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소세양신도비명(蘇世讓神道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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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6-12-11 20:28 조회1,485회 댓글0건본문
소세양신도비(蘇世讓神道碑)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오위도총부도총관 세자이사(議政府 左贊成 兼 判義禁府事 知經筵 春秋館 成均館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五衛都摠莩摠管 世子貳師) 소공신도비명(蘇公神道碑銘) 병서(幷序)
숭정대부(崇政大夫) 행 예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지 경연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行 禮曹判書 兼 判義禁府事 知經筵 春秋館 成均館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 강녕군(江寧君) 홍섬(洪暹)이 글을 짓고
가선대부(嘉善大夫) 경기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京畿觀察使 兼 兵馬水軍節度使) 심전(沈銓)이 전액(篆額)을 한다.
소씨(蘇氏)는 진주(晉州)에서 나왔으니 휘(諱) 을경(乙卿)이 고려조에 벼슬하여 관직이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이르렀다. 판서의 후손 휘(諱) 희(禧)가 우리 조선 조정에 들어와서 중군사정(中軍司正)이 되었고 사정이 효식(效軾)을 낳았는데 한성판관으로 벼슬을 끝마쳤다. 판관이 자파(自坡)를 낳았으니 의빈도사(儀賓都事)로 벼슬을 마쳤는데 이분이 개성 왕씨(開城王氏) 석주(碩珠)의 따님을 맞이하여 성화(成化) 병오년(1486년) 6월 경진일에 공을 낳았다.
공의 휘(諱)는 세양(世讓)이요, 자(字)는 언겸(彦謙)이고 호(號)는 양곡(陽谷)이다. 나면서부터 빼어나고 특이하였으며 나이 겨우 칠팔세에 이미 학문을 좋아하여 나날이 진취함이 있어 스승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글을 짓고 쓰는데 타고 났으니 시구(詩句)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필법은 또한 송설체(松雪體)를 익혔다. 홍치(弘治) 갑자년(1504년)에 진사에 합격하였고 을축년에 연산군(燕山君)이 율시(律詩)로 선비들을 선발할 때 공이 1등이 되었으나 정덕(正德) 병인년에 익명의 투서사건에 따른 옥사가 일어나자 공이 억울하게 체포되어 전시(殿試)에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이해 가을에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자 공은 원종공훈(原從功勳)에 책록되었다.
기사년(1509년)에 별시에 합격하여 권지(權知 : 임시직) 승문원 부정자(副正字)가 되고 곧이어 홍문관에 선발되어 정자(正字)가 되었다. 경오년에 승정원 주서(注書)로 옮겼는데 이조에서 공을 홍문관 박사로 추천하였다. 이때 남쪽국경이 위급하여 조야에 일이 많아 국경의 보고서와 출납하는 문서가 많이 쌓였는데 승정원에서는 공이 사관(史官)의 재주가 민첩하다고 하여 임금께 아뢰어 그대로 주서로 있게 하였다. 승진하여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는데 이 당시 중종이 문치에 확고한 뜻을 가지고 영묘(英廟 : 세종)의 옛 일을 본받아 당시의 문학을 잘하는 선비 7명을 선발하여 장기간의 독서휴가를 주었는데 마지막에 대제학의 평가에 도달한 사람이 5명이고 공도 그중 한명이었다. 계유년에 정언(正言)이 되고 수찬에 임명되었다.
현덕왕후(顯德王后 : 문종의 부인)를 현릉(顯陵 : 문종대왕릉)에 함께 모시지 못한 것이 거의 60년이 되었는데 사림에서는 그 작위와 호칭의 회복을 청하려고 하지 않음이 없었지만 감히 말을 못하였다. 공이 경연(經筵)의 자리에서 처음으로 그 말을 꺼냈는데 말하는 기상이 감정이 복받치고 격앙하니 좌우에서 두려워하며 듣다가, 대간(臺諫)과 시종(侍從)이 뒤쫓아 함께 권하니 오래 지나서 임금의 허락을 얻어서 현릉을 이장하여 종묘에 모시니 당시의 여론이 훌륭하게 여겼다.
가을에 부교리로 승진하고 갑술년에 이조정랑이 되었다. 병자년에 이조에서 아뢰기를 “본조의 낭관(郎官)이 청선(淸選 : 학식이 뛰어난 인재로서 직위는 낮으나 후일 높은 자리에 올라갈 사람을 선발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대간과 시종의 중요함과는 같지 않습니다. 아무개와 같은 사람은 임기의 만료를 기다리지 말고 빈 자리가 있으면 임명하소서.”라고 하자 임금이 허락하였으니 이는 임금의 결점을 채우고 자세히 자문하는 것은 공이 아니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군기시(軍器寺)와 장악원(掌樂院)의 첨정(僉正)을 역임하고 이조에서 공을 대관(臺官)에 추천하자 했으나 품계가 낮아서 어렵게 여기니 임금이 특별히 한 품계를 더해주어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하였다. 병으로 체직되어 성균관 사예(司藝)와 사성(司成)이 되었다. 기묘년에 의정부 사인(舍人)에 추천되어 임명되었다가 뜻밖의 일로 파면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다시 홍문관에 들어가 교리가 되었다. 경진년에 인종(仁宗)을 세자로 책봉하여 높은 학식을 가진 사람을 세자궁의 관리로 선발하니 공이 시강원 보덕(輔德)에 임명되었다. 사간으로 옮겼다가 뜻밖의 일로 체직되어 사복시(司僕寺) 부정(副正)이 되고 또 사인이 되었다. 다시 사헌부 집의(執義)에 임명되고 전한(典翰)으로 옮겼다가 추천되어 세 번이나 사인이 되었다.
신사년에 직제학에 승진 임명되어 예문관 응교(應敎)를 겸하였으니 국가의 제도에 문병(文柄 : 문장을 주관하는 권한과 책임)을 맡은 사람이 의례히 이 관직을 겸하는 것이어서 벼슬아치들이 영예롭게 여겼다. 사소한 일에 연루되어서 사성으로 옮겼다.
겨울에 [명나라] 한림원 수찬 당고(唐皐)등이 명나라 황제의 등극을 반포하는 조서(詔書)를 가지고 오자 조정에서는 용재(容齋) 이행(李荇)을 보내 국경에서 영접하게 되었다. 함께 가는 종사관(從事官)으로 뽑히는 것은 한 시대의 지극히 영예로운 것으로 공(公)과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이 따라갔다가 돌아 왔는데 그들이 지은 글이 중국 사신에게 크게 칭찬을 받았다. 일이 끝나고 돌아와 다시 직제학이 되었다.
임오년에 일본이 시승(詩僧) 대원동당(大原東堂)등을 파견하여 예물을 가지고 찾아오자 대신과 예관이 공을 천거하여 선위사(宣慰使)로 삼았는데 문재(文才)의 아름다움에 먼 나라 사람까지 탄복하였다.
이해 겨울에 당상(堂上)의 품계에 발탁되어 승정원 좌부승지에 임명되었고 계미년에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뜻밖의 일로 파직되었다가 갑신년에 이조참의가 되었다. 이해에 부친상을 당하여 병술년에 탈상(脫喪)을 하고 어머니를 편하게 봉양하고자 전주부윤이 되었다. 기축년에 대제학 이행(李荇)이 임금께 아뢰기를 “ 아무개 같은 사람은 문한(文翰 : 문장)의 직책에 있는 것이 합당하니 오랫동안 낮은 자리에 머물러 두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니 임금께서 특별히 공에게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더하여 한성부 우윤(右尹)에 임명하였다. 며칠 안 되어 임금께서는 예관(禮官)은 모름지기 옛일을 잘 상고할 줄 아는 선비를 기용해야 한다고 하여 특별히 예조참판에 임명하였다.
여름에 성절(聖節)을 축하하기 위해 명나라 서울로 가게 되자, 임금이 말하기를, “늙은 어버이가 있는 사람은 삼백리 밖의 관직에 임명하지 말라는 것이 법에 있다. 아무개는 늙은 어머니가 있는데, 멀리 중국에 보내는 것이 옳겠는가? 교체하라”고 하셨다. 겨울에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고 경인년 가을에 사건에 연루되어 면직되었다.
신묘년에 형조참판이 되고 여름에 예조판서로 승진하였는데 당시 의논하는 사람들이 너무 빨리 승진한다고 말하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바꾸어 임명하였다. 가을에 청홍도(淸洪道 : 충청도) 수군절도사가 되기를 희망하니 이는 장차 어머니를 뵙고 봉양하는데 에 편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신들이 공을 외직에 보임할 수 없다고 하며 머물러 두고 보내지 않으니 공은 즉시 상소를 올려 고향에 돌아가 어머니를 모실 것을 빌고는 사직하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임진년에 홍주목사(洪州牧使)가 되어 낮은 관직을 천하다 여기지 않고 황폐하고 쇠퇴한 것을 수리하여 세우고 은덕을 베풀어 백성들이 와서 모이게 하니 관리와 백성들이 그 은혜를 사모하였다. 어머니는 고향에 있는 것을 즐거워하여 공을 따라 홍주에 가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으므로 공은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봉양하였다.
계사년에 임금께서 공의 뜻을 굽히게 하여 다시 예조참판에 임명하고 말을 타고 속히 올라오도록 명하셨다. 여름에 청홍도 관찰사가 되어 고을을 순방하다가 홍주에 이르자 백성들이 모두 공경하게 이마에 손을 얹고 “우리 공(公)께서 오셨구나!”라고 하였다.
가을에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에 승진하여 한성부 판윤에 임명되었으며 겨울에 지중추부사로 옮기고 [명나라]황태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명나라 서울에 갔다. 예부상서(禮部尙書)인 하언(夏言)은 그 당시 명성이 자자했는데 공이 시(詩)에 능하다는 소리가 있음을 듣고 공이 지은 것을 구해보고는 칭찬을 그치지 않으며 서책을 선물하였다. 우리나라로 돌아와서 임금께서 또 공이 사행(使行)중 지은 원고를 보시고 시 몇 수를 지어서 바치라고 명령하시고는 상을 여러 번 내리셨다.
곧 공조판서가 되었다. 대간에서 공(公)이 중국조정에 들어가 학사들과 함께 시를 주고받은 것 때문에 장차 훗날의 폐단이 있을 것이라 말하며 힘써 고집을 부리니 마침내 교체되어 다시 한성판윤이 되었다. 겨울에 고향에 돌아가 어머니 모시기를 간청하니 임금께서는 관찰사에게 음식물을 넉넉히 지급하고 또 짐꾼과 가마를 내어 어머니를 서울로 보내도록 명령하셨다. 을미년에 형조판서가 되고 여름에 호조로 옮겨 도총관과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임하였고 병신년에는 지의금부사를 겸임하였다.
명나라 황제가 한림원수찬 공용경(龔用卿)등을 보내 태자의 탄생 조서(詔書)를 반포하게 되자 공이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의주에 도착했는데 병으로 사직하니 임금께서는 평양에 머물러 병을 조리하라고 명령하시고 이어 영위사(迎慰使)를 맡기셨다.
정유년에 병조판서가 되고 겨울에 이조판서가 되자 공은 권력 있는 자리에 오래 있는 것을 꺼려서 힘써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얼마 안 되어 특별히 숭정대부(崇政大夫)의 품계에 승진하여 의정부 좌찬성에 임명되고 지경연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임하였다. 공(公)이 지위가 귀해짐에 따라서 도사공(都事公 : 부친)을 의정부좌찬성으로, 판관공(判官公 : 조부)을 병서판서로, 사정공(司正公 : 증조부)을 이조참판으로 추증하였다. 공이 이공(貳公 : 삼정승을 보좌하는 자리)이 국가의 문학을 관장하는 것은 직책과 임무가 모두 무거운 것이라 하여 성의와 정성을 다해 사양하니 임금께서는 “경(卿)은 재주와 덕망이 있는데 어찌 감당하지 못하겠는가?”하고 두터이 격려하시며 허락하지 않았다. 기해년에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다시 좌찬성이 되었으니 반드시 이사(貳師 : 세자의 스승)를 겸직하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봄에 명나라 황제가 태자를 책봉하고 한림원수찬 화찰(華察)등을 파견하여 반포 조서를 가지고 왔다. 공이 원접사로서 압록강 가에서 사신을 맞이하고 떠나보냈는데 접대할 때에 일을 주선하는 것이 예절에 부합될 뿐만 아니라 시를 주고받아 화답하면 곧 중국사신이 칭찬을 하였다. 마침내 서로 눈물을 흘리며 헤어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그 후에 우리나라 사신이 중국에 들어가면 화공(華公)이 반드시 와서 공의 소식을 물었다.
무술년에 성주(星州)의 사각(史閣 : 실록을 보관한 사고)이 불에 타서 춘추관에 소장된 실록을 베껴 쓰고 공에게 봉안(奉安)을 명령하였는데 특별히 제천정(濟川亭)에서 전별연을 베풀어 은총을 내리셨다. 가을에 공이 어머니를 가서 뵙고는 그 많이 늙으신 것을 걱정하여 고향에 머물러 어머니 모시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니 임금께서 조정의 의논을 채택하여 비로소 관직에서 물러나 편히 봉양하도록 허락하셨다.
신축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는데 공(公)은 늙은 나이에 상을 치르니 애통한 마음에 건강을 매우 해치게 되었다. 계묘년에 탈상을 하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임명되었는데 공은 몸에 병이 들어 직무에 나가지 않고자 하였다. 임금께서 특별히 형조판서에 임명하였으나 논의하는 자들이 방해하였다.
갑진년에 인종(仁宗)이 왕위를 잇자 공을 등용하라고 명령하였으나 사람들의 탄핵을 당하여 명령이 실행되지 못하였다. 이 이후로 벼슬살이에 뜻을 두지 않고 한가롭고 자유롭게 사는 것을 편안히 여기어 대나무숲 아래에 깨끗한 집을 지어 만년을 보낼 계획을 세우고 그 집을 이름하기를 퇴휴(退休)라고 하여 그러한 뜻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은 늙어서도 없어지지 않아 서울에서 돌아온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옷깃을 여미고 얼굴빛을 고친 뒤 먼저 임금의 안부가 어떠한지를 물어 보았으며 그 외에 조정에 대하여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임술년(1562년) 11월에 우연히 한질(寒疾 : 추위를 무릅쓴 데서 생긴 병)을 앓다가 그 병으로 인해 일어나지 못하니 실로 22일 임인일 이었다. 향년은 77세이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발고 순수하고 생각과 도량이 온화하고 너그러웠으며 당정하고 중후하며 평온하고 고요하였으며 삼가하고 침묵하여 말이 적었다. 외면으로는 우직함을 지키는 듯하나 내면은 실로 과단성이 있었다. 스스로 절조를 지키는 데에 독실하니 남들이 저절로 공경하고 감히 업신여기지 못하였다.
찬성공이 돌아가신 뒤 어머니를 섬김에 효도를 다하였고 어머니가 이미 늙으셨는데 공이 벼슬길을 따라 멀리 가 있으니 항상 걱정하고 안타깝게 생각하여 어머니를 봉양하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 거의 그냥 보낸 해가 없었다. 남쪽고을의 수령으로 나가서 아름다운 수레를 모시고 맛있는 음식을 올리며 옆을 떠나려 하지 않았지만 임금의 지우(知遇 : 자기의 인품, 재능을 알고 대우해 주는 것)를 입어 외직에 오래있지 않았다. 평소 부모의 뜻에 힘써 순종하고자 하였고 남들이 음식물을 선물하면 곧바로 어머니의 부엌 창고에 다 드려서 마음대로 남에게 베풀고 줄 수 있게 하였다.
부모가 돌아가시자 노비와 전답을 나누어 분가하는데 공은 반드시 늙은 노비와 척박한 땅을 골라 가겼다. 공의 두 형인 세공(世恭)과 세검(世儉)은 모두 80여세이고 공의 나이 또한 거의 80세인데 지붕을 접하고 살았으며 자식과 조카들의 거처도 또한 이웃에 많이 있어서 아침저녁으로 서로 왕래하는 것이 일상사였으니 자못 유공작(柳公綽 : 당나라때 절도사를 지낸 사람) 형제들의 습속이 있었다.
공은 큰형님이 늙어서 부인을 잃은 것을 안타까워하여 항상 의복을 준비하여 드렸고 여러 형들을 위하여 음식그릇들을 갖추어 매월 번갈아 행하였다. 차례가 자식이나 조카에게 이르면 가마로 모시고 산마루나 물가에 가서 시를 읊고 거닐며 늙은 사람, 젊은 사람이 서로 부축하고 이끌고 다녔는데, 이러한 일을 오랫동안 그만두지 않으니 듣는 사람마다 부러워하고 사모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궁핍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을 좋아하여 마치 친척을 보는 것처럼 하니 마을의 춥고 배고프고 호소할 데 없는 사람들을 또한 반드시 도와주고 나서야 그만 두었다. 옛날 어진 이의 서적을 수집하여 사방의 벽에 쌓아두고 많은 서적에 아첨(牙籤 : 책의 표제를 적은 상아로 만든 꼬리표)을 붙이고 공은 그 아래에서 거처하였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바로하고는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읽는데 유별나게 좋아하여서 춥거나 덥거나 그만 두지 않았다. 꽃에 물을 주고 묘목을 심으며 세월이 바뀌는 것을 고요히 관찰하였다.
벼슬아치들 사이에서 선조의 묘비문이나 지문(誌文), 유고(遺稿)의 서문이나 발문(跋文), 건물의 기문(記文), 제액(題額)을 얻어 구하거나 필적을 얻어 병풍을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이 공의 집에 찾아 왔지만 공은 과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응답하기를 꺼려했기 때문에 얻어간 사람이 드물다. 평소 사귀던 사람이 혹 타향에서 사람을 보내 공의 안부를 물어오면 공은 시골 사람의 투박한 의관을 하고 검은 안석(案席)에 기대어 유창하게 언론을 펼치니(晉나라 王澄의 편지에 나오는 휘담주(揮談麈)의 고사) 바라보면 마치 신선세계의 사람 같았다.
병들기 전에 벼슬을 사직하고 상재(桑梓 : 고향)에서 노닐었는데 한 아들과 두 사위가 모두 수령으로 있으며 공을 가까이에서 지극히 봉양하여 맑고 청빈한 복을 이십여 년이나 누렸으니 세상에서 그 영화로움을 부러워하였다.
아! 공의 덕과 재주와 지위와 수명은 어찌 하늘이 공에게 후하게 베푼 것이 아니겠는가마는, 임금이 신하의 죽음을 슬퍼하고 마지막 가는 길을 높이는 것은 유독 공이 사후(死後)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니 군자들은 애석하게 여기노라.
부인 조씨(曺氏)는 승문판교(承文判校) 호(浩)의 따님인데 가정의 규범을 훌륭히 지키고 군자의 배필이 되어 덕을 거스르지 않았다. 공보다 먼저 돌아가셨는데 1남 3녀를 낳았다. 아들 수(遂)는 순창군수를 지냈는데 가정의 가르침을 능히 지켰다. 장녀는 윤의형(尹義衡)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판관 이수(李壽)에게 출가하고 삼녀는 주부 이은(李殷)에게 시집갔다. 군수는 의영고령(義盈庫令) 이진문(李震文)의 딸을 맞이하였고 의형(義衡)은 1녀를 낳아서 참봉 신발(申撥)에게 시집보냈다. 판관은 2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천유(天裕)와 천우(天祐)이고 딸은 어리다. 주부는 1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천황(天貺)이고 장녀는 강대호(姜大虎)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이지(李贄)에게 출가하였다. 측실에 두 아들이 있으니 적(迹)과 미(邇)이다.
계해년 정월 27일 병오일로 날을 가려서 익산군(益山郡) 북쪽 회룡봉(回龍峯)아래의 남향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부인과 함께 모셨다.
장례가 끝난 뒤 군수(장남)가 매우 힘든 모습으로 와서 곡(哭)을 하고는 불후(不朽 : 후세에 전한다는 뜻으로 비석을 세움을 가리킴)의 일을 섬(暹 : 홍섬)에게 상의하며 “그대는 어째서 명(銘)을 짓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공은 즉 우리 아버지 문희공(文僖公)과 옥서(玉署 : 홍문관)의 옛 동료이니 아버지를 통하여 이미 공의 평생의 행적을 들었고 또 일찍이 문장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면서 자주 칭찬하고 추천해주시는 은혜를 입었다. 이로써 공을 가장 상세히 아는데 지금 감히 문장에 능하지 못하다고 하여 사양할 수 없다.
명(銘)하노니,
저 남쪽을 바라보니 산천이 아름답고도 기이하여
이곳에서 나라의 선비 낳았도다.
마음속은 가득하고 밖으로는 빛나게 드러나니
하늘이 부여한 것은 크구나.
그 나머지 일은 아름다운 문장이니 임금을 뜻을 넓히고 임금의 문장을 담당하여
선비중위 으뜸이로구나.
일이 종사에 관계되어 말하기 어려웠는데
비로소 하늘이 우리를 인도하시었네.
정성으로 능히 군주를 깨닫게 하여 현묘(현릉 : 문종 왕후의 능)를 함께 모시니
공이 우리 왕후에게 돌아갔구나.
행실은 효도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온화한 웃음으로 봉양하였고
자식의 직분을 힘써 다하였네.
형제간에 이를 미루어 형과 동생이 능히 화목하니
놀라운 저 형제들의 우애로구나.
어머니가 “아! 아들아, 내가 너를 기다리니 어서 돌아오너라.”하시고
왕께서는 “아! 그대여, 겸허하게 그대를 기다린 지 오래이니 너는 머물러 나를 도우라.” 하셨도다.
왕께서 효도하는 마음을 안타깝게 여기시어 이에 가마로 불러오라고 명령하셨으니
일이 청사(靑史)에 빛나는구나.
훌륭하게 국가를 경영하기를 기대하였는데 어찌 물러가 쉬게 하였는가?
은퇴하여 한가하게 편안히 지내는구나.
깊은 산골짜기에서 세상일을 잊어 버렸지만 꿈속에서도 임금 생각하더니
갑자기 영원히 가버리시네.
용이 돌아들고 범이 돌아보는 곳 물 흐르고 산 있어 기운이 모인 곳
그 중에 공의 묘소 편안하구나.
내가 신도비에 명한 것이 아첨함이 아니니
영원히 상고함이 있으리라.
가정(嘉靖) 43년 갑자(1564년) 6월 일에 아들 수(遂)는 글을 쓴다.
양곡(陽谷)의 장례에 홍섬(洪暹)이 실로 명(銘)을 하고 비석을 세웠는데 그 평생의 사업이 밝게 드러나고 빠진 것이 없다. 다만 그중에 ‘의논하는 사람들이 방해하였다.’ 또 ‘사람들의 탄핵을 만났다.’는 등이 몇 가지 말이 있는데 그 뜻이 밝지 못하여 후세 사람들이 볼 때 그 탄핵한 의논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할 것이고 또한 한번 쫓겨나 다시 기용되지 못한 것은 숨은 까닭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할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드러내어 그 사실을 밝힌다.
중종(中宗) 만년에 윤임(尹任)이 외척의 무인으로서 권세를 마음대로 하고 방자하니 그 더럽고 음란한 행실이 국내에 널리 알려졌다. 공이 일찍이 괴원(槐院 : 승문원)에서 여러 정승들과 만났는데 위(衛)나라의 풍속이 음란하여 세족(世族 : 대대로 벼슬을 하는 높은 집안)의 지위에 있는 자들이 서로 부인과 첩을 간통한 일이 우연히 언급되었다. 공이 말하기를 “요즘 시대에도 이와 같은 사람이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말하니 좌우에서 서로 눈만 쳐다보며 말이 없었다. 윤임이 그 의논을 듣고 놀라서 두려워하며 원한을 품었으니 이 때문에 공을 모함하여 해치려는 모략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게 되었다.
공이 남이 중상(中傷)할까 우려하여 어머니의 봉양을 청하고 남쪽으로 돌아갔는데 다음해 신축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탈상하게 되자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윤임의 세력이 아직도 번창하여 마침내는 저지하는 의논을 당한 것이다. 이때 윤원형(尹元衡)이 또한 외척으로서 나라의 권력을 함께 잡고 있었는데 윤임이 항상 윤원형에게 말하기를 “아무개는 외척을 힘써 배척하는 사람이니 가까이 할 수 없다.”라고 하니 윤원형이 더욱 싫어하였다. 이 때문에 윤임은 비록 패배하여 죽었지만 윤원형의 권력이 더욱 무거워져서 공이 또 사람들의 탄핵을 만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문무가 날로 성해지고 기세가 하늘같으니 만일 상세히 살펴서 기록한다면 훗날 죽고 사는 데에 화가 미칠 것을 걱정하였으므로 붓을 휘둘러 바른 대로 글을 써서 그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공(公)의 정도를 지키고 아부하지 않는 숨은 덕이 후세에 밝혀지지 못하게 하였다. 그 허물은 우리로 말미암은 것이어서 매번 원통하고 슬펐는데 지금은 윤원형도 또한 죽었고 공론(公論)이 크게 신장되어 전후의 사실을 기록하는 것은 그 형세가 그만 둘 수 없는 것이다. 이에 지명(志銘)의 빠진 부분과 [공이 관직에] 기용되고 파직된 사실을 추가로 보충하니 거의 지하에 계신 공을 위로함이 있을 것이고, 그 은둔하고자 했던 허물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만력(萬曆) 갑신년(1584년)에 원임(原任) 영의정 홍섬이 기록하고 114년 뒤 정축년(1697년)에 외가의 후손 덕수(德水) 이선연(李善淵)이 이 군(郡)에 군수로 왔다가 읍에 살고 있는 외가의 현손(玄孫) 이성한(李成漢)과 함께 상의하여 추가로 글을 새기고 이어서 그 종질(從姪) 세영(世榮)에게 쓰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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