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한국학 [성씨인물]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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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4-24 16:40 조회2,435회 댓글0건본문
디지털한국학 성씨인물 발췌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 성씨인물
안동김씨 중 우리 선안동김씨 선조분들만 모아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선조 휘자를 몰라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 참고자료로 활용하기 위해서 정리하였습니다.
안동(安東) 김씨의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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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진(金嘉鎭)
★문온) 김경운(金慶雲)
김계광(金啓光)
김계행(金係行)
★안렴) 김공망(金公望)
★군사) 김광국(金光國)
★도평) 김광수(金光粹){1}
김광욱(金光煜)
김광찬(金光燦)
김광혁(金光爀)
김광현(金光炫)
★익원) 김구(金九){5}
★안정) 김구덕(金九德)
★문온) 김구용(金九容)
김근순(金近淳)
김기동(金起東)
김기호(金起浩)
김난순(金蘭淳)
★안정) 김뉴(金紐)
김달순(金達淳)
★익원) 김대래(金大來)
★문온) 김대섭(金大涉)
★익원) 김덕룡(金德龍)
김덕진(金德鎭){2}
김덕한(金德漢)
★군사) 김돈(金墩)
★제학) 김득신(金得臣){1}
김매순(金邁淳)
김면호(金勉浩)
김명진(金明鎭)
김문근(金汶根)
김문순(金文淳)
★고려조) 김방경(金方慶)
김방행(金方行)
김번(金#번11)
★제학) 김변광(金#변07光)
김병교(金炳喬)
김병국(金炳國)
김병기(金炳冀){2}
김병기(金炳基){1}
김병덕(金炳德)
김병수(金炳秀)
김병시(金炳始)
김병연(金炳淵)
김병욱(金炳昱)
김병익(金炳翊)
김병조(金炳朝){1}
김병주(金炳#주33)
김병지(金炳地)
김병필(金炳弼)
김병학(金炳學){1}
김보근(金輔根)
김복한(金福漢)
★안렴) 김사렴(金士廉)
★고려조) 김사안(金士安)
★도평) 김사원(金士元){2}
★익원) 김사형(金士衡)
김상복(金尙宓){1}
김상용(金尙容){1}
김상준(金尙寯)
김상헌(金尙憲){1}
김석규(金錫圭)
김석근(金晳根)
김석진(金奭鎭)
김선평(金宣平)
★부사) 김선필(金善弼)
김선행(金善行)
김성근(金聲根){1}
★익원) 김성동(金誠童)
★서운) 김성립(金誠立)
김성익(金盛益)
김성적(金盛迪)
김성진(金晟鎭){2}
김세균(金世均)
★안렴) 김세익(金世翊)
★서운) 김수(金#수51){4}
★익원) 김수경(金壽卿)
김수근(金洙根){1}
★익원) 김수동(金壽童)
★전서) 김수령(金壽寧)
김수익(金壽翼)
김수인(金壽仁){2}
김수증(金壽增)
김수창(金壽昌)
김수항(金壽恒)
김수홍(金壽弘)
김수흥(金壽興)
★고려조) 김순(金恂){5}
김숭겸(金崇謙)
김승규(金昇圭)
★고려조) 김승용(金承用)
★고려조) 김승택(金承澤)
김시걸(金時傑)
★제학) 김시민(金時敏){1}
김시민(金時敏){2}
★제학) 김시약(金時若)
★제학) 김시양(金時讓)
김시찬(金時粲)
★제학) 김시헌(金時獻)
김시현(金始顯)
★제학) 김시회(金時晦)
김신겸(金信謙)
김양근(金養根)
김양순(金陽淳){2}
김양행(金亮行)
★안렴) 김언(金$언01>{3}1
김영(金瑛){3}
★고려조) 김영돈(金永旽)
김영수(金永銖){1}
김영순(金英淳)
김영행(金令行)
★고려조) 김영후(金永煦)
김옥균(金玉均)
김용겸(金用謙)
김용규(金容圭){2}
김용기(金容基){2}
★ ? ) 김용우(金用雨)
김용진(金容鎭){1}
김용행(金龍行)
김우(金佑){3}
김원행(金元行)
김유근(金#유A0根)
김윤겸(金允謙)
김응근(金鷹根)
김응순(金應淳)
★부사) 김응하(金應河)
★부사) 김응해(金應海)
김이건(金履健)
김이곤(金履坤)
김이교(金履喬)
★도평)김이구(金履矩)
김이도(金履度)
김이례(金履禮)
김이소(金履素)
김이안(金履安)
김이양(金履陽)
김이익(金履翼){2}
김이재(金履載)
김이희(金履禧)
★제학) 김익(金#익12){1}
★전서) 김익정(金益精){1}
김인겸(金仁謙){2}
★익원) 김자점(金自點)
★익원) 김작(金#작16)
★안렴) 김재광(金在光)
★안렴) 김재철(金在喆)
김정(金$정01){6}
김정균(金鼎均)
★군사) 김정일(金鼎一)
★제학) 김제갑(金悌甲)
김제겸(金濟謙)
★고려조) 김제안(金齊顔)
김조근(金祖根){2}
김조순(金祖淳)
★도평) 김종덕(金宗德)
★도평) 김종발(金宗發)
김종진(金宗鎭)
김종한(金宗漢){1}
김좌근(金左根)
김좌진(金佐鎭)
★안렴) 김주(金澍){2}
김주우(金柱宇)
★부사) 김중원(金重元)
김중일(金重一){2}
김중일(金重鎰){1}
김중청(金中淸)
김증한(金曾漢)
★익원) 김질(金#질18){1}
★익원) 김질(金質){2}
★익원) 김찬(金瓚){3}
★고려조) 김창(金敞)
김창도(金昌道)
김창업(金昌業)
김창즙(金昌緝)
김창직(金昌直)
김창집(金昌集)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서운) 김첨(金瞻){2}
★제학) 김치(金緻){2}
김탄행(金坦行)
★안렴) 김태기(金泰基)
김학규(金學奎)
김학순(金學淳)
김학진(金鶴鎭)
김향(金珦)
★제학) 김호(金#호20){2}
김홍근(金弘根)
★서운) 김홍도(金弘度){1}
★문온) 김확(金#확14)
★익원) 김효건(金孝建){1}
★고려조) 김효인(金孝印)
★제학) 김휘(金徽)
★부사) 김흡(金#흡04)
김흥근(金興根)
★서운) 김희수(金希壽){1}
김희순(金羲淳)
순원왕후(純元王后)
철인왕후(哲仁王后)
효현왕후(孝顯王后)
★문온) 김경운(金慶雲)
?∼1624(인조 2).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 구용(九容)의 후손.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응함(應緘)이다.
광해군 때에 무과에 급제하여 1618년 사과(司果)·호군(護軍) 등의 관직에 있으면서, 인목대비(仁穆大妃)폐출상소에 참여하였다. 같은해 용감한 장수로 뽑혀 양계(兩界)의 한 읍에 수령 겸 조방장을 맡게 되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선천부사로 휘하 병사를 이끌고 정충신(鄭忠信) 등과 함께 안현전투(鞍峴戰鬪)에 참여하였는데, 몸을 돌보지 않고 앞장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때의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2등에 훈록되고,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졌으며, 그 특전이 자손에게 세습되었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燃藜室記述. 〈崔珍玉〉
★안렴) 김공망(金公望)
1482(성종 13)∼1528(중종 23). 조선 전기의 문관. 본관은 안동. 자는 위수(渭#수04). 오위부장(五衛副將) 성(城)의 아들이다.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고, 1506년(중종 1)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정자에 임용되었다. 이어서 사헌부·사간원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512년 병조좌랑에 올랐다.
1521년 제용감정(濟用監正)이 되어서는 재물관리를 철저히 하였고, 이어 해주목사가 되어 공부(貢賦)를 탕감하여 민생을 안정시켰고, 형옥(刑獄)을 공평히 처리하여 도내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인근 고을의 수령 중에서 사욕을 취하고자 하여도 김공망이 알고 있다면 두려워할 정도였다고 한다.
5년 동안 선정을 베푼 뒤 신병으로 사직하였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崔完基〉
★군사) 김광국(金光國)
1685(숙종 1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대관(大觀). 승지 준원(俊元)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담(湛)이다.
1735년(영조 1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741년 지평이 되었다.
이듬해 정언을 거쳐 장령·필선·헌납을 역임하고 1755년에 서장관이 되었다.
이듬해 사간에 이어 1759년에 승지, 1760년에 황주목사, 1766년에 회양부사(淮陽府使)가 되었다.
1769년 도승지가 되고 이어 병조참판이 되었다.
1779년(정조 3) 내의원의관이 되었다.
편저로는 《간독 簡牘》이 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李元根〉
★도평) 김광수(金光粹){1}
1468(세조 14)∼1563(명종 18). 조선 중기의 시인. 본관은 안동. 자는 국화(國華), 호는 송은(松隱). 아버지는 지례현감 극해(克諧)이다.
1501년(연산군 7)에 진사가 되었으나 과거에 집착하지 않았다. 고향인 의성의 북촌에 머물면서 시가를 읊조리며 청빈하게 지냈으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여 부근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죽은 뒤 대곡산(大谷山)에 장사지냈는데, 그뒤 외손인 유성룡(柳成龍)이 왕의 명을 받아 제사지내고 묘를 살펴보았다. 의성의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송은집》과 《경심잠 警心箴》이 있다.
참고문헌
國朝人物考, 增補文獻備考. 〈車勇杰〉
★익원) 김구(金九){5}
목 차
간략정보
성장기의 가정환경
항일운동
애국계몽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광복군 운동
해방 후의 정치 활동
참고문헌
* 김구
김구 김구와외국인기자들
김구 김구와이승만
김구 김구와장개석
김구 대한민국임시정부요인환국
김구 동상
김구 인장
김구 장례식
김구 필적
시대 항일기, 대한민국
생몰년 1876-1949(고종13-?)
본관 안동(安東)
자 연상(蓮上)
호 백범(白凡)/연하(蓮下)
시호
활동분야 독립운동가, 정치가
다른 이름 김창암(金昌巖)/김창수(金昌洙)/김구(金龜)/원종(圓宗)/두래(斗來)
1876(고종 13)∼1949. 독립운동가·정치가. 본관은 안동. 아명은 창암(昌巖), 본명은 창수(昌洙), 개명하여 구(龜, 九), 법명은 원종(圓宗), 환속 후에는 두래(斗來)로 고쳤다. 자는 연상(蓮上), 초호(初號)는 연하(蓮下), 호는 백범(白凡). 황해도 해주 백운방(白雲坊)텃골〔基洞〕출신.
1. 성장기의 가정환경
순영(淳永)의 7대독자이며,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 인조 때 삼정승을 지낸 방조(傍祖) 김자점(金自點)이 권세다툼에서 청병(淸兵)을 끌어들였다는 역모죄로 효종의 친국을 받고 1651년 사형당하자, 화를 피하여 선조되는 사람이 그곳으로 옮겨갔다.
4세 때 심한 천연두를 앓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9세에 한글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아버지의 열성으로 집안에 서당을 세우기도 하였다.
14세에 《통감》·《사략》과 병서를 즐겨 읽었으며, 15세에는 정문재(鄭文哉)의 서당에서 본격적인 한학수업에 정진하였고,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벼슬자리를 사고 파는 부패된 세태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 사람으로 뽑혀 제2대교주 최시형(崔時亨)과도 만났다.
< 중 략 >
참고문헌
白凡逸志(金九, 國士院, 1947)
白凡主席最近言論集(嚴恒燮編, 1948)
屠倭實記(嚴恒燮編, 1949)
위대한 韓國人―白凡 金九―(鮮于鎭, 太極出版社, 1972)
白凡語錄(白凡思想硏究所, 思想社, 1973)
大韓民國臨時政府史(李炫熙, 集文堂, 1982)
白凡 金九―생애와 사상―(白凡傳記編纂委員會, 敎文社, 1984)
白凡硏究 제1·2집(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편, 敎文社, 1985·1986). 〈任重彬〉
★안정) 김구덕(金九德)
?∼1428(세종 1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상락군(上洛君) 묘(昴)의 아들이다.
19세에 진사시·생원시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산원(散員)이 되었다. 이어서 사헌부규정(司憲府糾正)·사헌부잡단(司憲府雜端)을 지냈고, 1396년(태조 5) 형조의랑(刑曹議郎)에 올랐다.
이때 형옥을 잘못 처리하였다고 하여 순군옥(巡軍獄)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뒤 외직으로 나가 단양·청풍(淸風:현재의 堤川)·한주(韓州:현재의 韓山) 등 3개 고을의 군수가 되어 선정을 폈고, 정종 때는 사헌부중승(司憲府中丞)이 되어 당시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로서 권력을 부리던 최운해(崔雲海)를 탄핵, 음죽(陰竹)으로 유배를 보냈다. 이어서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에 올랐고, 다시 외직으로 나가 해주·광주·청주목사를 지냈다. 이어서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가 되었는데, 그때 그의 딸이 태종전(太宗殿)에 간택되어 명빈(明嬪)이 되자, 벼슬이 올라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가 되었다.
1412년(태종 12) 한성부윤을 지내고, 이어서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가 되었다.
이듬해 다시 한성부윤을 지내며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윽고 지돈녕부사를 거쳐 판돈녕부사에 이르렀고, 1427년(세종 9)에는 손녀가 세자빈에 간택되었다.
그가 죽자 나라에서는 3일 동안 철조(輟朝)하였고, 조문을 내려 치제하였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여 남과 다투지 않았고 사람을 대함에 예로써 하였다.
문장에 능하였으며, 음악을 좋아하였다. 시호는 안정공(安靖公)이다.
참고문헌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世宗實錄. 〈崔完基
★문온) 김구용(金九容)
1338(충숙왕 복위 7)∼1384(우왕 10). 고려말의 문신. 본관은 안동. 초명은 제민(齊閔), 자는 경지(敬之), 호는 척약재(#척08若齋) 또는 육우당(六友堂). 첨의중찬 방경(方慶)의 현손으로 묘(昴)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16세로 진사에 합격하고, 왕명으로 모란시〔牡丹詩〕를 지어 일등을 하여 왕으로부터 산원직(散員職)을 받았다.
18세에 등제하여 덕녕부주부(德寧府注簿)가 되고, 1367년(공민왕 16)성균관이 중건되고 나서 민부의랑겸성균직강(民部議郎兼成均直講)이 되어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후학의 훈화에 노력하여 성리학을 일으키는 일익을 담당하였다.
1375년(우왕 1) 삼사좌윤(三司左尹)이 되어 이인임(李仁任) 등 권신들이 북원(北元)이 보낸 사절을 맞으려 하자 이숭인·정도전(鄭道傳) 등 당시 친명파와 함께 도당(都堂)에 상서하여 이를 반대하다가 죽주(竹州)에 귀양갔으며, 뒤에 여흥(驪興)으로 옮겨 강호에 노닐며 거처하는 곳을 육우당이라 이름하고 시와 술로 날을 보냈다.
1381년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가 되어 왕의 절제 없는 거둥을 경계하는 글을 올려 직간하였고, 이듬해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다.
1384년 행례사(行禮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는데, 떠날 때 국서와 함께 백금 1백냥과 세저(細苧)·마포 각 50필을 가지고 갔다. 요동에서 체포되어 명나라 서울 남경(南京)으로 압송되었는데, 명나라 태조의 명으로 대리위(大理衛)에 유배되던 도중 노주 영녕현(瀘州永寧縣)에서 병사하였다.
그는 사장(詞章)을 잘하여, 특히 시로 유명하였다. 이색(李穡)은 그의 시를 가리켜 “붓을 대면 구름이나 연기처럼 뭉게뭉게 시가 피어나온다.”고 하였다. 《동문선》에 그의 시 8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 무창시(武昌詩)가 유명하다. 허균(許筠)은 이 시를 들어 청섬(淸贍)하다 하였고, 신위(申緯)도 〈동인논시절구 東人論詩絶句〉에서 그의 시를 들어 감탄하고 있다.
《주관육익 周官六翼》을 찬하였으며, 문집인 《척약재집》이 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牧隱集, 惺#수04詩話, 警修堂集, 韓國漢文學史(李家源, 民衆書館, 1961). 〈朴天圭〉
★안정) 김뉴(金紐)
1420(세종 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자고(子固), 호는 금헌(琴軒)·취헌(翠軒)·쌍계재(雙溪齋)·관후암(觀後庵) 또는 상락거사(上洛居士). 아버지는 중엄(仲淹)이고, 어머니는 조준(趙浚)의 손녀이며 대림(大臨)의 딸이다.
1464년(세조 10) 녹사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황해·평안도의 땅을 개간한 공으로 벼슬에 나가 성균학유가 되었다. 곧 사복직장으로 옮겼으며, 이듬해 호조좌랑으로 《경국대전》 편찬작업을 위해 이전(吏典)을 수교하였고, 또 경차관으로 전라도에 파견되었다.
1466년 발영시·등준시에 을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안효례(安孝禮)·유희익(兪希益) 등과 함께 도성(都城)을 측량하고 지도를 작성하였다.
또한, 예문관직제학으로 《세조실록》·《예종실록》 등을 편찬하는 데 기여함이 컸다.
1470년(성종 1) 완성단계에 있는 《경국대전》을 다시 수교하였다.
1472년 동부승지를 거쳐, 이듬해 참찬관으로 저화법(楮貨法)사용을 강조하는 방안을 주장하였다. 이어 공조참판·충청도관찰사·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1478년에는 대사헌으로 군비확충을 위해 전라도 순천지방에 석보(石堡)를 쌓고 군인을 늘리며, 함경도 회령과 마도달량어란(馬글達梁於蘭)사이에 보를 설치하고 식량을 저축할 것을 제의하여 실천하게 하였다.
1479년 겸성균관동지사가 되고, 1481년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곧 파직되었다.
1484년 행사직이 되고, 이듬해 시를 지어 바쳐 왕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며, 1490년 다시 이조참판이 되었다.
재주가 있고 학문을 좋아하여 글을 잘 지었고, 행서와 초서 등 글씨에 능하였으며, 거문고도 잘 하여 ‘3절(三絶)’이라 불리었고 그림 또한 잘 그렸다. 글씨로는 해동명적(海東名跡)·초로관주(草露貫珠) 등에 모간(模刊)한 것이 있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용12齋叢話, 槿域書畵徵(吳世昌, 啓明俱樂部, 1928). 〈朴定子〉
★익원) 김대래(金大來)
1564(명종 19)∼1608(선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초명은 대유(大猷), 자는 희태(希泰). 아버지는 주(柱)이다.
1585년(선조 18)에 진사가 되고, 1590년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4년에 병조좌랑이 되었으며 이듬해 성지(城池)·기계(器械)의 안찰어사(按察御史)로 평안도에 파견되었다.
1597년에 장령·헌납을 역임하고 1602년 수찬이 된 뒤 집의·사간을 거쳐 1605년에 예빈시정(禮賓寺正)이 되었으며, 그뒤 보덕·필선·홍문관부응교·사인을 거쳐 1608년에는 직제학을 역임하였다. 그해 광해군이 즉위하여 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大北派)가 세력을 잡게 되자 양사(兩司)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즉, “그는 유영경(柳永慶)의 심복으로서 온갖 도의에 어긋난 일을 모의하였는데, 일찍이 적자(嫡子)도 아니요 장자(長子)도 아니라는 말을 공공연히 떠들어대어 감히 왕의 존엄성을 범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마침내 종성에 유배된 뒤 사사(賜死)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신원되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燃藜室記述. 〈李貞一〉
★문온) 김대섭(金大涉)
1549(명종 4)∼1594(선조 2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사정(士亭). 할아버지는 경상도병마절도사 윤종(胤宗)이다.
1573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질병으로 문과 응시를 단념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 행재소로 달려가 왕을 호종하였다.
이듬해 의금부도사가 되었으며, 이어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가 되었다.
이때 명나라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郎) 송응창(宋應昌)이 경략방해비왜군무(經略防海備倭軍務)가 되어 입국함에 이의 접대임무를 맡은 윤근수(尹根壽)밑에서 외교관계의 잡다한 일들을 빈틈없이 수행하다가 격무로 병사하였다.
참고문헌
象村集. 〈文守弘〉
★익원) 김덕룡(金德龍)
1518(중종 13)∼? 조선 명종·선조 때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운보(雲甫), 호는 낙곡(駱谷). 해(瀣)의 아들이다.
1546년(명종 1) 증광시에 갑과로 급제, 봉상시주부·경성판관(鏡城判官)을 거쳐 1557년 암행어사로 평안도에 파견되었다. 이어서 장령으로 인산진첨절제사(麟山鎭僉節制使)가 되었으나, 부적격자로 교체되어 돌아와 부교리에 올랐다.
그뒤 시강원필선·홍문관전한을 거쳐 의주목사·황해도관찰사 등의 외직을 지냈다. 부호군·장례원판결사·동부승지·전라도관찰사·동지중추부사·도승지 등을 거쳐, 1564년 평안도병마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그때 그의 예하 군인 3백여인이 월경하여 야인을 토벌하다 크게 패배하였는데 이로 인해 추고(推考), 파직당하였다.
그뒤 곧 복직되어 평안도관찰사·개성유수 등을 거쳐 1571년(선조 4) 대사헌이 되었다. 평소 효우(孝友)하고 문무를 겸비하였으며, 외직에 있을 때는 엄명으로 다스려 간활(姦猾)이 중지되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榜目. 〈張東翼〉
★군사) 김돈(金墩)
1385(우왕 11)∼1440(세종 22). 조선 초기의 문신·과학자. 본관은 안동. 첨의중찬 방경(方慶)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참의 후(厚)이며, 아버지는 칠양(七陽)이다.
1417년(태종 17)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직제학과 승지를 거쳐 벼슬이 참판·좌승지·인순부윤(仁順府尹)에까지 이르렀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그의 이름을 듣고 불렀으나 사양하였다.
급제하자 임금이 “내가 경을 보고자 하였으나 경이 나를 피하더니 이제는 나의 신하가 되었구나!”라고 기뼈하였다 한다.
1428년(세종 10) 왕명으로 《서한이하역대보계도 西漢以下歷代譜系圖》를 찬진하고, 종학박사와 사성을 역임하였다.
1434년 집현전직제학으로 동활자인 갑인자의 주조에 참여하였으며, 이듬해는 집현전부제학으로 불교의 폐단에 대하여 왕에게 상소하고, 그뒤 부승지가 되었다.
1438년 도승지가 되었으며, 탐라에 있는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여러 차례 외직을 원하였으며, 특히 역마를 보내어 탐라에 있는 어머니를 서울로 모시고 와서 봉양할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한편, 천문관측에 정통하여 간의대(簡儀臺)와 보루각(報漏閣)을 만들 때도 참여하였다. 한때 귀양가는 이숙번(李叔蕃)이 순금띠를 주면서 자신의 구출을 의뢰하자, 여러 방법으로 구출을 모색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세종의 명으로 김조(金兆)와 함께 천추전(千秋殿) 서편 뜰에다 흠경각(欽敬閣)을 창설하고, 종이를 뭉쳐서 산을 만들되 높이가 일곱자 되게 하고, 또 그 안에 옥루기(玉漏器)를 설치하여 바퀴물로써 돌게 하였는데, 해의 도수와 그림자 누수(漏水)의 시각이 하늘의 운행과 조금의 차이도 없었다고 한다.
산의 사방에는 사시(四時)의 경물(景物)과 사람·새·짐승·초목의 형상을 만들어 그 절후에 맞추어놓아 백성이 농경의 어려움을 알도록 하였다.
또, 누기(漏器)를 설치하고 이름을 ‘보루각’이라 하고 이층으로 만들어 삼신(三神)을 그 위에 설치하였는데, 시간을 알릴 때는 종을, 경(更)을 알릴 때는 북을, 점(點)을 알릴 때는 징을 울리게 만들었다.
승지로 7년 동안이나 있으면서 논변이 상세하고 분명하였으며, 집현전출신으로 박학다식하고, 특히 과학기기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학자이었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大東野乘, 海東雜錄. 〈李棕浩〉
★제학) 김득신(金得臣){1}
1604(선조 37)∼1684(숙종 10). 조선 중기의 시인. 본관은 안동. 자는 자공(子公), 호는 백곡(栢谷).
아버지는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치(緻)이며, 어머니는 사천목씨(泗川睦氏)로 첨(詹)의 딸이고, 아내는 경주김씨이다.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노둔한 편이었으나, 아버지의 가르침과 훈도를 받아 서서히 문명을 떨친 인물이다. 당시 한문 사대가인 이식(李植)으로부터 “그대의 시문이 당금의 제일”이라는 평을 들음으로써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공부할 때에 옛 선현과 문인들이 남겨놓은 글들을 많이 읽는 데 치력하였는데, 그 중 〈백이전 伯夷傳〉은 억번이나 읽었다고 하여 자기의 서재를 ‘억만재(億萬齋)’라 이름하였다.
저술이 병자호란 때 많이 타 없어졌으나, 문집인 《백곡집》에는 많은 글들이 전하고 있다. 그 중 시가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문보다는 시에 능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오언·칠언절구를 잘 지었다. 〈용호 龍湖〉·〈구정 龜亭〉·〈전가 田家〉 등은 어촌이나 산촌과 농가의 정경을 그림같이 묘사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시를 잘 지었을 뿐만 아니라 시를 보는 안목도 높아, 《종남총지 終南叢志》 같은 시화도 남겼다.
이에는 어무적(魚無迹)·이행(李荇)·정사룡(鄭士龍)·정철(鄭澈)·권필(權#필25)같은 앞 세대 유명시인 등과 남용익(南龍翼)·김석주(金錫胄)·홍만종(洪萬宗)같은 당대 문사들의 시를 뽑아, 거기에 자기 나름대로의 비평을 덧붙였다.
그리고 그는 술과 부채를 의인화한 가전소설 〈환백장군전 歡伯將軍傳〉과 〈청풍선생전 淸風先生傳〉을 남기기도 했다.
참고문헌
柏谷文集(李家源編, 태학사 영인, 1985)
종남총지연구(허경진, 연세어문학 11, 1978). 〈金泳〉
★고려조) 김방경(金方慶)
목 차
간략정보
성품·행적
삼별초의 난 평정
원의 일본정벌 참여
참고문헌
*김방경 신도비
시대 고려
생몰년 1212-?(강종1-?)
본관 안동(安東)
자 본연(本然)
호
시호 충렬(忠烈)
활동분야 무장, 정치가
다른 이름
1212(강종 1)∼1300(충렬왕 26). 고려 후기의 무장(武將)이며 정치가. 본관은 안동. 자는 본연(本然).
1. 성품·행적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병부상서·한림학사를 지낸 효인(孝印)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었다. 할아버지 민성(敏成)이 양육하였으며, 조금이라도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일이 있으면 땅바닥에 뒹굴면서 울었는데, 소나 말이 그를 피해 지나가니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길 정도였다.
1229년(고종 16)에 음서로 산원 겸 식목녹사(散員兼式目錄事)에 보임됨으로써 관도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당시 시중 최종준(崔宗峻)은 충성스럽고 직언하는 성품을 사랑하여 예우하였으며, 큰일이 있으면 모두 맡겼다. 여
러번 자리를 옮겨 감찰어사에 올랐는데, 우창(右倉)을 감검(監檢)하면서 재상의 청탁도 거절하였다.
1248년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에 부임되어 몽고의 침공을 받자 위도(葦島)에 입보(入保)하였다.
거기에서 해조(海潮)를 막기 위하여 제방을 쌓고, 10여리의 평탄한 지형을 농사에 이용하여 상당한 수확을 거두게 했을 뿐 아니라 빗물을 모아 못을 만들어 우물이 없는 불편을 덜게 하여, 모두 그 지혜를 칭찬하였다.
1263년(원종 4)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당시 정병(政柄)을 잡고 있던 유천우(兪千遇)와 대립하면서 꿋꿋한 의지를 보여주었으나, 상장군에 올라 반주(班主) 전분(田#빈01)의 미움을 사서 지방관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망이 두터워서 얼마 뒤에 형부상서·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어 새 난국의 담당자로 등장하였다.
2. 삼별초의 난 평정
당시 강도(江都)에 천도하여 대몽항쟁을 벌였던 고려는 일단 강화를 한 다음 원나라와 개경환도문제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김준(金俊)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임연(林衍)은 1269년 왕을 퇴위시키고 안경공 창(安慶公#창18)을 즉위시킴으로써, 반원(反元)의 입장을 굳히면서 환도를 거부하고 현상을 유지하는 정책을 쓰려고 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의 강한 반대와 위협에 부닥쳐 원종은 복위하게 되었는데, 그때 사신으로 원나라에 파견되어 이장용(李$장01用)의 천거를 받으면서 고려와 원나라의 군사적 충돌을 막고 사태를 악화시키지 않도록 진력하였다.
1270년 6월에 이르러 개경환도가 강행되자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때 그 토벌의 임무를 맡아 삼별초에 의하여 함락되기 직전의 전주와 나주를 구하고, 진도의 대안에서 토벌에 진력하다가 무고로 개경에 압송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석방되어 상장군을 제수받고 다시 삼별초의 토벌에 힘쓰게 되었는데, 원나라의 원수 아해(阿海)의 후퇴를 막는가 하면, 단독으로 고려군을 이끌고 용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듬해 새로 원나라의 원수로 임명된 흔도(#흔05都)와 더불어 진도를 사방에서 공격하여 삼별초의 토벌에 성공하였다. 이 공로로 수태위 중서시랑 평장사(守太尉中書侍郎平章事)에 올랐다.
이어 탐라로 들어간 삼별초의 잔여세력의 평정을 책임맡아 1273년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에 임명되어 원나라 장수 흔도·홍다구(洪茶丘)와 함께 공격하여, 마침내 삼별초를 완전히 토벌하고 탐라를 평정하였다. 이 공로로 시중에 오르고, 그해 가을 원나라에 들어가 원나라의 세조(世祖)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3. 원의 일본정벌 참여
1274년(충렬왕 즉위년) 10월 원나라의 일본정벌에 도독사(都督使)로서 고려군 8천인을 이끌고 도원수 홀돈(忽敦)의 총지휘 아래 참여하였다. 처음 대마도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리고 이키도(壹岐島)에서도 용전하여 크게 기세를 올렸지만, 심한 풍랑으로 결국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 공로로 상주국(上柱國)이 되고,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가 가직(加職)되었다.
이듬해에 관제의 변화에 따라 첨의중찬 상장군 판전리감찰사사(僉議中贊上將軍判典理監察司事)에 임명되었으며, 1276년에는 성절사로서 원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277년에 위득유(韋得儒)·노진의(盧進義)·김복대(金福大)의 모함을 받아 원나라의 다루가치(達魯花赤) 석말천구(石抹天衢)에 의하여 구금되어 홍다구에게 참혹한 고문을 당하였지만 끝까지 거짓 자백을 하지 않고 백령도에 유배되었다.
그뒤 다시 원나라에 이송되어 원나라의 세조가 충렬왕의 상소에 따라 무죄를 확인함으로써 비로소 방면되어 귀국하였다.
그뒤 중찬(中贊)에 임명되어 수상으로서 임무를 수행하였다.
1280년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원나라로부터 중선대부(中善大夫)·관령고려국도원수(管領高麗國都元帥)의 직임을 받고, 1281년의 제2차일본정벌에 주장(主將)으로 참여하였으나 또다시 실패로 돌아갔다.
1283년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三重大匡僉議中贊判典理司事世子師)로 치사(致仕)하였으며, 이어서 첨의령(僉議令)이 가직되고 상락군 개국공 식읍 일천호 식실봉 삼백호(上洛君開國公食邑一千戶食實封三百戶)에 봉하여졌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東方文化交流史論攷(金庠基, 乙酉文化社, 1948)
三別抄와 그의 亂에 대하여(金庠基, 震檀學報 9·10·13, 1939∼1941)
元寇の新硏究(池內宏, 1931). 〈閔賢九〉
★제학) 김변광(金#변07光)
1694(숙종 2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경실(景實). 할아버지는 승지 구만(龜萬)이다.
어려서부터 재지(才智)가 출중하여 남의 칭찬을 많이 받았다.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대교에 임명되었다.
그뒤 병조정랑과 용강현령을 지냈는데, 이때 훌륭한 이름을 남겼다.
1765년(영조 41) 공조참의에 오르고, 관직에서 물러난 뒤 향리에 돌아와서 후진들의 교육과 경전을 외며 자기수양에 진력했다.
죽은 뒤 1796년(정조 20)호군 채홍(蔡弘)의 천거로 청백리에 올랐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牧民心書. 〈權五虎〉
★안렴) 김사렴(金士廉)
생몰년 미상. 고려말의 문신. 본관은 안동. 평장사(平章事) 방경(方慶)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문장에 능하였다. 공민왕 때에 과거에 급제, 벼슬이 안렴사(按廉使)에 이르렀다. 정몽주(鄭夢周)·이색(李穡)과 교분이 두터웠을 뿐만 아니라 직간으로도 유명하였다.
신돈(辛旽)이 집권하였을 때 공경대부들이 모두 신돈을 받들고 왕이 총애하자, 상소하여 신돈이 반드시 뒤에 정사를 어지럽히고 사직을 망하게 할 것이라고 간하였다. 당시 정추(鄭樞)·이존오(李存吾) 등이 신돈을 탄핵하다 쫓겨난 뒤여서, 조야가 감히 신돈의 일을 말하지 못하였는데 홀로 이를 논하여 직언했다는 소리가 높았다.
고려가 망하자 청주에 은퇴, 태조가 여러 차례 좌사간에 임명하였으나 응하지 않고, 도산(陶山)으로 옮겨 은거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名臣傳. 〈朴天圭〉
★고려조) 김사안(金士安)
?∼1391(공양왕 3). 고려의 문신. 본관은 안동.
방경(方慶)의 4세손이며, 할아버지는 상락후(上洛侯) 영후(永煦)이고, 아버지는 밀직부사를 지낸 천(#천46)이다. 조선의 개국공신 사형(士衡)의 형이며 부인은 당숙 묘(昴)의 딸이다.
1388년(우왕 14)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서 이색(李穡)·이숭인(李崇仁)과 함께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신정(新正)을 하례하였으며 공양왕 때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朴天植〉
★도평) 김사원(金士元){2}
1539(중종 34)∼1602(선조 3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경인(景仁), 호는 만취당(晩翠堂). 경상도 의성·점곡(點谷)·사촌(沙村)에 살았다. 증조부는 일사(逸士) 광수(光粹)이다.
1560년(명종 15) 이황(李滉)에게 나가 음양오행설을 배웠다.
1578년(선조 11) 재령군수로 있었는데, 전에 김제군수로 있을 때 관고(官庫)의 물건을 도용했다 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러나 천성이 인자하여 개인의 재산을 털어 많은 기민(飢民)을 진휼하여 지방민의 추앙을 받았고, 이로 인해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장인 정제장(整濟將)으로 추대되었다. 후산사(后山祠)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義城邑誌, 典故大方. 〈張東翼〉
★익원) 김사형(金士衡)
1333(충혜왕 2)∼1407(태종 7).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평보(平甫), 호는 낙포(洛圃).
고조는 방경(方慶), 할아버지는 영후(永煦), 아버지는 부지밀직사사 천(#천46)이다.
음보로 앵계관직(鶯溪館直)이 된 뒤 감찰규정(監察糾正)을 거쳐,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조준(趙浚) 등과 함께 대간을 지냈고, 뒤에 개성윤(開城尹)이 되어 보리공신(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회군을 단행한 뒤, 교주강릉도도관찰출척사(交州江陵道都觀察黜陟使)로 나갔고, 1390년(공양왕 2)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이 되고 이어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승진하였다.
1390년 윤이(尹#이23)·이초(李初)의 옥이 있은 뒤 그 당을 둘러싸고 찬성사(贊成事)정몽주와 대결하고 서로 탄핵하였다. 삼사좌사(三司左使)·동판도평의사사(同判都評議司事)로 있다가 여러 장상들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1등에 봉해지고, 문하시랑찬성사 겸 판상서사사 겸 병조전서응양상장군(門下侍郎贊成事兼判尙瑞司事兼兵曹典書鷹揚上將軍)에 올랐다.
같은해 12월 문하우시중에 제수되고, 상락백(上洛伯)의 작위와 식읍 1천호 및 식실봉(食實封)300호를 받았다.
그뒤 좌정승을 지냈고 1398년(태조 7) 제1차왕자난 때, 백관을 거느리고 대궐에 나아가 적장(嫡長)을 후사로 세울 것을 요청하여 태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1등에 책봉되었다.
1399년(정종 1) 등극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1401년 다시 좌정승에 복직되고 이듬해 영사평부사를 지낸 다음,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진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개국공신 중에서는 배극렴(裵克廉)다음으로 지위가 높았던 고려의 원로구신이며, 가문이 귀현(貴顯)하였고 마음이 청고하여 이성계가 아꼈다고 한다.
조준과 함께 8년간 재상의 지위에 있었으나, 정사는 모두 조준이 전단(專斷)하였고, 말을 신중히 하고 스스로 삼가며 분수를 지켜 조준의 의견에 따랐으며, 적을 가지지 않았다. 개국공신 1등에 책봉된 것은 공이 컸기 때문이 아니며, 처음에는 이성계를 추대하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다고도 한다.
시호는 익원(翼元)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韓永愚〉
★부사) 김선필(金善弼)
1807(순조 7)∼1883(고종 20). 조선 말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 자는 중필(仲弼).
아버지는 학기(學基)이다. 아버지가 군수를 지낸 정기(鼎基)라고 기록된 자료도 있다. 이는 생부에게서 양부 앞으로 입양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1829년(순조 29) 무과에 급제하여, 전라도·충청도의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고종 때에 들어와서는 흥선대원군의 신임을 받아 중용되었는데, 1866년 병인양요 때에는 통진부(通津府)에 진을 친 선봉장 이용희(李容熙)의 우익(右翼)으로 부평(富平)에 주둔하면서 수도방위를 담당했다.
경기중군(京畿中軍)을 거쳐,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수로(江華水路)의 중요한 근거지인 광성진(廣城津)을 방어하다 미국군의 공격을 받아 장렬하게 전사한 진무중군(鎭撫中軍) 어재연(魚在淵)의 후임으로 진무사(鎭撫使)가 되어 중군(中軍)을 지휘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복설(復設)된 삼군부(三軍府)의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를 거쳐 대호군(大護軍)에 이르렀다.
1882년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를 역임하기도 했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日省錄, 承政院日記, 登壇錄, 韓國史―最近世篇―(李瑄根, 乙酉文化社, 1961). 〈李相燦
★익원) 김성동(金誠童)
1452(문종 2)∼1495(연산군 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명보(明甫). 아버지는 좌의정 질(#질18)이고, 어머니는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의 딸이다.
1492년(성종 23) 적성현령을 지내던 중 그해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당상관으로 승진하였다. 이어 부평부사에 임명되어 직무를 잘 처리하고 백성들을 잘 다스려 칭송받았다. 부평부사로 취임한 지 2년이 되기도 전에 선정이 조정에 보고되어 가선대부로 승진하였다.
공무에 성실하고 인품이 뛰어나 사람들로부터 모두 재상감이라는 기대를 모았으나 곧 죽었다. 박처륜(朴處綸)과 함께 성종대에 가장 유능하고 성실한 관리로 지칭되었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國朝榜目, #용12齋叢話. 〈李迎春〉
★서운) 김성립(金誠立)
1562(명종 17)∼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여견(汝見) 또는 여현(汝賢), 호는 서당(西堂). 아버지는 교리 첨(瞻)이며, 부인은 허엽(許曄)의 딸인 난설헌(蘭雪軒)이다.
1589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고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에 이르렀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죽었다. 당대에 문명이 높았다.
참고문헌
號譜, 槿域書畵徵. 〈金東洙〉
★안렴) 김세익(金世翊)
1634(인조 12)∼1698(숙종 2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양경(亮卿).
아버지는 성천부사 언($언01), 어머니는 이선립(李先立)의 딸.
아버지가 병자호란 때 적병과 싸우다가 순절하자 중림찰방(重林察訪)에 기용되어 관계에 나갔으나, 1681년(숙종 7) 헌납(獻納) 박태손(朴泰遜)으로부터 탐학하다는 탄핵을 받아 사판(仕版)을 삭거당하였다.
그뒤 다시 서용되었으며 1686년 전주판관(全州判官)으로 재임시 53세의 나이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헌부·사간원에 들어갔다.
1694년 사헌부지평으로 재임시에 시관(試官)으로 영남지방을 다녀와서 백성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궁방(宮房)의 침탈상을 보고하고 그 구제책을 촉구한 바 있으며, 이듬해에도 군병(軍兵)의 기강확립과 궁방의 검약한 생활 등을 건의한 바 있다.
이후 여러 차례 승지에 발탁되었으며, 1698년 경상도관찰사로 재임시 도내를 순시하던 중 청송에서 죽었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禹仁秀〉
★서운) 김수(金#수51){4}
*김수 필적
1547(명종 2)∼1615(광해군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자앙(子昻), 호는 몽촌(夢村).
아버지는 사재감정(司宰監正) 홍도(弘度), 어머니는 이계백(李繼伯)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73년(선조 6)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을 거쳐 홍문관교리 때 왕명으로 《십구사략 十九史略》을 개수(改修)하였다.
1583년 번호(藩胡)가 침입하여 경원부(慶源府)가 함락되자 이조정랑으로서 도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종사관이 되었다. 유학(幼學) 신급(申$급01)이 올린 상소 속에 조정에서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하는 인물의 하나로 지적되기도 하였다.
직제학·승지를 거쳐 1587년에 평안도관찰사에서 면직되었으나, 나라에서 왜(倭)를 매우 걱정하여 변방의 일을 아는 재신(宰臣)을 뽑아 삼도(三道)로 나누어 파견하여 군무(軍務)를 순찰하고 대비하도록 할 때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591년 정철(鄭澈)의 건저문제(建儲問題)에 대해 옥당에서 탄핵하는 차자(箚子)를 올리려고 할 때 부제학으로서 사성 우성전(禹性傳)의 집으로 의논하러 가서 시간이 지연되어 올리지 못하였으므로 대사간 홍여순(洪汝諄)이 우성전을 탄핵하면서 남·북 두파로 갈리게 되자 남인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였을 때 경상우감사(慶尙右監司)로서 진주에 있다가 동래가 함락되자 밀양과 가야를 거쳐 거창으로 도망을 가면서 다만 각 고을에 격문을 돌려 백성들에게 적을 피하라고 통고하니 도내가 텅 비어 왜적을 방어할 수 없었다.
전라감사 이광(李洸)과 충청감사 윤국형(尹國馨)이 근왕병(勤王兵)을 일으켰을 때 겨우 1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참가하였으나, 근왕병이 용인(龍仁)에서 왜군에게 패하자 경상우도로 되돌아가던 중 영남초유사(嶺南招諭使) 김성일(金誠一)로부터 패전에 대한 질책을 받았다.
당시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곽재우(郭再祐)와 불화가 심하여 김성일의 중재로 무마되기는 하였지만, 지방사람들로부터 처사가 조급하고 각박할 뿐만 아니라 왜란의 초기에 계책을 세워 왜적과 대처하지 못하고 적병을 피하여 전라도로 도망갔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였다.
1592년 8월에 한성판윤이 되었고, 지중추부사·우참찬 등을 거쳐, 1596년(선조 29) 호조판서로서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명군(明軍)의 군량을 충당하기 위하여 군량징수에 힘썼다.
그뒤 영중추부사에 이르렀으나 1613년(광해군 5) 손자인 비(#비58)가 옥사할 때 탄핵을 받고 삭직당하였다. 시호는 소의(昭懿)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夢村集,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淸選考, 大東野乘. 〈朱雄英〉
★익원) 김수경(金壽卿)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호는 양한재(養閑齋).
반정을 전후하여 한때 수정(壽正)으로 이름을 고쳤다가 다시 수경으로 고쳤다.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적(#적21), 영의정 수동(壽童)의 동생이다.
1482년(성종 13) 성균관유생으로서 원각사(圓覺寺)의 중들과 충돌한 죄로 장형을 받았고, 1495년(연산군 1) 돌아간 선왕의 명복을빌기 위한 불사(佛事)를 반대하다가 장배(杖配)당하기도 했다. 후에 풀려나와 1498년 사평(司評)이 되었다가 공조좌랑으로 옮겼으며, 1506년 병조참지에 올랐다.
그해 박원종(朴元宗) 등에 의해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형인 수동의 뒤를 따라 반정군에 가담하여 병충분의정국공신(秉忠奮義靖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영안군(永安君)에 책봉되었으나, 연산군 말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단상(短喪)으로 끝내고 이조판서 임사홍(任士洪)에게 구걸하여 벼슬을 얻은 데다 상중에도 조금도 근신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나 홍문관부제학 이윤(李胤)의 탄핵을 받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뒤 마전군수(麻田郡守) 등의 외직을 거쳤고, 1519년(중종 14) 영흥부사가 되었으나 그해 조광조(趙光祖) 등이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추진할 때 녹훈이 지나쳤다고 지적되어 훈적(勳籍)에서 삭제되고 녹권이 박탈되었다가 기묘사화 후에 복직되었다.
그뒤 장단·연안의 부사를 거쳐 1523년 이천부사가 되었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燃藜室記述. 〈鄭萬祚〉
★익원) 김수동(金壽童)
1457(세조 3)∼1512(중종 7).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미수(眉#수04), 호는 만보당(晩保堂).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사형(士衡)의 후손이며, 첨지중추부사 적(#적21)의 아들이다.
1474년(성종 5)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477년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주서·홍문관정자·의정부사인을 거쳐 사헌부장령에 올랐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홍문관으로 다시 자리를 옮겨 전한(典翰)·직제학·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497년(연산군 3)에는 승정원동부승지를 제수받고, 이듬해 좌승지를 거쳐, 그해 여름에 외직으로 전라도관찰사를 거쳐 예조참판이 되었다. 다시 이듬해에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서 《성학심법 聖學心法》 4권을 구하여 왔다.
그뒤 경상도관찰사·이조참판·경기관찰사·형조판서 겸 지춘추관사·홍문관제학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쳐, 1504년 47세 때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이해 갑자사화 때 그는 폐비 윤씨의 회릉추숭(懷陵追崇)을 주장, 시행함으로써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1506년 어머니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물러났으나, 왕명으로 단상(短喪)으로 마치고 3개월 만에 우의정에 부임하였다.
이때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좌의정에 오르고 정국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며,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봉해졌다. 연산군에게 충실하였다고 사림으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나, 1510년 영의정에 올라, 그때 일어난 왜변의 진압을 총지휘하였다. 연산군 때에는 많은 문신들의 화를 면하게 하였다.
품성이 단정하였으며, 청탁을 모두 거절하고 검약한 생활을 즐겼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海東名臣傳, 新增東國輿地勝覽,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崔完基
★전서) 김수령(金壽寧)
1436(세종 18)∼1473(성종 4).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 자는 이수(#이96#수04), 호는 소양당(素養堂).
아버지는 절충장군(折衝將軍)이었던 숙(潚)이며, 어머니는 호조판서 안숭선(安崇善)의 딸이다.
1453년(단종 1)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해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부수찬이 되었다.
1455년(세조 1)에 집현전수찬에 승진되고 이어 병조좌랑·헌납·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1458년부터 1462년까지 함길·평안·강원·황해·충청 5도의 체찰사인 한명회(韓明澮)의 종사관이 되어 세조의 변방정책 수행에 주요한 소임을 담당하였다.
1463년 집의에 오르고 그뒤 동부승지, 1465년에는 좌승지를 거쳤다.
1468년 호조참의로 세조의 《주역구결 周易口訣》 간행에 참여하였다.
1469년(예종 즉위년) 공조참의가 되고 이어 형조·호조의 참의를 거쳐 1470년에 대사간이 되었다. 대사간 재직시에는 성종에게 경연을 권고하는 명상소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1471년 성종을 보필한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복창군(福昌君)에 봉해졌다. 뒤에 공조참판과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경사(經史)에 밝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특히 사재(史才)가 있어서 1458년에는 《국조보감 國朝寶鑑》 편찬에 참여하였고, 1463년에는 양성지(梁誠之)·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동국통감》을 편찬하였으며, 성종 초기에는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시호는 문도(文悼)이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成宗實錄, 大東野乘, 國朝榜目, 國朝人物志. 〈李根洙〉
★고려조) 김순(金恂){5}
1258(고종 45)∼1321(충숙왕 8). 고려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귀후(歸厚). 방경(方慶)의 넷째아들이다.
1279년(충렬왕 5)에 과거에 급제하여 낭장(郎將)으로 학사(學士)·직강(直講)이 되었다. 아버지 방경이 일본을 정벌할 때 종군하고자 했으나, 허락하지 않으므로 몰래 배에 올라 종군하고 돌아와서 전중시사(殿中侍史)가 되었다.
1297년 좌부승지, 이듬해 좌승지에 오르고 광정부사(光政副使)·승지(承旨)·성균좨주(成均祭酒)·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지민조사(知民曹事)를 역임했으며, 다시 삼사좌사(三司左使)를 거쳐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어 사직했다.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자 다시 등용되어 1312년(충선왕 4)에 중대광(重大匡)·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으며, 1316년에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다.
성격이 관후하고 예서(隷書)를 잘 썼으며, 거문고와 퉁소를 즐겼다. 시호는 문영(文英)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閔丙河〉
★고려조) 김승용(金承用)
?∼1329(충숙왕 16). 고려의 문신. 본관은 안동.
할아버지는 방경(方慶)이며, 아버지는 부지밀직사사를 지낸 훤(#선16)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충숙왕 때 내부령(內府令)이 되었다.
1323년 정안군 종(定安君琮)과 함께 원나라 진종(晉宗)의 등극을 축하하기 위해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1328년 밀직사로서 성절사가 되어 원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청렴하기로 유명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孫弘烈〉
★고려조) 김승택(金承澤)
?∼1358(공민왕 7). 고려말의 문신. 본관은 안동.
할아버지는 상락후(上洛侯) 방경(方慶)이며, 아버지는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훤(#선16)이다.
1342년(충혜왕 복위 3) 6월 조적(曺#적42)의 난 때 왕을 호종한 공로로 이등공신에 봉해져 전(田)70결과 노비 5구를 받았다.
1352년(공민왕 1) 8월 이제현(李齊賢)·한종유(韓宗愈) 등과 함께 서연관(書筵官)이 되었으며, 입시해서 시독(侍讀)할 때마다 칭찬을 받았다.
10월에는 찬성사(贊成事)가 되었으며,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로 치사하였다. 시호는 양간(良簡)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朴天植〉
★제학) 김시민(金時敏){1}
*김시민 신도비
*김시민 전공비
*김시민 진주성대첩도
1554(명종 9)∼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 자는 면오(勉吾). 목천(木川)출신. 방경(方慶)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지평 충갑(忠甲)이다.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에 입사하였으며, 1581년에는 부평부사가 되었으나 구황(救荒)에 전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583년 이탕개(尼湯介)의 난 때 도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막하 장수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그뒤 훈련원판관이 되었으나 군사에 관한 건의가 채택되지 않자 사직하였다.
1591년 진주판관이 되어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사 이경(李璥)과 함께 지리산에 피하였다가 목사가 병사하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명에 따라 그 직을 대리하였다.
먼저 성민을 안무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피난하였던 성민을 귀향하게 하였으며, 성을 지키기 위하여 성을 수축하고 무기와 기재를 정비하는 한편, 군사의 항오(行伍)를 편성, 군사체제를 갖추었다.
이때 왜적은 진주의 방위가 허술함을 알고 창원·진해·고성으로부터 사천에 집결한 다음 진주로 향하려 하였다. 이에 곤양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 의병장 이달(李達)·곽재우(郭再祐) 등과 합세하여 적을 격파하고,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십수교(十水橋)에서 다시 승리를 거두어 고성·창원 등 여러 성을 회복하였다.
이어서 의병장 김면(金沔)의 원병요청을 받고 정병 1천여명을 이끌고 이에 호응, 거창의 사랑암(沙郎巖)에서 금산으로부터 서남진하는 왜적을 맞아 크게 무찔렀으며, 여러 차례의 전공으로 그해 8월 진주목사로 승진되었다.
취임하자 곧 적군의 제조방식을 모방하여 염초(焰硝)5백여근을 만들고 총통(銃筒) 70여병(柄)을 만들어 정병을 뽑아 이의 사용법을 연마하게 하는 등 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화하였다.
9월에는 진해로 출동하여 적을 물리치고 적장 평소태(平小太)를 사로잡아 행재소(行在所)로 보내자 조정에서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임명하였다.
이때 왜적은 진주가 전라도로 통하는 경상우도의 대읍(大邑)이며, 경상우도의 주력이 그곳에 있음을 알고 대군으로 공격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10월 5일 적은 진주의 동쪽 마현(馬峴)에 출현하였고, 6일에는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성중에 영을 내려 노약자와 부녀자까지 남장을 하게 하여 군사의 위용을 보이게 하는 한편, 화살을 함부로 쏘아 허비하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시키고 적과의 싸움에 대처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적의 2만여 대군이 성을 포위하자 불과 3, 800여명의 병력으로 7일간의 공방전을 벌여 적을 물리쳤으나 이 싸움에서 이마에 적탄을 맞았다.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국사를 근심하고 때때로 북향하여 절하고 눈물을 짓다가 상처가 깊어 며칠 뒤에 진몰(陣歿)하였다.
죽은 뒤 성중에서는 적이 알까봐 비밀로 하였다가 안정이 된 뒤 상을 치렀는데, 상여가 함양에 이르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발탁되었다는 조정의 명을 받았다.
1604년에는 선무공신(宣武功臣)2등에 추록되었으며, 영의정이 추증되고 이와 함께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진주의 충민사(忠愍祠)·산성정충당(山城旌忠堂)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燃藜室記述, 亂中雜錄, 龍蛇日記, 鶴峯集. 〈金錫禧〉
★제학) 김시약(金時若)
?∼1627(인조 5).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 아버지는 지평 충갑(忠甲)이며, 형은 진주목사 시민(時敏)이다.
1596년(선조 29) 괴산(槐山) 선봉장으로 창의, 모병한 군사를 거느리고 왜적을 격파하였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관찰사의 천거로 별장에 발탁되었다.
이듬해 정유재란 때에는 통영군관(統營軍官)으로 관군과 의병을 통솔하여 창원·옥포 등지에서 왜군 24명을 죽이는 군공을 세웠다. 난이 끝난 뒤 훈련원첨정으로 승진되었으며, 1605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뒤에 창성부첨절제사(昌城府僉節制使)로 나갔다가 1627년 정묘호란을 당하여 성이 함락되자 그의 아들과 함께 포로가 되어 순절하였다.
1683년(숙종 9) 국가에서 향리에 정문을 세우게 하고 병조참판을 추증하였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宣武原從功臣錄券. 〈金錫禧〉
★제학) 김시양(金時讓)
*김시양 필적
1581(선조 14)∼1643(인조 2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초명은 시언(時言), 자는 자중(子仲), 호는 하담(荷潭). 아버지는 비안현감 인갑(仁甲)이다.
1605년(선조 3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1607년 주서(注書)가 되고 1609년(광해군 1)에 예조좌랑으로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으며, 1610년 동지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에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가 되었는데, 향시에 출제한 시제가 왕의 실정(失政)을 비유한 것이라 하여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1616년 영해(寧海)로 이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예조정랑·병조정랑·수찬·교리를 역임,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는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1625년(인조 3) 응교가 되어 문학을 겸하였고, 이듬해에는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산릉역(山陵役)에 공로가 많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날 징후가 보이자 평안도관찰사 겸 체찰부사에 임명되었고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묘의(廟議)에 따라 도원수와 사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를 겸하였다.
그러나 왕의 뜻을 어기고 척화를 주장하여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1634년 지중추부사에 서용(敍用)되고 한성판윤을 거쳐 호조판서 겸 동지춘추·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이 되었다가 9월에 재차 도원수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 강화유수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하였고, 1636년 청백리에 뽑혀 숭록계(崇祿階)에 올랐으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으나 눈병으로 사직하고 향리인 충주로 내려갔다.
1641년 《선조실록》을 개수할 때 대제학 이식(李植)과 총재관(摠裁官) 홍서봉(洪瑞鳳) 등의 추천으로 다시 판중추부사 겸 춘추관사를 제수받았으나 지병인 안질로 실록개수역(實錄改修役)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전적(典籍)과 경사(經史)에 밝았다.
회령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하담파적록 荷潭破寂錄》·《하담집》·《부계기문 #부33溪記聞》 등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燃藜室記述,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李章熙〉
★제학) 김시헌(金時獻)
1560(명종 15)∼1613(광해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자징(子徵), 호는 애헌(艾軒).
고려의 명장 방경(方慶)의 후손으로, 임진왜란 때 원주목사로서 왜장과 싸우다 전사한 제갑(悌甲)의 아들이다.
1588년(선조 21) 소과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같은해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검열(檢閱)·이조좌랑·정언(正言)을 거쳐 1595년 사간·전한(典翰)·시강관(侍講官)·사인(舍人)이 되고, 이듬해 집의(執義)·사간 등을 거쳐, 1597년 승정원동부승지·우부승지·충청도관찰사·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이때 소모관(召募官)으로 충청도에 파견되었다. 이어 병조참의·우승지·좌승지를 거쳐 복수사(復讐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신립(申砬)이 전사한 탄금대(彈琴臺)를 돌아보고 임진왜란 뒤 민심을 수습하는 데 힘썼다.
1603년 동지사행(冬至使行)에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순천군수를 거쳐 병조참의·좌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607년 양양부사로 나갔다가 병조참판에 올랐다. 선조가 죽자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로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611년 예조참판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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