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난계 함부림 선생 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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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6-04-05 20:52 조회1,670회 댓글1건본문
난계(蘭溪) 함부림은 저의 18대조부님인 諱 季老의 장인입니다.
문의 하신 내용에는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외조부님에 대하여 공부하는 마음으로 행장을 옮겨보았습니다.
蘭溪公行狀(난계공행장)
公의 諱는 傅霖이고 字는 潤物이요, 蘭溪는 그 號이다. 咸氏는 後孫 兵部侍郞 諱 淳(字:子眞)에 이르러 江陵에 와서 살게 되니 子孫이 이에 따라 籍을 江陵으로 하고 累代後에 知製敎 諱 濟에 이르렀고 判密直 諱 石柱는 淸白史요. 寶文閣提學 諱 承慶은 公의 三世이다. 提學公의 配는 江陵崔氏인데 芮 城君 宜茹의 딸이다. 公을 낳으니 生質이 英妙하고 通敏하여 일찍이 분발하여 뜻을 爲己의 學에 두어 鄭圃隱先生에게 배웠고 또 吉冶隱과 權陽村과 교류하였으며, 恒常 殷나라 어진 政丞 傳說을 사모하여 『傅』字로 이름하였다. 때마침 高麗末期 國政이 混亂때라 公이 뜻을 濟世에 두어 李太祖가 得國을 하게 됨에 功三等에 策封되었고 翊戴開國功臣으로 賜號되었다. 癸酉年科擧에 올라서 禮曹儀郞이 되었고 外職으로는 永川 慶州를 지남에 훌륭한 功績이 많았다. 甲申에 內職으로서 議政府事와 또 司憲府 大司憲을 지냈으며 間間이 京畿 忠淸 慶南 全羅 黃海道觀察黜陟使와 東北面都巡問察理使를 역임하였다. 恒常 澄淸으로 自任하고 兵器를 가진 위엄에 좌절하거나 動搖하지 않으니 一路가 두려워 服從하였다. 庚寅에 資憲左散騎常侍兼尙瑞少尹寶文閣提學에 올라 東原君에 封했고 刑曹 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永樂 庚子에 逝去하시니 其生이 庚戌이니 五一歲가 된다. 訃告가 들림에 왕께서 크게 슬퍼하여 三日間 朝會를 받지 아니하고 賻儀와 葬禮를 禮와 같이 하시고 특히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을 주시고 諡를 定平이라 下賜하고 墓를 廣州牛井洞戌坐에 封했고 繼配 延安李氏와 合祔하고 元配 漢陽趙氏는 同山異兆로 하였다.
四男과 一女가 있으니 禹治는 觀察使요, 禹功은 府使요, 禹禮는 參議로 禹相은 參奉이요, 婿 金繼老(金季老의 오기. 金季老는 군사공 諱 七陽의 孫)는 府尹이요, 孫 永勳은 判書요, 興達은 進士인데 모두 賢行이 있었다.
公이 剛直하고 嚴格해서 朝政에 들면 直言하시고 政事에 능하여 이르는 곳 마다 직분을 다한고로 임금께서 아시고 높은 자리를 주었다. 太宗께서 어느날 廣延樓에서 中國으로 使臣가는 南在 朴訔 李升商을 보내고 사신에서 돌아온 公과 楔眉壽 盧閈等의 還朝를 歡迎하는 자리에 宰執(宰相地位)인 李天佑 李茂 李來 孟思嗽과 술을 마실 때에 술에 취하여 글짓기 놀이에 공이 나와서 읊으시기를 『儀表四方에 歸一德:主上의 명을 받들고 간後 우리 사신들 행동이 중국 사방에 미쳤으니 오직 주상의 덕입니다.』主上이 곧 이어 답하시기를 『問關萬里에 爲三韓: 험한 길 만리를 잘 다녀온 것은 삼한 땅 이 나라를 위한 것이다』왕께서 곧 두 왕자에 명하여 술잔을 돌리게 하여 한껏 즐기고 파하였다. 公이 逝去하심에 주상께서 祭文을 下賜하여 공에게 祭祀해 가로되 『淳儉한 바탕으로서 英雄的이고 勇猛스러운 재질로 삼십여년을 潛邸에 侍從하였고 陣中에서는 신명을 다해 服務했고 내 몸을 護衛할 때는 몇 번이고 生覺하며 했으니 나는 그를 마치 내 手足같이 부렸노라』고 하였으니 이에서 可 히 君臣間의 교분을 알겠도다. 공은 안으로 確實하고 밖으로는 和合하여 말이 적고 寬容했고 학문이 두텁고도 넓으므로 朝鮮初創期에 事戀이 많았고 또 鄭道傳과 李叔蕃의 亂을 만났으나 義로서 命을 세우고 知로서 세상을 돕고 모든 정신을 험난한 시기에 다했고 公의 몸을 誹謗과 稱讚을 밖에 두고서 그래도 功名으로서 世上을 마쳤으니 참으로 장하지 않으랴 公은 鄭圃隱과吉冶隱 두 賢人을 스승삼아 義理를 講明하였으니 어찌 한길로 돌아가고자 하지 않았으리오만은 天命과 인심이 가고 오는 사이에 經과 權에 다름이 있나니 세상에서 공을 論하는 자가 공의 심리를 추적해 보건대 공이 처한 그 시기의 불행을 어찌 슬퍼하지 않으리오. 日月의 빛을 받아 개혁에 참여하였다면 마땅히 높이 등용되어 그 포부를 마음껏 펴 마치 黃翼成이나 沈德符와 같이 되었을 것을 아깝게도 短命이 厄이 되어 그 德業을 충족시키지 못했고 또 뒤을 잇는 이가 변변치 못하고 文獻도 證憑할 것이 없어서 공으로 아는 자가 또한 적으니 더욱 可惜한 일이로다. 공의 後孫 潤瑛이 公私間의 國史와 野乘을 모아 가지고 나에게 보이면서 行狀을 請하기에 내 이미 늙어 筆硯을 멀리한지 오래되었으나 그 성의에 감동되어 병을 무릎쓰고 右와 같이 狀德의 文을 삼가 쓰노라.
西紀一八四四年甲辰仲夏
唐城 洪直弼 撰
▲ 난계 함부림선생 묘역 전경 : 경기 이천시 호법면 안평리
▲ 묘비 ▲ 신도비
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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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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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대부님, 여러 모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咸氏는 後孫 兵部侍郞 諱 淳(字:子眞)에 이르러 江陵에 와서 살게 되니 子孫이 이에 따라 籍을 江陵으로 하고-
함자진 선생의 관향은 양근(현 양평)인데, 그 후손이 강릉을 관향으로 삼은 이유를 알겠습니다. 함자진 선생은 일찌기 관동지방의 수령으로 나가 선정을 베푼 적이 있습니다.
함자진 선생의 본명은 함순인데, 묘지명에 함수로 나타납니다. 아마 후에 개명한 것 같은데 그 사실은 잘 안 알려진 듯합니다.
이외에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있는데 대부님 덕에 강좌 7현에 대한 정보들을 찾아가는 귀중한 자료를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