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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외갓댁 고모댁 (22) 양성이씨 이옥의 강릉대첩과 문온공(김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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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9-04 11:21 조회1,4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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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李沃)의 강릉대첩 의미와 묻힌 사실들  -

 

윤만씨가 게재했던 글입니다.

 

 


  ‘양성이씨정절공종회’ 카페에서 퍼온 글입니다. 문온공(휘 김구용)과 정절공(휘 이옥)과의 관계를 사실에 입각하여 기술한 자료입니다. 정절공(휘 이옥)은 공소공(휘 이사검)의 아버지이고, 공소공은 직제학공 대은암(휘 김맹헌)의 장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양성이씨정절공종회’의 전언으로 공소공의 외아들 이휘(김맹헌의 처남)는 그의 처남인 이개 그리고 성상문·박팽년 등과 함께 사육신 사건에 연루되어 능지처참의 형을 받았으나 직계후손이 전남 나주로 내려가 숨어 살다가 그곳에서 훌륭하게 뿌리를 내리고 집성촌을 이뤘으며 많은 수의 학자도 배출하였다는 새로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二七,  “李沃 侍中春富之子也 侍中被誅 沃編隸江陵府 是時倭寇 來泊東海 焚蕩州郡 民物皆爭避之 府前郊多大樹 沃夜令 人取矢數百分揷於樹 翌日脫喪服馳馬而出至海口 發數矢射敵 佯敗奔人樹間 賊如雲而集 一身當之 抽矢而樹 縱橫馳突 自朝至暮 苦戰不巳 弦不虛開 射之必中 死者如麻 自是賊不犯境 一道賴以安 朝廷嘉而官之” 慵齋叢話 中에서 


  27. 이옥(李沃)은 시중(侍中) 춘부(春富)의 아들이다. 시중이 사형을 당하고 沃은 강릉부(江陵府)의 하예(下隸)로 편입되었다. 이 때에 倭寇(왜구)가 와서 東海(동해)에 停泊(정박)하고는 고을들을 함부로 불지르고 노략질하니 백성들은 다투어 피난하였다. 府(부)의 앞 들판에는 큰 나무가 많았다. 沃이 밤에 사람들을 시켜 화살 수백개를 가져다가 나누어 나무에 꽂아두게 하였다. 이튿날 상복을 벗고 말을 달려 바다어귀에 나갔다. 화살 두어 개를 적에게 발사하다가 거짓 패한 체하여 달아나 나무 사이로 들어갔다. 賊(적)이 구름처럼 모여왔다. 沃이 한 몸으로 이에 맞서 화살을 뽑아 쏘면서 가로 세로 달려 激突(격돌)하였다. 아침부터 저녁 때까지 애써 싸워서 그치지 아니하였는데 화살을 헛당기는 일이 없었다. 쏘기만 하면 반드시 맞히니 적의 죽은 자가 亂麻(난마)와 같았다. 이로부터 왜적이 境內(경내)를 침범하지 못하게 되어 한 道가 힘입어 평안할 수 있었다. 조정에서 그의 戰功(전공)을 嘉尙(가상)하게 여겨 그에게 벼슬을 주었다.

  성현(成俔)이 쓴 용재총화(慵齋叢話)의 기사 한토막이다.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에는 記事의 골격은 같지만 文句가 약간씩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고려사절요의 기사를 보면, <高麗史節要 卷之二十九> “倭寇江陵府 及 盈德原二縣 時 李春富子沃 沒爲東界官奴 及倭寇至 我軍望風奔潰 府使按廉 聞沃勇銳 授兵使擊之 沃 力戰却之 王賜鞍馬 免其役”


“왜적이 강릉부와 영덕, 덕원의 두 고을에 쳐들어왔다. 이 때 이춘부의 아들 옥이 몰수되어 동계의 관노가 되었는데 왜적이 쳐들어오니 우리 군사는 풍문만 듣고도 패하여 달아났다. 부사와 안렴사가 옥이 용맹스럽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주어 이를 치게하니 옥이 힘을 다하여 싸워 적을 물리쳤다. 왕이 안장 갖춘 말을 내려주고 그 역을 면하여 주었다”

  즉, 용재총화에서처럼 구체적인 전투상황은 없지만 왜적이 쳐들어온 지역이 강릉, 영덕, 덕원 등 동해안의 광범위한 지역이라는 것, 그리고 전투를 여러번 치뤘지만 우리 군사가 계속 패한 상태에서 왜적이 쳐들어온다는 소문만으로도 우리 군사들은 달아나는 급박한 상황이었다는 점, 그런데 이 때 어떤 사건으로 인하여 강릉부의 관노로 편입된 李沃이란 인물이 용맹스럽다는 것을 평소에 잘 알고 있는 부사와 안렴사가 이옥에게 군사를 주고 나가 싸워줄 것을 부탁, 활로 적의 주력부대를 섬멸하여 물리쳤다는 점은 正史라 하는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에서 확인된다.

  여기에서 역사 속에 묻혀버린 몇몇 사실들을 당시 기사를 토대로 재구성해 보면,

  먼저 당시 江陵府를 책임지고 있던 府使와 안렴사가 과연 누구였는가 하는 것이다. ‘고려사절요’와 ‘조선왕조실록’ 등의 문헌에 당시 강릉도에 발령받은 인물들은 황군서와 곽의, 그리고 김구용 등이 나타난다. 이중에 조선조 초기 명재상으로 손꼽히는 황희 정승의 부친인 황군서가 “행자헌대부(行資憲大夫) 판강릉대도호부사(判江陵大都護府事)”로 기록되어 있는데 황희가 1363년(공민왕 12년) 개성에서 태어났으니 황군서가 강릉부사로 있던 시기가 1372년을 전후해서 맡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황군서의 경우는 부임시기가 명확하지 않아 일단 제외할 수밖에 없다. 다음에 부임시기가 확실한 인물로는 곽의(郭儀)가 1368년 삭방 강릉도 안찰사(朔方江陵道按察使)로 임명된 기록이 보인다. 곽의는 현풍 출신으로 靈山에 있던 신돈의 아버지 무덤을 잘 관리해 준 덕으로 신돈에게 발탁되어 이 때 강릉도안찰사로 부임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곽의 또한 1372년 까지 4년간이나 근무했는지도 의문이고 신돈의 측근이라면 신돈의 실각과 함께 벼슬에서 물러났을 가능성도 있다.

  다음에 가장 확실한 인물은 김구용(金九容 1338~1384)인데 그는 ‘고려사절요’에 “1371년 민부의령 겸 성균직강이 되고 같은 해 가을 강릉도안렴사가 되었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경기도 여주 태생의 김구용은 詩文에 뛰어났으며 목은 이색, 삼봉 정도전과 친하게 지냈고 정몽주, 이숭인, 이존오, 하륜 등과 우의를 돈독히 하여 조석으로 경론을 폈다고 하는데 1355년 등과하여 덕령부 주부에 제수되었고 1363년 정언이 되었으며 1368년 전교부령을 거쳐 1371년 가을 무렵 강릉도안렴사로 부임받은 것이다. 그런데 부임하고 몇 개월 뒤 왜적이 침입하여 큰 위기를 맞이했고 때마침 관노로 와 있던 이옥이 力戰(역전)하여 풍전등화 같았던 강릉지역을 지킬 수 있었고 임기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김구용은 그 후 1375년부터 약 7년간 母鄕(여주)에 머물며 江, 山, 雪, 月, 風, 花의 興을 즐기며 六友堂에서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이옥도  강릉부에 관노로 편입되기 전, 1371년까지는 구체적으로 어떤 벼슬을 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김구용과 年齡代(연령대)도 비슷하고 부친이 문하시중(現 국무총리급)으로 있었기 때문에 서로 상당한 친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더구나 ‘고려사절요’에 보면 1371년(공민왕 20년) 윤3월 “이옥이 龍遁野(용둔야)에서 활을 잘 쏘아 王으로부터 鞍馬(안마)를 下賜(하사)받았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공민왕과 당시 文武百官이 함께한 사냥놀이(또는 활쏘기 대회)에서 名弓(명궁)으로 임금으로부터 큰 상을 받은 인물을 김구용이 모를 리가 없다.

  따라서 당시 전형적인 文人인 김구용으로서는 平和時에는 牧民官이였을지라도 싸움에 이골이 난 대규모 왜구를 상대로 영토를 지키기에는 무리였을 것이다. 다행이 우연이였는지, 고의로(누군가의 안배에 의해) 강릉에 배속시켰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문무 겸비한 명궁 이옥이 강릉부에 편입된 덕에 동해안 일대는 왜구침입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킬 수가 있었다.

  다음은 강릉, 덕원, 영덕 일대 즉, 동해안 전역을 점령[停泊]하고 관청이 있던 강릉부(당시 江陵府는 강원도 영동지역 전체를 관할함)를 집중 공략하던 적을 어떻게 홀홀단신(옆에서 도와 준 군사들은 있었겠지만)으로 물리쳤는가 하는 점이다.

  記事에는 숲에 많은 화살을 감추어 두고 적을 유인하여 백발백중 명중시켰다고 했는데,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숲에는 많은 군사들이 매복되어 있는 것처럼 적의 눈을 속이고 적의 주력부대를 숲 가까이 유인했을 것이다. 그리고 隱閉된 상태에서 미리 감추어 둔 화살로 적의 우두머리들을 쓰러뜨린다. 일본의 역사를 보면 그들은 전투에서 지휘자가 죽으면 급격히 戰意를 상실하고 무조건 항복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동해안 전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쳐들어 온 대규모 선단의 왜구였다 하더라도 주력부대는 관청이 있는 강릉부로 몰렸을 것이고 강릉부만 접수하면 영동지역은 지정학적으로 한동안 그들의 점령지가 되어 개성의 중앙정부에서도 쉽게 되찾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바로 이 絶大絶命의 위기에서 안렴사 김구용이옥에게 적의 주력부대를 활로 방어해 줄  것을 부탁했을 것이고 이옥은 평소 갈고 닦은 명궁실력으로 적의 주력부대를 유인하여 활로 우두머리급 왜구들을 쏘아 맞춘 것이다. 주력부대에서 대장과 참모들을 잃은 왜구는 급히 퇴거를 서둘렀을 것이고 다른 지역에 주둔해 있던 같은 무리의 왜구들도 부랴부랴 도망가며 강릉에 신궁(神弓)이 지키고 있다는 것을 널리 알렸을 것이다. 적을 물리친 뒤 안렴사 김구용은 그 사실을 조정에 알렸을 것이고 공민왕은 한 때 절대적으로 신임했던 門下侍中 이춘부의 長男이 官奴의 몸으로 대규모 왜구를 섬멸하고 江陵道를 지켰다는 사실에 감동하여 관노의 신분에서 풀어주고 안장 갖춘 말을 하사함과 더불어 일가친척 모두를 복권시켜 준 것이다. 이옥은 그 후 좌상시(正三品)를 거쳐 강릉도절제사를 역임하며, 동해안을 오랜 기간 왜구로부터 지켰다. 충실히 동해안 방어에 전념하는 사이 조정에서는 권력다툼이 일어나 결국 이성계 장군이 권력을 차지하게 되었고 고려는 서서히 그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글쓴이 : 양성이씨대종회 청년회장, 정절공종회 부회장 겸 카페운영자 이영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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