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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영호루가 홍수로 유실된 기록 - 계암일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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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작성일07-12-02 20:22 조회1,277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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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루가 홍수로 유실된 기록 - 계암일록에서

<홍수가 나기 이전의 영호루>

■ 甲辰 十二月 四日

朝雪下, 早行午至映湖樓越邊, 川凍舟堅, 挽不能動, 諸人皆不得渡, 咸聚江邊, 冬霖新霽, 氷澌漲流, 無可奈何, 有一漢裸身直渡, 始測淺深, 僅能騎渡, 纔將登岸, 又送馬令奴輩騎涉, 凍寒逼骨, 馬股栗不忍見, 安東判官以牛車濟人得咸渡, 午後至府內始朝炊, 乘夜還家, 將二更矣.

아침에 눈이 내림. 일찍 길을 떠나 낮에 영호루 건너편 강변에 도착했다. 강이 얼어서 배가 단단하게 엉겨붙었다. 잡아당겨도 움직일 수 없어서 사람들이 모두 건널 수가 없었다. 강변에 모두 모여 있는데, 겨울장마가 처음으로 갰다. 얼음이 녹아 물이 불어나니 어찌할꼬. 어떤 사내가 벌거벗은 채 물을 건너가는데 강물이 얕은 곳과 깊은 곳을 재 보았더니 겨우 말을 타고 건널 만했다. 간신히 건너편 강둑에 올랐다. 또 말을 보내 종들에게 말을 타고 건너라고 하니 얼음의 차가운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서 말의 넓적다리가 밤톨처럼 단단해져 눈으로 볼 수가 없었다. 안동판관이 사람들이 건널 수 있도록 우마차(牛車)를 보내서 모두 건널 수가 있었다. 낮에 안동부 안에 도착해 처음으로 아침밥 지을 불을 피웠다. 밤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니 2경이 가까웠다.

<홍수가 난 이후의 영호루>

■ 乙巳 七月 二十一日

朝, 聞昨夜水勢益盛, 至于濯淸之亭, 中村下村, 無不被害, 遂徃審之, 河陽 堤川 安陰三宅, 盡經淪沒, 日休堂楹上水痕, 過人고甚遠, 村舍蕩破者, 五十餘家, 目之蕭然, 甚於兵火, 居人假寓山麓, 河陽 堤川兩宅, 僅避出寄寓, 以志家被患之家, 墻壁盡落, 只有上蓋, 淤泥滿室, 汚不可入, 釜鼎之屬, 或高上房, 屋爲水所浮也, 河陽宅先生所書屛風二圍, 漂至江邊毁破可惜. ○禮安客舘墻壁盡落, 洞見內面, 大門外槐木掎掣漂木, 大可連抱者, 積爭路, 受日堂滌襟亭雙碧亭, 盡入狂流, 唯枕流亭房屋得免, 豈非大幸也, 夕聞安東暎湖楼及南門亦漂去, 水至客舘, 東南村廬蕩然, 人畜多死, 映湖乃花山傑搆, 且有前朝舊迹, 一朝至此可惜, 廬江書院亦漂蕩, 位版僅得移出, 聞來驚駭尤極. ○水之方盛也, 大木連根拔出, 廬舍或不毁, 而下及水落, 則沿川郊野, 樹木充積縱橫, 小民得之多獲利者, 田中失水之魚, 大小駢死, 民皆拾取, 鷄犬亦多死, 夫以魚之得水以生, 猶且不免乎, 此其變恠, 果何如哉.

아침에, 지난 밤에 물의 기운이 더욱 성해져서 탁청의 정자와 중촌 및 하촌까지 이르러 피해를 입지 않은 곳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가서 살펴보니 하양댁, 제천댁, 안음댁은 모두 물 속에 잠겼다. 일휴당은 기둥 위에 물이 든 흔적이 남았는데, 키 큰 사람 머리카락이 늘어진 것처럼 아주 멀었다(높은 곳에 물이 들었다가 빠진 흔적이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랗게 남았다는 뜻). 흙탕물에 쓸리고 깨진 마을 집 50여 채를 보니 숙연하기만 한데, 병화 때보다 더 심하다. 사람이 살 만한 곳은 산기슭의 임시 숙소뿐이었다. 하양댁과 제천댁 두 집은 간신히 피해 나와 임시 숙소에 의탁했다. 이지(김광계)의 집도 피해를 입은 집인데 담과 울타리가 모두 떨어져 나가고, 다만 지붕만 남았다. 진흙과 진창물이 집 안에 가득하여 더러워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가마솥 같은 그릇들이 간혹 높다란 곳에 있는 방이나 집 안에 고인 물 위에 떠 있었다. 하양댁에는 선생이 손수 쓴 병풍 두 위(圍)가 물 위에 떠돌다가 강변에 이르러 훼손되고 깨졌으니 안타깝구나.

○예안 객관은 담장과 울타리가 다 떨어져 나갔는데, 뚫린 구멍으로 안이 다 들여다보였다. 대문 밖 괴목은 물 위에 떠다니는 나무들을 끌어당겨 크게 끌어안은 것 같았는데, (나무들을) 길에 쌓아놓았다. 수일당, 척금정, 쌍벽정은 모두 광류(狂流)가 들어오고, 오직 침류정의 방만 면했다.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저녁에 안동 영호루와 남문 역시 물에 떠내려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물이 객관까지 다다르고, 동남촌의 주막까지 쓸어버려 사람과 가축이 많이 죽었다. 영호루는 화산(안동)의 걸구(傑搆 : 걸작)이자 전조(고려조)의 구적(舊迹)인데 하루아침에 이 지경이 되었으니 안타깝구나. 여강서원도 물에 떠내려갔는데, 위판만 간신히 얻어서 옮겨 나왔다. 들리는 소식이 더욱 심해 놀랍고 또 놀랍다.

○물의 기운이 방성(方盛)하여 큰 나무도 뿌리째 뽑아낸다. 오두막집은 혹 피해를 입지 않았더라도 아래쪽에 물이 닿으면 무너져 내렸다. 개천을 따라 교외 들판은 나무들이 어지럽게 가득 쌓여 있다. 상민(小民 : 常民)들이 그 나무들을 주워 갔는데, 많이 얻을수록 이익이었다. 밭에는 물을 잃은 물고기(물이 빠지면서 밭에 남은 물고기)들이 크고 작은 것이 나란히 죽어 있어서 백성들이 모두 주워 갔다. 닭과 개 역시 많이 죽었다. 물고기는 물을 얻어야 살 수 있는데 이 또한 면할 수 없단 말인가? 이는 분명 변괴로다. 어찌 이와 같단 말인가!

■ 乙巳 八月 六日

陰, 早發至映湖楼, 只有石柱頹臥, 壞砌見水痕, 則知府內及巨野, 盡爲黃流, 惟西北獨全, 水變之甚爲如何哉, 渡映湖津朝炊一直川邊, 夕到義城縣內.

흐림. 일찍 출발해 영호루에 다다르니 오직 돌기둥이 무너져서 쓰러져 있을 뿐이다. 무너진 섬돌에서 홍수 진 흔적을 보았다. 안동부 안뿐만 아니라 큰 들판에까지 모두 흙탕물이 된 것을 알았다. 오직 서북쪽만이 온전하다. 물난리의 심함이 어찌 이와 같은가. 영호나루를 건너 아침에 일직현 시냇가에서 밥 지을 불을 피웠다. 저녁에 의성현 현내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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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짬이 계암일록에서 찾은 기록입니다. 연도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잘못 본 곳이 많으니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댓글목록

김영윤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영윤
작성일

  水害前 갑진년(1604)과 을사년(1605) 음력 7월21일의 수해를 본 후의 기록인것 같습니다
요즘의 수해 현장 보도를 보는듯 한 생생한 중계가 인상적입니다

김태영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태영
작성일

  계암일록 국역본이 있습니까? 아니면 직접 번역하신 건가요?
귀중한 기록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