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로마 신라를 다시 본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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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2-05-06 21:16 조회2,207회 댓글0건본문
鷄林路 고분서 출토된 寶劍은 트라키아王의 선물
주요내용
新羅에 대한 無知와 모략
신라金씨는 匈奴의 후예
鷄林路 고분서 출토된 寶劍은 트라키아王의 선물
「폭탄주」는 유목민족의 飮酒문화
신라金씨의 시조 金閼智의 탄생설화
사회 중국의 사서 三國志 東夷傳(동이전)을 보면 원래 삼한 사람들은 금보다 구슬을 훨씬 귀하게 여겼다
는데, 왜 신라김씨만 금을 사랑했을까요.
金秉模 유목민들은 항상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권력과 富의 수단인 금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
는 장신구로 만들어 직접 착용하여 과시한 것입니다. 반면 定住농경민족은 기물이나 가옥을 꾸미는 데 금
을 이용했지요. 신라왕족들의 몸 속에는 북방 기마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신라 金문화
의 주인공은 4세기 이후 6세기 초까지의 김씨 왕족입니다. 金씨왕계가 金이라는 성을 붙이게 된 것도 실
상 금과 관련이 있고, 수도를 金城이라고 한 것도 그들이 애호하던 금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權寧弼 신라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된 금제품에서는 스키타이-흉노 문화와의 연결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
다. 특히 1973년 계림로 14호분에서 출토된 길이 30cm의 황금 장식 보검은 칼과 칼집을 모두 금테로 장
식하고 칼자루에 紅瑪瑙(홍마노)를 嵌入(감입)한 세계적 명품입니다. 이런 모양의 보검은 훈族의 아틸라
王이 활약하던 5세기에 그리스, 로마, 이집트, 西아시아에서 유행했다고 합니다. 東아시아에서는 경주에
서만 발견되었는데,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근처의 보로워에 지방에서 몇 점의 발굴 사례를 보이고, 그밖
에는 실크로드上의 키질 벽화에 묘사되어 있을 뿐입니다.
사회 계림로 14호분의 주인공은 어떻게 세계적으로도 이런 희귀한 황금보검을 입수했을까요. 「로마문화
왕국-신라」의 저자 요시미즈 츠네오(由水常雄)씨는 지금의 불가리아에 있던 트라키아의 켈트族 왕이 주
문생산을 하여 신라 왕가에 선물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런 귀중품을 무역상 수준에
서 취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트라키아 王의 사절이 황금보검을 휴대하고 직접 신라에 왔든지, 신라 사
신이 트라키아에 가서 하사받았든지 둘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李仁淑 요시미즈씨는 트라키아 王이 금세공기술자를 신라에 보내면서 호위병으로서 흉노족을 썼을지 모
른다고 추리했습니다. 만약 그러했다면 그 금세공기술자는 그리스인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금세공
에 관한 한 그리스인들이 탁월했으니까요. 그리크 골드(Greek Gold)로 유명한 그리스에는 원래 금이 많
이 산출되지 않아서 그리스인들은 실제로 금을 풍부하게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카자흐스탄
지역인 알타이 산맥의 금産地까지 와서 금을 구해 갔음은 헤로도투스가 저술한 「역사」에 기록되어 있
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도 금의 공급처를 구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신라에서는 개·고양이에게도 금목걸이를 해준다」
사회 신라는 어떻게 금을 확보했습니까.
權寧弼 고대 신라인들은 경주 인근의 태화강·형산강 유역에서 풍부하게 나오던 사금을 사용하여 자유자
재로 금제품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당시 아시아는 물론이고 서방에까지 널리 알려졌습니다. 아
랍인들의 기록을 보면 「신라는 개나 고양이에게도 금목걸이를 해주는 부유한 나라」라고 했고, 가까운
왜국에서도 신라로부터 금을 수입해 간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李仁淑 적석목곽분에서는 금제품과 함께 서양의 유리그릇들도 출토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東아시아 세
계에서는 유일하게 신라 고분에서만 발견되는 로만 글라스입니다. 동부 지중해 연안 팔레스타인에서 만
들어진 것들입니다. 로만 글라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황남대총(제98호 고분) 남분에서 출토된 鳳首形
유리병(사진 참조)입니다. 지중해 지역에서 유행한 형태로서 손잡이가 하나 달렸는데, 포도주를 담는 병
으로 쓰였습니다. 그곳에서는 봉수형 유리병을 오이노코에(Oinocoe)라고 하죠. 타원형 몸체에 나팔꽃처
럼 벌어진 끝을 둥글게 말아서 처리한 口緣(구연·아가리), 따로 붙인 굽, 목에 가는 선을 돌리는 등 유리
공의 유창한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습니다. 담록색의 투명도가 높은 유리질에 器形이 안정되고 우
아합니다.
金秉模 오이노코에는 그리스語로 포도주를 따르는 주전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신라왕족들은 地中海
風의 오이노코에를 기울여 포도주를 마시고 페르시아 노래를 불렀다 해도 하나도 놀랄 일이 아닙니다. 신
라 고분에는 서역의 악기도 출토되고 있습니다.
申瀅植 신라에는 적지 않은 서역사람이 들어와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 증거가 고고학적으로는 신라 괘릉
의 서역인 모습의 石像(석상)이고, 문학적으로는 處容歌(처용가)가 아닙니까.
權寧弼 오이노코에는 聖書(성서)시대의 지중해 연안에서 聖水(성수)를 담는 용기로 쓰였죠.
사회 신라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을까요.
申瀅植 唐太宗 때 중국에서 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트리우스敎(景敎)가 들어와 있었으니까 통일신라 시대
의 사람들도 기독교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겠지요.
李仁淑 로만 글라스는 신라와 지중해 세계의 교류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증거물입니다. 경주의 금관
총, 금령총, 서봉총, 천마총, 황남대총에서 30점 가량 출토되었습니다. 특히 황남대총에서는 鳳首形 유리
병과 함께 지그재그 무늬 장식의 비커 컵도 출토되었습니다.
權寧弼 신라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된 유리그릇들은 後期 로만 글라스입니다. 그 중요 산지는 오늘날의 이
스라엘, 레바논, 시리아 지역 등을 중심으로 한 동부 지중해 연안 지역이죠. 지중해 연안에서 제작된 로
만 글라스는 서역계 상인들에 의해 스텝 루트(초원의 길) 또는 海路(해로)를 통해 신라로 공급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신라와 가야 지역에서만 출토되는 角杯
사회 신라와 가야의 고분에서는 금제품과 유리 제품 이외에도 角杯가 많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角杯는 이
상하게도 부여, 고구려, 백제의 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금관, 금동관이 신라·가야 지역에
서만 유행했다는 사실과 관련지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角杯는 신라·가야 사회에서 금관이 사
용되던 어떤 의식에서 반드시 있었을 음주가무에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각배를 사용하게 된 사
회적 분위기나 전통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또한 신라, 가야 이전 시대인 청동기·철기 시대 유적에서 왜
금관과 각배가 발견되지 않았을까요? 이것은 바로 고인돌(支石墓)을 만들었던 토착민 사회에서는 존재하
지 않았던 각배가 갑자기 신라, 가야에 등장하게 된 문화현상을 풀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각
배의 최초 사용자 昔脫解는 어디로부터 온 인물일까요.
申瀅植 三國遺事 가락국기에 의하면 석탈해는 왜국 동북천리에 있는 다파니국 사람인데 배를 타고 남하
하여 먼저 가락국에 도착했습니다. 그 당시 가락국의 왕은 김수로였습니다. 석탈해는 왕권을 놓고 김수로
와 다투다가 패해 신라 땅 阿珍浦(아진포)에 도착했습니다. 김수로와 석탈해의 재주 겨루기에 얽힌 다음
과 같은 설화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탈해가 매로 변하자 수로는 독수리가 되고, 또 탈해가 참새가 되니 수로는 어느새 매가 되었다. 이 사이
에 조금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잠시 후 탈해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자 수로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
다. 탈해는 마침내 엎드려 항복했다>
金秉模 인간은 새가 될 수 없죠. 그러나 인간이 동물로 변신하는 설화는 야쿠트족 북방 기마민족 샤먼들
간에는 우열을 매기는 데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昔脫解와 金首露의 변신 경쟁과 시베리아 샤먼
의 설화가 똑같은 것을 보면 석탈해와 김수로의 정신적·문화적 고향이 시베리아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
다.
申瀅植 어떻든 각배는 1세기경에 이미 사용되었고, 부정한 일을 알아내는 힘, 초자연적인 능력을 지닌 물
건으로 취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외국인 昔脫解는 지혜가 뛰어나 신라 제2대 왕인 南海 次次雄
(남해 차차웅)이 공주를 주어 사위가 된 인물입니다. 脫解는 제3대 왕인 유리왕이 죽고 나서 신라 제4대
왕이 되었습니다. 그처럼 비범하여 왕위에 오른 사람이 각배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각배의 성격
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즉, 각배는 왕-지혜-超자연성과 연관된 물건입니다.
▣ 고맙습니다. - 김재원
▣ 김영환 -
▣ 김재익 -
▣ 김주회 -
주요내용
新羅에 대한 無知와 모략
신라金씨는 匈奴의 후예
鷄林路 고분서 출토된 寶劍은 트라키아王의 선물
「폭탄주」는 유목민족의 飮酒문화
신라金씨의 시조 金閼智의 탄생설화
사회 중국의 사서 三國志 東夷傳(동이전)을 보면 원래 삼한 사람들은 금보다 구슬을 훨씬 귀하게 여겼다
는데, 왜 신라김씨만 금을 사랑했을까요.
金秉模 유목민들은 항상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권력과 富의 수단인 금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
는 장신구로 만들어 직접 착용하여 과시한 것입니다. 반면 定住농경민족은 기물이나 가옥을 꾸미는 데 금
을 이용했지요. 신라왕족들의 몸 속에는 북방 기마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신라 金문화
의 주인공은 4세기 이후 6세기 초까지의 김씨 왕족입니다. 金씨왕계가 金이라는 성을 붙이게 된 것도 실
상 금과 관련이 있고, 수도를 金城이라고 한 것도 그들이 애호하던 금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權寧弼 신라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된 금제품에서는 스키타이-흉노 문화와의 연결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
다. 특히 1973년 계림로 14호분에서 출토된 길이 30cm의 황금 장식 보검은 칼과 칼집을 모두 금테로 장
식하고 칼자루에 紅瑪瑙(홍마노)를 嵌入(감입)한 세계적 명품입니다. 이런 모양의 보검은 훈族의 아틸라
王이 활약하던 5세기에 그리스, 로마, 이집트, 西아시아에서 유행했다고 합니다. 東아시아에서는 경주에
서만 발견되었는데,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근처의 보로워에 지방에서 몇 점의 발굴 사례를 보이고, 그밖
에는 실크로드上의 키질 벽화에 묘사되어 있을 뿐입니다.
사회 계림로 14호분의 주인공은 어떻게 세계적으로도 이런 희귀한 황금보검을 입수했을까요. 「로마문화
왕국-신라」의 저자 요시미즈 츠네오(由水常雄)씨는 지금의 불가리아에 있던 트라키아의 켈트族 왕이 주
문생산을 하여 신라 왕가에 선물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런 귀중품을 무역상 수준에
서 취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트라키아 王의 사절이 황금보검을 휴대하고 직접 신라에 왔든지, 신라 사
신이 트라키아에 가서 하사받았든지 둘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李仁淑 요시미즈씨는 트라키아 王이 금세공기술자를 신라에 보내면서 호위병으로서 흉노족을 썼을지 모
른다고 추리했습니다. 만약 그러했다면 그 금세공기술자는 그리스인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금세공
에 관한 한 그리스인들이 탁월했으니까요. 그리크 골드(Greek Gold)로 유명한 그리스에는 원래 금이 많
이 산출되지 않아서 그리스인들은 실제로 금을 풍부하게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카자흐스탄
지역인 알타이 산맥의 금産地까지 와서 금을 구해 갔음은 헤로도투스가 저술한 「역사」에 기록되어 있
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도 금의 공급처를 구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신라에서는 개·고양이에게도 금목걸이를 해준다」
사회 신라는 어떻게 금을 확보했습니까.
權寧弼 고대 신라인들은 경주 인근의 태화강·형산강 유역에서 풍부하게 나오던 사금을 사용하여 자유자
재로 금제품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당시 아시아는 물론이고 서방에까지 널리 알려졌습니다. 아
랍인들의 기록을 보면 「신라는 개나 고양이에게도 금목걸이를 해주는 부유한 나라」라고 했고, 가까운
왜국에서도 신라로부터 금을 수입해 간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李仁淑 적석목곽분에서는 금제품과 함께 서양의 유리그릇들도 출토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東아시아 세
계에서는 유일하게 신라 고분에서만 발견되는 로만 글라스입니다. 동부 지중해 연안 팔레스타인에서 만
들어진 것들입니다. 로만 글라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황남대총(제98호 고분) 남분에서 출토된 鳳首形
유리병(사진 참조)입니다. 지중해 지역에서 유행한 형태로서 손잡이가 하나 달렸는데, 포도주를 담는 병
으로 쓰였습니다. 그곳에서는 봉수형 유리병을 오이노코에(Oinocoe)라고 하죠. 타원형 몸체에 나팔꽃처
럼 벌어진 끝을 둥글게 말아서 처리한 口緣(구연·아가리), 따로 붙인 굽, 목에 가는 선을 돌리는 등 유리
공의 유창한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습니다. 담록색의 투명도가 높은 유리질에 器形이 안정되고 우
아합니다.
金秉模 오이노코에는 그리스語로 포도주를 따르는 주전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신라왕족들은 地中海
風의 오이노코에를 기울여 포도주를 마시고 페르시아 노래를 불렀다 해도 하나도 놀랄 일이 아닙니다. 신
라 고분에는 서역의 악기도 출토되고 있습니다.
申瀅植 신라에는 적지 않은 서역사람이 들어와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 증거가 고고학적으로는 신라 괘릉
의 서역인 모습의 石像(석상)이고, 문학적으로는 處容歌(처용가)가 아닙니까.
權寧弼 오이노코에는 聖書(성서)시대의 지중해 연안에서 聖水(성수)를 담는 용기로 쓰였죠.
사회 신라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을까요.
申瀅植 唐太宗 때 중국에서 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트리우스敎(景敎)가 들어와 있었으니까 통일신라 시대
의 사람들도 기독교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겠지요.
李仁淑 로만 글라스는 신라와 지중해 세계의 교류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증거물입니다. 경주의 금관
총, 금령총, 서봉총, 천마총, 황남대총에서 30점 가량 출토되었습니다. 특히 황남대총에서는 鳳首形 유리
병과 함께 지그재그 무늬 장식의 비커 컵도 출토되었습니다.
權寧弼 신라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된 유리그릇들은 後期 로만 글라스입니다. 그 중요 산지는 오늘날의 이
스라엘, 레바논, 시리아 지역 등을 중심으로 한 동부 지중해 연안 지역이죠. 지중해 연안에서 제작된 로
만 글라스는 서역계 상인들에 의해 스텝 루트(초원의 길) 또는 海路(해로)를 통해 신라로 공급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신라와 가야 지역에서만 출토되는 角杯
사회 신라와 가야의 고분에서는 금제품과 유리 제품 이외에도 角杯가 많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角杯는 이
상하게도 부여, 고구려, 백제의 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금관, 금동관이 신라·가야 지역에
서만 유행했다는 사실과 관련지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角杯는 신라·가야 사회에서 금관이 사
용되던 어떤 의식에서 반드시 있었을 음주가무에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각배를 사용하게 된 사
회적 분위기나 전통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또한 신라, 가야 이전 시대인 청동기·철기 시대 유적에서 왜
금관과 각배가 발견되지 않았을까요? 이것은 바로 고인돌(支石墓)을 만들었던 토착민 사회에서는 존재하
지 않았던 각배가 갑자기 신라, 가야에 등장하게 된 문화현상을 풀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각
배의 최초 사용자 昔脫解는 어디로부터 온 인물일까요.
申瀅植 三國遺事 가락국기에 의하면 석탈해는 왜국 동북천리에 있는 다파니국 사람인데 배를 타고 남하
하여 먼저 가락국에 도착했습니다. 그 당시 가락국의 왕은 김수로였습니다. 석탈해는 왕권을 놓고 김수로
와 다투다가 패해 신라 땅 阿珍浦(아진포)에 도착했습니다. 김수로와 석탈해의 재주 겨루기에 얽힌 다음
과 같은 설화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탈해가 매로 변하자 수로는 독수리가 되고, 또 탈해가 참새가 되니 수로는 어느새 매가 되었다. 이 사이
에 조금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잠시 후 탈해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자 수로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
다. 탈해는 마침내 엎드려 항복했다>
金秉模 인간은 새가 될 수 없죠. 그러나 인간이 동물로 변신하는 설화는 야쿠트족 북방 기마민족 샤먼들
간에는 우열을 매기는 데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昔脫解와 金首露의 변신 경쟁과 시베리아 샤먼
의 설화가 똑같은 것을 보면 석탈해와 김수로의 정신적·문화적 고향이 시베리아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
다.
申瀅植 어떻든 각배는 1세기경에 이미 사용되었고, 부정한 일을 알아내는 힘, 초자연적인 능력을 지닌 물
건으로 취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외국인 昔脫解는 지혜가 뛰어나 신라 제2대 왕인 南海 次次雄
(남해 차차웅)이 공주를 주어 사위가 된 인물입니다. 脫解는 제3대 왕인 유리왕이 죽고 나서 신라 제4대
왕이 되었습니다. 그처럼 비범하여 왕위에 오른 사람이 각배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각배의 성격
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즉, 각배는 왕-지혜-超자연성과 연관된 물건입니다.
▣ 고맙습니다. - 김재원
▣ 김영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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