하를 애도한 시 두 수[哀金將軍應河 二首]

 

태양도 빛을 잃은 사막의 전진(戰塵) / 大漠煙塵白日黃

기진맥진 싸우다가 장군이 전사하였도다 / 將軍力盡死沙場

충성스런 그 혼백 원학과 같이 할 리 있나 / 忠魂定不群猿鶴

무서운 귀신 되어 견양을 죽이리라 / 厲鬼猶應殺犬羊

사해의 영웅들 모두 눈물 뿌리고 / 四海英雄皆涕淚

구중궁궐 영광스런 포장(褒章)도 있었어라 / 九重褒贈有輝光

강변을 배회하는 상심한 초객 / 傷心楚客江潭上

이소의 국상편 읊조리며 애도하네 / 漫把離騷吊國殤

 

 

이제 막 펼치려다 사막에 묻힌 장한 그 뜻 / 壯志初將大漠呑

사수보단 그래도 임금의 은혜 보답했네 / 死綏差足答君恩

고군 분투 끝에 함몰된 군대 / 鼓衰矢盡三軍沒

비 오고 음침한 날 원귀(寃鬼)들의 호곡(號哭) 소리 / 雨濕天陰萬鬼寃

듣자니 이능도 무릎을 꿇었다 하는데 / 楣李陵猶屈膝

가련타 선진처럼 머리라도 돌아오지 / 可憐先軫未歸元

우리 조정 이제 와선 한스럽게들 여긴다오 / 如今廟算多遺恨

장군 위해 일찌감치 착문을 해 주지 못한 것을 / 不爲將軍早鑿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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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D-001]원학(猿鶴) : 전사한 일반 장사(將士)들을 말한다. 《예문유취(藝文類聚)》 권93 주(注)에 “주 목왕(周穆王)이 남정(南征)했을 때 군대가 전멸하였는데 장사들은 원숭이와 학이 되고 일반 백성들은 벌레와 모래가 되었다.” 하였다.

 

[주D-002]견양(犬羊) : 상대방 적군을 얕잡아 부르는 말이다.

 

[주D-003]구중궁궐 …… 있었어라 : 광해군 12년(1620) 명(明) 나라 신종(神宗)에 의해 요동백(遼東伯)으로 추봉(追封)되고, 우리나라에서도 영의정에 추증(追贈)함과 동시에 각지에 사당을 세워 제향하게 하였다. 《海東名臣錄》

 

[주D-004]강변을 …… 초객 : 조정에서 쫓겨난 계곡 자신을 가리킨다. 초(楚) 나라 굴원(屈原)이 조정에서 방축된 뒤 강변을 거닐며 읊조렸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楚辭 漁夫辭》

 

[주D-005]국상편 : 《초사(楚辭)》 구가(九歌)에 있는 편명(篇名)으로 나랏일에 몸바쳐 죽은 것을 노래하고 있다.

 

[주D-006]사수(死綏) : 군대를 후퇴시켜 패장(敗將)으로 치죄(治罪)되는 것을 말한다. 《사마법(司馬法)》에 “將軍死綏”라 하였다.

 

[주D-007]듣자니 …… 하는데 : 조선군 도원수(都元帥) 강홍립(姜弘立)이 후금(後金)의 군대에 항복한 것을 말한다. 이능(李陵)은 한 무제(漢武帝) 때 흉노와 싸우다 선우(單于)에게 항복한 장군 이름이다.

 

[주D-008]선진(先軫) : 춘추 시대 진(晉) 나라 대부의 이름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 희공(僖公) 33년에 “선진이 갑주(甲冑)를 벗고 적(狄)의 군대에 뛰어들어가 죽자, 적인(狄人)이 그의 머리를 돌려주었는데 얼굴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과 같았다.” 하였다.

 

[주D-009]장군 위해 …… 것을 : 총사령관인 도원수에 임명해 보낼 것을 그랬다는 말이다. 착문(鑿門)은, 옛날 군대의 지휘자를 출정시킬 때 흉문(凶門)인 북쪽 문을 허물고 나가게 하면서 필사(必死)의 결의를 다지게 했던 일종의 의식이다. 《淮南子 兵略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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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 장유(張維) 1587(선조 20)∼1638(인조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묵소(默所).

아버지는 판서 운익(雲翼)이며, 어머니는 판윤 박숭원(朴崇元)의 딸이다.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사위로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아버지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05년(선조 38) 사마시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호당(湖堂)에 들어갔고 이듬해 겸설서를 거쳐 검열·주서 등을 지냈다.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파직,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2등에 녹훈되고 봉교를 거쳐 전적과 예조·이조의 낭관을 지내고, 그뒤 대사간·대사성·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로 왕을 호종한 공으로 이듬해 신풍군(新豊君)에 수봉, 이조참판·부제학·대사헌 등을 지내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왕을 호종하였다.

그뒤 대제학으로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임하였고, 1629년 나만갑(羅萬甲)을 신구(伸救)하다가 나주목사로 좌천되었다. 다음해 대사헌·좌부빈객(左副賓客)·예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1631년 원종추숭론(元宗追崇論)이 대두되자 불가함을 주장하고 전례문답(典禮問答) 8조를 지어 왕에게 바쳤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공조판서로 최명길(崔鳴吉)과 더불어 강화론을 주장하였다.

이듬해 예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부음(訃音)으로 18차례나 사직소를 올려 끝내 사퇴하였고 장례 후 과로로 병사하였다.

일찍이 양명학(陽明學)에 접한 그는 당시 주자학(朱子學)의 편협한 학문풍토에 대하여, 학문에 실심(實心)이 없이 명분에만 빠지게 되면 허학(虛學)이 되고 만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 마음을 바로 알고 행동을 통하여 진실을 인식하려고 하였던 양명학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식(李植)은 그의 학설이 주자(朱子)와 반대된 것이 많다고 하여 육왕학파(陸王學派)로 지적하였으나, 송시열(宋時烈)은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의리가 정자(程子)와 주자를 주로 하였으므로 그와 더불어 비교할만한 이가 없다. “고 하였다.

천문·지리·의술·병서 등 각종 학문에 능통하였고, 서화와 특히 문장에 뛰어나 이정구(李廷龜)·신흠(申欽)·이식 등과 더불어 조선문학의 사대가(四大家)라는 칭호를 받았다.

많은 저서가 있었다고 하나 대부분 없어지고 현재 《계곡만필》·《계곡집》·《음부경주해 陰符經注解》가 전한다.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진봉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榜目, 備邊司謄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海東名臣錄, 淸選考, 谿谷評論小攷(金周漢, 正音社, 1981). 〈金成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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