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김택(金澤) 사위 성세장(成世章)
페이지 정보
김영윤 작성일08-01-26 19:45 조회1,509회 댓글1건본문
| 번호 | 19 | 작성일 | 2007-12-26 | 조회수 | 5 | ||||||||||||||||||
| 담당실과 | 정보통신과 | 작성자 | 신상백 | 연락처 | 031-310-2094 | ||||||||||||||||||
|
제목 |
신언서판(身言書判)의 청백리 성세장(成世章, 1506~1583) | ||||||||||||||||||||||
|
| |||||||||||||||||||||||
댓글목록
김영윤님의 댓글
![]() |
김영윤 |
|---|---|
| 작성일 |
망우당(곽재우)은 상산인(商山人) 김행지(金行之)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김행지는 부제학(副提學) 김언필(金彦弼)의 아들로 남명 선생의 사위이다








조선 중기의 공신ㆍ문신. 자는 중회(仲晦)ㆍ경회(景晦), 호는 사암(思庵), 본관은 창녕(昌 寧)이다. 감찰 성희문(成希文)의 아들이나 증이조판서 성희적(成希赤)에게 입양되었다. 김안 국(金安國)의 문인이다. 선생은 23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2년 뒤 식년시 갑과에 3등으로 급제하여 풍저창직장에 제수되었다. 이어 시강원 설서를 거쳐 이듬해(1541) 성균관 전적을 역임하고, 38세에 춘추관 기주관을 지냈다. 40세 때(1545)에는 임금을 시위한 공로로 원종 훈(原從勳)에 오르고, 지평으로 있을 때 최보한(崔輔漢)을 탄핵하는 등 기강확립에 힘썼다. 41세에 홍문관 교리를 지내고, 43세에 사재감 정으로 춘추관 편수감을 겸대하여 『중종실 록』과 『인종실록』편찬에 참여했다. 그 뒤 사인ㆍ집의ㆍ경기도 암행어사ㆍ직제학ㆍ도승지 ㆍ경기감사 등을 역임하고 53세 되던 해(1558)에 대사헌으로 윤원형(尹元衡)ㆍ이양(李樑) 등 외척을 견제했다. 이어 동지중추부사ㆍ예조참판ㆍ한성좌윤 등을 지내고, 58세에 함경감 사를 역임했다.
성품이 간정(簡靜)하고 풍모가 맑고 단정하였으며, 술을 가까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허튼 담소도 없었으며, 언어는 항상 충심, 신의가 있어 비속한 언사는 입에 담질 않았다. 재 물에 항상 무관심하고 검소했으며, 여색(女色)과 오락 같은 번화한 일에 마음을 둔 적이 없었다. 네 분의 임금을 섬겨 모두에게 우대를 받아 때로는 낙루한 옷깃을 적시기도 해 누추 상소한 일이 있었지만, 혹 좋은 옷이 생기면 곧 태워버렸다. 또 관직에 재임 중에는 공사가 분명하여 이기ㆍ구수담(具壽聃)에게 죄를 주려는데 대한 잘못을 통렬히 논박하기까지 했다. 언론이 강개하여 조정의 모든 요속들의 기운을 움직였고, 실없이 누구를 비방하거나 칭송함 이 없고, 변란을 당할 때나 역경에 임해서는 근본 의지에 굽힘이 없이 충성으로 일관했다.
그런데 선생의 지석은 22매라는 지석 매수에서도 알 수 있듯이 표제문(表題文), 내용, 명 (銘), 지은이까지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먼저 표제문을 보면, 선생의 경우 "유명조선국자헌 대부의정부우참찬겸지의금부사성공묘지명(有明朝鮮國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兼知義禁府事成公 墓誌銘)"이라고 표제문을 썼고, 부인의 경우는 "정부인안동김씨묘지(貞夫人安東金氏墓誌)"라 는 제목을 달았다. 지문 내용으로는 이름, 선대가계, 출생, 출생지, 관력, 행적, 고인의 품성 등을 차례로 적고 마지막에 지은이와 명(銘)을 달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