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약재 따라 풍류여행(4)-삼척-죽서루기- 미수 허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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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8-01-11 14:23 조회1,595회 댓글0건본문
**죽서루기(竹西樓記) 미수 허목 미수기언에서
竹西樓記
東界多名區 其絶勝八 如通川叢石亭 高城三日浦海山亭 수城永郞湖 襄陽洛山寺 溟州鏡浦臺 陟州竹西樓 平海越松浦 遊觀者 獨稱西樓爲第一 何也 盖濱海州郡 關嶺以外 東盡大海 其外無窮 日月迭出 怪氣萬變 海岸皆沙 或匯爲大澤 或矗爲奇岩 或鬱爲深松 自習溪以北 至箕城南境 七百里 大體皆然 獨西樓之勝 隔海有高峯峭壁 西有頭陀太白 嵬峨巃嵷 浮嵐積翠 岩峀杳冥 大川東流 屈折爲五十瀨 間有茂林墟烟 至樓下 層岩蒼壁千尋 淸潭修瀨 灣回其下 西日綠波 粼粼澹灩 岩壁別區 勝槪與大海之觀絶殊 遊觀者 其樂此而云云耶 考官府故事 樓不知作於何代 而至永樂元年 府使金孝宗 修廢墟起此樓 洪熙元年 府使趙貫 施丹雘 其後四十六年 成化七年 府使梁瓚 重修之 嘉靖九年 府使許確 增作南檐 又其後六十一年 萬曆十九年 府使鄭惟淸 復重修之 自太宗永樂元年癸未 至康熙元年壬寅 爲二百六十年 樓下古有竹藏古寺 有竹西之名 盖以此云 仍誌之以爲竹西樓記 今上顯宗三年壬寅 月 日
行都護府使許穆記
관동 지방에는 이름난 곳이 많다. 그중에도 가장 뛰어난 곳이 여덟이니, 즉 통천(通川)의
총석정(叢石亭), 고성(高城)의 삼일포(三日浦)와 해산정(海山亭), 수성(䢘城)의 영랑호(永郞湖),
양양(襄陽)의 낙산사(洛山寺), 명주(溟州)의 경포대(鏡浦臺), 척주(陟州)의 죽서루, 평해(平海)의
월송포(越松浦)인데, 관광하는 자들이 유독 죽서루를 제일로 손꼽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대개 해변에 위치한 주군(州郡)들이 대관령(大關嶺) 밖은 동으로 큰 바다를 접했으므로 그 바깥은
끝이 없으며, 해와 달이 번갈아 떠올라 괴이한 기상의 변화가 무궁하다. 해안은 모두 모래톱인데,
어떤 데는 모롱이진 큰 소[大澤], 또 어떤 데는 불거진 기이한 바위, 그리고 또 어떤 데는 우거진
깊은 솔밭으로 되어 있어, 습계(習溪) 이북으로 기성(箕城) 남쪽 접경까지 7백 리는 대체로 다
이러하다. 유독 죽서루의 경치만이 동해와 마주하여 높은 산봉우리와 깎아지른 벼랑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두타산(頭陀山)과 태백산(太白山)이 우뚝 솟아 있는데, 짙은 이내 속으로 바위 너설이
아스라이 보인다. 큰 시내가 동으로 흘러 꾸불꾸불 50리의 여울을 이루었고, 그 사이에는 울창한
숲도 있고 사람 사는 마을도 있다. 누각 밑에 와서는 겹겹이 쌓인 바위 벼랑이 천 길이나 되고
흰 여울이 그 밑을 감돌아 맑은 소를 이루었는데, 해가 서쪽으로 기울녘이면 넘실거리는 푸른
물결이 바위 벼랑에 부딪쳐 부서진다. 별구(別區)의 아름다운 경치는 큰 바다의 풍경과는 아주 다르다. 관광하는 자들도 이런 경치를 좋아해서 일컫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 고을 고사(故事)를 상고해 보아도 누를 어느 시대에 세웠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황명(皇明)
영락(永樂) 원년(1403, 태조3)에 부사(府使) 김 효종(金孝宗)이 폐허를 닦아 누를 세웠고, 홍희(洪煕)
원년(1425, 세종7)에 부사 조관(趙貫)이 단청을 올렸다. 그 뒤 46년인 성화(成化) 7년(1471, 성종2)에 부사 양찬(梁瓚)이 중수했고, 가정(嘉靖) 9년(1530, 중종25)에 부사 허확(許確)이 남쪽 처마를
중축했다. 또 그 뒤 61년인 만력(萬曆) 19년(1591, 선조24)에 부사 정유청(鄭惟淸)이 다시 중수하였다. 태종(太宗) 영락 원년 계미(1403)에서부터 청주(淸主) 강희(康煕) 원년 임인(1662, 현종3)까지는
260년이 된다. 옛날에 누 밑에 죽장사(竹藏寺)란 절이 있었는데, 누 이름을 죽서라고 부른 것은 아마 이 때문인 듯하다. 이상을 기록하여 죽서루기로 삼는다.
현종 3년(1662) 임인년(壬寅年) 월 일
행도호부사 허목이 기문(記文)을 쓰다.
*수성=지금의 간성이다 수성(수=守+책바침 城)
* 습계(習溪) =강원도 통천군 흡곡현.. 지금의 흡곡면
* 기성(箕城 =울진군 평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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