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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익원공 연보자료 21 (58세, 13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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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6-04-21 22:32 조회1,288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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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014 07/08/26 (기사) 001

/ 제1차 왕자의 난. 정도전·남은·심효생 등이 숙청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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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백(奉化伯) 정도전·의성군(宜城君) 남은과 부성군(富城君) 심효생(沈孝生) 등이 여러 왕자(王子)들을 해치려 꾀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형벌에 복종하여 참형(斬刑)을 당하였다.


---정안군이 박포(朴苞)와 민무질을 보내어 좌정승 조준을 불러 오게 하니, 조준이 망설이면서 점(占)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거취(去就)를 점치게 하고는, 즉시 나오지 않으므로, 또 숙번으로 하여금 그를 재촉하고서, 정안군이 중로(中路)에까지 나와서 맞이하였다. 조준이 이미 우정승 김사형과 더불어 오는데 갑옷을 입은 반인(伴人)들이 많이 따라왔다. 가회방(嘉會坊) 동구(洞口)의 다리에 이르니, 보졸(步卒)이 무기(武器)로써 파수(把守)해 막으며 말하였다. “다만 두 정승만 들어가십시오.”

조준과 김사형 등이 말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다리를 지나가매, 정안군이 말하였다. “경 등은 어찌 이씨(李氏)의 사직(社稷)을 걱정하지 않는가?”

조준과 김사형 등이 몹씨 두려워하면서 말 앞에 꿇어앉았다. 이에 정안군이 말하였다. “정도전과 남은 등이 어린 서자(庶子)를 세자로 꼭 세우려고 하여 나의 동모 형제(同母兄弟)들을 제거하고자 하므로, 내가 이로써 약자(弱者)가 선수(先手)를 쓴 것이다.”

조준 등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하였다. “저들의 하는 짓을 우리들이 일찍이 알지 못했습니다.”

정안군이 말하였다. “이같은 큰일은 마땅히 국가에 알려야만 될 것이나, 오늘날의 일은 형세가 급박하여 미처 알리지 못하였으니, 공(公) 등은 마땅히 빨리 합좌(合坐)해야 될 것이오.”

노석주(盧石柱)와 변중량(卞仲良)이 대궐 안에 있으면서 사람을 시켜 도승지 이문화(李文和)와 우승지 김육(金陸)을 그들의 집에 가서 불러 오게 하니, 문화(文和)가 달려와 나아가서 물었다.


--- 회안군이 뒤따라 가서 예빈시(禮賓寺) 문 앞에서 목을 베었다. 조준과 김사형 등이 도평의사사(都評義使司)로 들어가 앉았는데, 정안군은 생각하기를, 방석 등이 만약 시위(侍衛)하는 군사를 거느리고 궁문(宮門) 밖에 나와서 교전(交戰)한다면, 우리 군사가 적으므로 형세가 장차 물러갈 것인데, 만약 조금 물러가게 된다면 합좌(合坐)한 여러 정승(政丞)들이 마땅히 저편 군사의 뒤에 있게 될 것이므로, 혹시 저편을 따를까 여겨, 사람을 시켜 도당(都堂)에 말하였다.

“우리 형제가 노상(路上)에 있는데, 여러 정승들이 도당(都堂)에 들어가 앉았는 것은 옳지 못하니 마땅히 즉시 운종가(雲從街) 위에 옮겨야 될 것이다.”

마침내 예조(禮曹)에 명령하여 백관(百官)들을 재촉해 모이게 하였다.


--- 조금 후에 이무는 박위가 참형(斬刑)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도로 나왔다. 이튿날 닭이 울 적에 임금이 노석주를 불러 대궐로 들어오게 하고, 이른 새벽에 또 이문화를 부르니, 문화가 서쪽 양정(涼亭)으로 나아갔는데, 세자와 방번·제(濟)·화(和)·양우(良祐)·종(淙)과 추상(樞相)인 장사길(張思吉)·장담(張湛)·정신의(鄭臣義) 등이 모두 벌써 대궐에 들어와 있었다. 여러 군(君)과 추상(樞相), 대소내관(大小內官)들과 아래로 내노(內奴)에 이르기까지 모두 갑옷을 입고 칼을 가졌는데, 다만 조순(曹恂)과 김육(金陸)·노석주·변중량만은 갑옷을 입지 않았다. 석주가 문화에게 교지(敎旨)를 전하여,

“교서(敎書)를 지으라.”

하니, 문하가 사양하기를 청하므로, 석주가 말하였다.


---대궐 안에 있던 정승들이 무슨 일인가를 물으니, 문화가 대답하였다.

“세자를 바꾸는 일입니다.”

석주(石柱)가 교초(敎草)를 봉하여 문화로 하여금 서명(署名)하게 하니, 문화가 받지 않으므로, 다음에 화(和)에게 청하였으나 또한 받지 않으므로, 다음에 자리에 있던 여러 정승들에게 청하여도 모두 받지 아니하였다. 이에 문화가 말하였다.


---이에 문화와 김육(金陸)에게 명하여 나가서 세자를 알현(謁見)하게 하니, 세자가 문화를 불러 말하였다.

---정안군이 여러 왕자들과 함께 감순청(監巡廳) 앞에 장막을 치고 3일 동안을 모여서 숙직하고, 그 후에는 삼군부(三軍府)에 들어가 숙직하다가, 세자가 내선(內禪)을 받은 후에 각기 사제(私第)로 돌아갔다.

 

 

태종 018 09/10/01 (기해) 003 / 대신 및 3공신 등을 불러 이무의 과거 행적을 말하고 죄를 의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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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무를 거느리고 조준의 집에 갔는데, 연화동(蓮花洞) 입구에 이르러 조준과 김사형(金士衡)을 만났다. 이들 두 공(公)이 그때에 군사를 거느리고 있어 따르는 자가 또한 많았다. 내가 말하기를, ‘일이 이미 급박하니 말에 내려 예(禮)를 하지 말라.’ 하고, 곧 정승(政丞)의 앞에 서서 걸어가며 뒤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사직(社稷)의 존망(存亡)이 바로 경각(頃刻)에 있으니, 바라건대 두 정승은 도모하시오.’ 하고, 드디어 운종가(雲從街)에 모여 앉았다. 이때에 박위(朴葳)가 갑사(甲士)를 거느리고 궐내(闕內)에 있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세 번이나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세종 082 20/09/25 (병오) 001 / 찬성 신개가 헌릉의 비문에 무인년 기사의 문구가 사실과 다르다고 상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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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친군 도진무(親軍都鎭撫) 조온(趙溫)·박위(朴葳) 등이 도진무청(都鎭撫廳)에 입직하고 있었는데, 태종께서 사람을 시켜 조온과 박위 등을 부르시니, 조온은 명을 듣고 즉시 휘하의 갑사(甲士)와 패두(牌頭) 등을 인솔하고 광화문으로 나와 말 앞에 와서 뵙고, 박위는 즉시 명에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태종께서 조온에게 명하사 이로 하여금 입직한 갑사들을 다 데리고 나오게 하시니, 조온은 즉시 패두들을 시켜서 도로 궁궐에 들어가서 갑사를 다 데리고 나왔으며, 얼마 아니 되어서 바로 근정전 이남의 갑사들은 모두 뛰어나와서 가담하여 군세는 크게 성세를 이루게 되었고, 좌정승 조준(趙浚)·우정승 김사형(金士衡) 등이 태종의 명을 받고 달려와서, 형조(刑曹)의 문밖에 회좌(會坐)하고, 무슨 일이든지 그 시행하는 바는 다 도평의사사(都評議司使)로 하여금 이를 처리하게 하였습니다.



태조 015 07/09/01 (계유) 005

/ 김정준을 전농 판사로 삼다. 친왕자를 공으로, 종친을 후로, 정1품을 백으로 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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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준(趙浚)을 좌정승 평양백(平壤伯)으로, 김사형(金士衡)을 우정승 상낙백(上洛伯)으로, 권중화(權仲和)를 예천백(醴泉伯)으로, 성석린(成石璘)을 문하 시랑찬성사 판호조사(門下侍郞贊成事判戶曹事)로, ---

 

 

태조 015 07/09/17 (기축) 002

/ 정사 공신의 등급을 정하여 내린 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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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우리 전하와 더불어 정사 공신(定社功臣)의 등급을 논하고 도승지 이문화(李文和)에게 명하여 교지를 전하였는데, 그 교지는 이러하였다.

“---좌정승 조준(趙浚)·우정승 김사형(金士衡),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이무(李茂)·조박(趙璞), 정당 문학(政堂文學) 하윤(河崙)·참찬문하(參贊門下) 이거이(李居易)·참지문하(參知門下) 조영무(趙英茂)가 충성을 분발하여 계책을 결정하고 난리를 평정하여 질서 있는 세상으로 회복되게 하고 종사(宗社)를 편안하게 하였으니, 공로가 중대하여 영구한 세대에 이르러도 잊을 수가 없겠다. ---

 

 

태조 015 07/10/01 (계묘) 001

/ 정사 공신의 책록과 등급별 포상 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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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신 도감(功臣都監)에서 말씀을 올리었다.

“---좌정승 조준·우정승 김사형,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이무(李茂)·조박(趙璞), 정당 문학(政堂文學) 하윤·참찬문하부사 이거이(李居易)·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 조영무(趙英茂) 등이 충성을 분발하고 계책을 결정하여 난리를 평정해서 질서 있는 세상으로 회복시켰으니, 이것은 비록 전하께서 잠저(潛邸)에서 덕을 양성하여 천명(天命)이 인심(人心)과 함께 돌아와서 화란(禍亂)을 평정하고 천명을 받아 왕통(王統)을 계승하게 된 것이지마는, 또한 세상에 이름 있는 신하가 임금을 보좌하여 사직(社稷)을 안정시킨 공렬(功烈)에 힘입게 된 것도 진실로 전하의 교지와 같은 점이 있습니다. 그 공로가 작지 아니하여 영구한 세대에 이르도록 잊을 수가 없으니, 청하옵건대 정사 일등 공신(定社一等功臣)으로 칭하고, 각(閣)을 세워 얼굴을 그리고 비를 세워 공을 기록할 것이며, 작(爵)을 봉하고 토지를 주되, 부모와 아내에게는 3등을 뛰어올려 봉작 증직(封爵贈職)하고, 직계(直系) 아들은 3등을 뛰어올려 음직(蔭職)을 주며, 직계 아들이 없으면 생질과 사위에게 2등을 뛰어올려 음직을 주고, 전지(田地) 몇 결(結), 노비(奴婢) 몇 명, 구사(丘史) 7명, 진배파령(眞拜把領) 10명을 주고, 처음 입사(入仕)함을 허가하며, 적장(嫡長)은 대대로 물려받아 그 봉록(俸祿)을 잃지 않게 하되, 그 자손은 정안(政案)에 쓰기를, ‘정사 일등 공신(定社一等功臣) 아무의 자손인데, 비록 죄를 범한 일이 있더라도 영구한 세대에까지 사유(赦宥)하게 할 것이라.’ 하며,

---소(疏)가 올라가매, 신청한 바에 의거하여 1등 공신에게는 각각 전지 2백 결(結), 노비(奴婢) 25명, 내구마(內廐馬) 1필에 안장과 고삐를 갖추고, 금대(金帶) 1개, 옷의 겉감과 안찝 각 1단(段)을 내리고,

 

 

태조 015 07/10/09 (신해) 001

/ 정사 공신 29인을 거느리고 맹약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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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정사 공신(定社功臣) 29인을 거느리고 함께 맹약(盟約)하였는데, 그 맹약을 기록한 문서에는 이러하였다.

“조선 국왕 신(臣) 경(曔)은 삼가 종친(宗親) 의안공(義安公) 이화(李和)·익안공(益安公) 방의(芳毅)·회안공(懷安公) 이방간(李芳幹)·우리 전하(殿下) 이방원(李芳遠)과 보신(輔臣) 문하 좌정승(門下左政丞) 조준(趙浚)·우정승 김사형(金士衡) 등을 거느리고 감히 황천 후토(皇天后土)와 종묘 사직(宗廟社稷)과 산천 백신(山川百神)의 영(靈)에게 밝게 고한다. ---


태조 015 07/11/11 (계미) 001

/ 임금의 생모인 절비 한씨를 신의 왕후로 추존하고 인소전에 봉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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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비(皇妣)인 절비(節妃) 한씨(韓氏)를 추존(追尊)하여 신의 왕후(神懿王后)로 삼았다. 우정승 김사형을 봉책사(奉冊使)로 삼고, 정당 문학(政堂文學) 하윤을 부사(副使)로 삼아 별전(別殿)에 봉안(奉安)하고서 인소전(仁昭殿)이라 이름하였다.

 

 

태조 015 07/12/28 (경오) 002

/ 김사형과 하윤을 중국 황제의 등극을 하례하는 사신으로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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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보평청(報平廳)에 앉아서 황제의 등극(登極)을 하례(賀禮)하는 사신인 우정승 김사형(金士衡)과 진위 진향사(陳慰進香使)인 정당 문학(政堂文學) 하윤(河崙)을 전송(餞送)하는 잔치를 베풀었는데, 밤중이 되어서야 끝났다. 김사형을 불러 침전(寢殿)에 들어오게 하고서 술을 내리고, 또 모의(毛衣)와 모관(毛冠)를 내리었다.



<시대상황>

5. 골육상쟁을 뒤로 한 은퇴

그러나 왕자 사이에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태조 즉위 후에 세자책립문제로 여러 의견이 있었으나, 계비 강씨의 소생인 방석(芳碩)을 세자로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방원(芳遠: 신의왕후 소생)의 불만은 대단하였다.


○1398년 태조의 와병중에 방원은 세자인 방석을 보필하고 있던 정도전·남은(南誾) 등이 자신을 비롯한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을 제거하려 한다는 이유로 사병을 동원, 그들을 살해하였으며, 곧이어 방석, 방번(芳蕃)마저 죽여 후환을 없앴다. 새 세자는 방원의 요청에 의하여 방과(芳果)로 결정하였다. 태조는 방석·방번 형제가 무참히 죽은 데 대해서 몹시 상심하였다. 그는 곧 왕위를 방과에게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정도전(鄭道傳), 1398년에 권근(權近)과 더불어 성균관제조가 되어 4품 이하의 유사(儒士)들에게 경사(經史)를 강습시키고, 여름에 《불씨잡변 佛氏雜辨》을 저술하여 배불숭유(排佛崇儒)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9월에 진법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 수복계획을 추진하던 중 이방원의 기습을 받아 희생되었다.

죄명은 세자 방석(芳碩)에 당부(黨附)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하였다는 것이었다. 이를 공소난(恭昭難)·무인난(戊寅難) 혹은 제1차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정도전(鄭道傳)

1342(충혜왕 복위 3)∼1398(태조 7). 고려말 조선초의 정치가·학자.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그는 문인이면서 동시에 무(武)를 겸비하였고, 성격이 호방하여 혁명가적 소질을 지녔으며, 천자(天資)가 총민하여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군서(群書)를 박람하여 의론(議論)이 정연하였다 한다.

그는 개국과정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한(漢)나라 장량(張良)에 비유하면서, 한고조(漢高祖:劉邦)가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하였다고 하면서 실질적인 개국의 주역은 자신이라고 믿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노약노비(老弱奴婢)약간명을 상속받았을 뿐이며, 오랫동안 유배·유랑 생활을 보내면서 곤궁에 시달렸다. 더욱이, 그의 부계혈통은 향리(鄕吏)의 후예로서 아버지 때에 이르러 비로소 중앙관료의 벼슬다운 벼슬을 하였을 뿐이며, 어머니와 아내가 모두 연안차씨(延安車氏) 공윤(公胤)의 외예얼속(外裔孽屬)이었으며, 특히 모계에 노비의 피가 섞여 있었다.

이러한 혈통 때문에 구가세족이나 명분을 중요시하는 성리학자들로부터 백안시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3노가(奴家)의 하나로 세인의 평을 얻게 되었다. 그와 건국사업을 함께 한 조영규(趙英珪)·함부림(咸傅霖) 등 개국공신과 태종 때의 중신 하륜(河崙)역시 연안차씨의 외척 얼손(孽孫)으로서, 조선왕조 개국에는 신분적 하자가 큰 인물들이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준(趙浚), 1398년(태조 7)제1차 왕자의 난(戊寅靖社, 혹은 鄭道傳亂)때 백관을 이끌고 적장(嫡長)을 후사로 정할 것을 건의하여 정종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도와 정사공신(定社功臣)1등에 피봉되었다.


○정종 이방과, 1398년 8월 정안군 방원(靖安君芳遠)이 주동이 된 제1차왕자의 난이 성공하면서 세자책봉문제가 제기되자 “당초부터 대의를 주창하고 개국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업적은 모두 정안군의 공로인데 내가 어찌 세자가 될 수 있느냐?”라고 하면서 완강하게 거절하였으나 정안군의 양보로 결국은 세자가 되었다. 그 1개월 후 태조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태조의 양위는 자의에 의하였다기보다는 타의에 의하여 반강제적으로 이루어졌지 않았느냐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정종은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안군의 양보로 즉위하였으므로 무력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정종조의 정치는 거의 정안군의 뜻에 의하여 전개되었다.


○우현보(禹玄寶), 1398년(태조 7) 정도전(鄭道傳)일파가 제거된 뒤 복관되었다.

이듬해 단양백(丹陽伯)에 봉하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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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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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숨가쁜 왕자의 난을 겼으셨던 익원공 선조님의 당시의 심적 갈등과 고뇌를 잘 엿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이 당시 익원공의 심리를 읽을 수 있는 문집이 있을 법한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