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남는 문제, 확인사항, 정정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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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7-01-03 18:57 조회1,393회 댓글0건본문
잘 읽었습니다. 특히 광산김씨의 계보가 궁금했는데 시원합니다.
정리하면,
1. 충렬공의 셋째사위(권윤명)의 또 사위가 광산김씨 김진이다
2. 김진은 안동에 광산김씨가 세거하기 시작한 김무의 조부이다.
3. 충렬공 묘소 위에 있는 김효로의 5대조 김진의 장인이 권윤명, 권윤명의 장인이 충렬공이다. (대수로는 7대가 됨)
4. 충렬공 묘소는 김효로의 묘소를 쓰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고 보는 시각이다
<남는 문제>
1.1534년 김효로의 묘소를 충렬공 묘소 바로위에 썼다는 최초의 기록문은?--충렬공의 묘소 발견시기를 1534년(김효로 죽음), 1593년(김해의 죽음) 중 어느것인지를 밝히기 위해--
2.우리 문중 문헌중, 김해 묘소를 쓰는 과정에서 충렬공 묘지석이 발견되었다고 적은 최초의 문헌은?--상기 1번의 문제를 밝히기 위해(대종회 서고의 구족보 확인 필요)
*기미보(1979년간)와 최근의 각 파보에는 모두 다음(제학공파보. 1990년 간)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묘소는 옛족보에 이르기를, "안동부 예안현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때 예안은 안동에 속한 현이었다. 그런데 200년간 실전되어 오다가 만력 갑오(1594년)에 비로소 묘소를 찾았다.--
*경진보(최초의 족보. 1980년 간)의 기록인 <묘안동군 녹전면 죽송동 능동 을좌신향 외예 영남백 이시발 찬갈 참봉 조우인서>라는 기록은 아마도 경진보 발견 후에 1970년대 대종회에서 <경진보>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첨기한 것 같다. 이시발이 찬한 묘비는 1602년에 세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인이 소장하고 있는 <경진보 아류본>에는 충렬공의 묘소 위치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다만, 배위 냉평국대부인 기록란 맨 끝에는 <묘재 안동 예안현 지례촌 속칭 능동>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대종회 소장 경진보와 같다.
3.김효로와 김해의 묘비문에 나오는 묘소 설립과정의 기록내용 연구
4.광산김씨 문중의 일기 연구.
*예-김효로의 아들 문집, 김해의 아우 김령의 일기(<溪巖日錄>). 김해의 아들 김광계의 일기(<梅園日記>) 등의 광산김씨 문중 문집들을 좀더 세밀히 연구해 봐야 할 것 같다.
<확인사항>
충렬공 묘지석은 1979년 1월 4일(탁본에 기록된 일시, 대종회 보관), 대종회 윤회씨(당시 사무국장) 일행이 안동에 가서 묘지석을 탁본한 것이 틀림없다.
<정정사항>
1626년 경상도관찰사로서 김해의 묘소를 이장하게 한 선조는 '김치'가 아니라 '김시양'임.
*기미보(1979년 간) 기록 내용: 고려왕(충렬왕)이 세운 바 있는 신도비와 후손 예생(禮生)이 세운 묘갈은 모두 부서졌다. 임인년(1602년)에 다시 봉분을 하고 비석을 세웠다.
천계 병인(1626년)에 12세손인 시양(時讓)이 본도(경상도) 안절사(관찰사)로 와서 묘가 실전해 있을 때에 한림 김해(金垓-광산인)의 묘가 아주 가까이 범장해 있었으므로 묘를 파내어 옮기도록 요청하였고, 또한 상석이 협소하여 다시 설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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