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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척약재 따라 풍류여행(2)-삼척-2- 죽서루의 가인 심동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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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8-01-10 10:38 조회1,2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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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7)삼척의 심중서가 시를 보냈기에 차운하여 받들어 드리다 

     바닷가에서 늙기로 일찍이 갈매기와 맹서하더니

     한평생의 행동이 더욱 표연하네

    부귀공명 모두 쓸데없는 일이고

    모두 버리고 다시 만나니 껍질벗은 매미같구려


    높이 난새 하늘멀리 사라지고

    한 점 봉래산 아득히 멀리 있네

    그대집의 피리만들 대나무 많이 사랑하니

    이웃에 산다면 고양이 숨겨 놓았을텐데..


    *심중서= 沈東老를 가리킨다.

    *심동로는 공민왕 10년(1361)에는 봉선대부 中書舍人 知制誥를 지냈다.

    주1.봉래=삼신신의 하나

    주2. 함선=고양이의 별칭이다.  그 몸이 가벼워 능히 매미를 잡을 수 있음에서 나온 말로서 고양이를 숨겨놓는다는 것은 고양이가 소리 없이

          쥐를 잡듯이 그것을 노린다는 뜻인 듯 하다.  우리 속담에 ‘고양이 기름종지 노리듯 한다’라는 말과 통한다.


 

 

 

위의 시는 척약재 선조님이 삼척에 있는 심동로에게 쓴 시입니다.  심동로에 대해서는 알아보겠습니다.

 

심동로(沈東老)


죽서루의 가객  심동로


삼척심씨의 시조이며 죽서루의 가객으로 이름 높았던 심동로는 고려 공민왕 원년(1352)에 통천군수를 지낸 분입니다. 본래 이름은 한(漢),

호는 신재(信齋)이며 검교(檢校)로 있던 심문수의 아들이었습니다.

심동로는 고려말 충혜왕3년(1342) 생진과에 차석으로 합격하여 그해 가을 직한림원사. 성균관학록이 되었으며, 1351년에는 내직으로 들어가

우정언이 되었습니다.

그후 공민왕 10년(1361)에는 봉선대부 중서사인 지제고라는 높은 벼슬에 올랐으나 심동로는 연로하신 부모를 모시기 위해 지방수령으로

 나가기를 원했을 정도로 효성스런 분이셨습니다.

강원도 통천군수를 지내면서 고려말의 어지러운 정사를 바로잡고자 했으나 여의치 않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갈 수 있게 해달라고

 임금에게 간청했습니다. 공민왕은 여러 차례 그의 마음을 되돌리고자 했으나 의지가 워낙 굳어서 어쩔 수 없이 귀향을 허락하면서

그 뜻을 높이 사서 “노인이 동쪽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동로(東老)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로부터 심한이란 이름 대신

심동로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학사승지가 되었을 때 왕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습니다. “심동로는 신보다 학식이 높고, 나이도 신보다 많으며,

벼슬길도 먼저 올랐으니 신의 직책을 그에게 내려주십시오” 공민왕이 이색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당대 유학의 거장인 이색이 그러한 말

을 하였을 정도이면 심동로가 어떠한 인물인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당시에 김구용이 안렴사가 되어 삼척에 왔을 때 심동로를 찾아와서 그가 거처하는 집을 방문하여 심동로의 호인 “신재(信齋)”라는 글씨를

직접 써서 편액으로 그의 집에 걸어 주었습니다.  이처럼 삼척으로 오는 많은 관원들은 반드시 심동로를 찾아와서 나라 일을 함께 논하고 시를

지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 충렬왕8년(1282) 원나라에서 진사 급제 후 돌아와 예빈시승의 벼슬에 있던 이구(李球)는 “관동의 군자는 두 사람으로 심동로와 최복하다”

라고 평했는데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삼척의 관루는 죽서루이고 / 누중의 가객은 심중서로다 / 지금과 같이 백발임에도 / 시와 술에 의탁하여 / 한가한 나를 위해 자리를 베풀었네”

심동로는 삼척에 살면서 날마다 죽서루와 해암정을 오가며 시를 썼습니다. 추암 능파대 서쪽에 지은 해암정은 삼척의 해금강이라 할 만큼 경치가

 좋으며, 해암정 서쪽 신재공이 은거했던 터를 “신대감터”라고 부릅니다. 세조7년(1461) 체찰사 한명회는 이곳에 들러 능파대(凌波臺)라

이름을 지었고 1530년 안찰사 심언광이 중건했으며, 1675년 송시열이 해암정 현판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 심동로가 은거하던 곳은 지금의

동해시 추암동 산기슭인데 이곳을 휴산(休山) 또는 퇴평(退坪)이라 하며 1931년 후손들이 그 자리에 유허비를 세웠습니다.


  심동로는 삼척에서 후학들을 모아글을 가르치며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는데 남은 인생을 다 바쳤습니다. 그러므로 삼척지방의 학풍을 진흥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년에는 나라에서 예의판서와 집현전제학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임금은

식읍(食邑)을 하사하고, 진주군(眞珠君)으로 봉했으나 끝내 부임하지 않고 산수와 시를 벗하였습니다.

심씨가 삼척을 본관으로 한 것은 심동로의 유언에 따른 것이라 합니다. 그의 덕행과 문장은 [해동명신록]에 수록될 정도입니다. 삼척의 자랑인

관동팔경 제1루 “죽서루”와 심동로는 이러한 인연이 있습니다.



※참고자료 : 김영기, “실직국의 인맥”,[실직문화]제4집, 삼척문화원,1993 [삼척시지]. [동해시사][삼척의 충효열 인물](삼척군,1994)

*해암정(해암정) 강원도 유형문화재 63호

고려 공민왕 10년(1361) 진주군 심동로가 처음 창건하였으나 소실되고, 조선 중종25년(1530)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이 중건하였다. 그후 정조 18년(1794) 중수하였는데 규모는 정면 3칸·측면 2칸 초익공 양식의 단층 팔작지붕으로 음양의 조화를 맞추었으며, 원주기둥이 10개이고 전면을 제외한 3면 모두가 4척 정도의 벽체로 세워져 개방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4면 모두 문을 달아 놓았다.

*식읍(食邑) : 국가에서 그 조세를 공신(功臣) 등의 개인에게 받아쓰도록 배정한 고을 

*삼척시 홈페지에서 인용-


심동로의 시한수  동문선에서...


황근 선생을 보내며[送黃先生瑾]   심동로


바닷속의 명월주는 / 海中明月珠
그 값이 헤아릴 수도 없어 / 其價難比數
이 어찌 늙은 조개 속에서 나온 것이랴 / 此豈老蚌生
용의 토한 것이지 / 是實驪龍吐
세속 사람들 얻고 잃는 사이에 / 世俗得失間
뭇 원숭이 기뻐하고 노하는 것 같도다 / 衆狙紛喜怒
고기 눈을 아름다운 구슬이라 해 / 反以魚目美
서로 다투어 부고에 채우는구나 / 爭相充府庫
값 없는 보화 끝내 버리지 못 하나니 / 至寶終不棄
때가 오면 반드시 알아 주리라 / 時來必遭遇
내 일찍이 추천을 받아 / 我曾被汲引
난파(한림원(翰林院))에서 붙어 있었네 / 金坡忝攀附
뱁새는 보잘 것 없거니 / 斥鷃徒區區
난새와 곡새가 어찌 돌아나 보리 / 鸞鵠肯相顧
우선 이 전별하는 시를 지어서 / 且作送行詩
은근히 소박한 정을 쏟아 놓노라 / 繾綣倒情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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