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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간공(김승택)사위 광산김씨 김광재 묘지명, 김태현 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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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1-05 16:08 조회1,62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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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재묘지명(金光載墓誌銘)

 

송당선생 김공묘지명 병서(松堂先生 金公墓誌銘 幷序)   -목은 이색 지음-

지정(至正) 신사년(충혜왕 복위2, 1341) 나(이색)는 14세로 성균시(成均試)에 응시했다. 그때 뜰에서 선생이 관복(袍笏)을 갖추고 단정히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우뚝 솟은 태산처럼 엄숙하여 여러 선비들이 숨소리를 죽이고 감히 떠들지 못하였다. 그후 문생(門生)이 되어 오가며 가르침을 들었다. 따뜻한 말과 부드러운 낯빛으로 나라의 법도를 밝히고 인재를 이끄는데에 부지런히 힘썼고 풍속이 날로 쇠퇴해가는 것을 탄식하셨다. 집안에서는 재산을 모으는데 힘쓰지 않고 좌우에 거문고와 책을 가까이하며 담박하였다. 동쪽 언덕에는 소나무를 심고 남쪽 연못에는 연꽃을 키웠다. 매년 뜰에 목단꽃이 피면 술과 음식을 갖추고 문생들을 불러놓고 대부인(大夫人)에게 장수를 기원하고, 형제와 자손들이 화기애애 하였다. 효성과 우애의 지극함이 천지신명에게 통하여 대부인(大夫人)은 91세의 나이를 누렸으니 참으로 성대한 일이었다.
병신년(공민왕 5, 1356) 3월 대부인(大夫人)께서 병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 문정공(文正公) 묘 곁에 장사지내고 그 곁에서 복제(服制)를 마치었다. 선생은 평소 병이 있어 행보가 힘들었지만 조석으로 음식을 올리고 청소하는 것을 반드시 직접하며 조금도 빠뜨리지 않았다. (지금) 나라의 풍속에 부모의 무덤 지키는 것을 노비에게 대신하게 하고 그들의 신역(身役)을 면제해주었다. 선생은 차마 부모에게 가볍게 할 수 없다고 하여 직접 행하였다. 근래의 재상들에게서 듣지 못한 일이다.
선생의 성은 김씨, 이름은 광재(光載), 자는 자여(子輿), 호는 송당거사(松堂居士)이다. 광주(光州)사람인 사공 김길(司空 金吉)의 후손이다. 사공(司空)은 태조를 도운 공이 있었다. 그의 먼 후손은 중랑장(中郎將) 광서(匡瑞)이다. 중낭장이 삼사사(三司使) 위(偉)를 낳았다. 삼사사는 대장군(大將軍) 경량(鏡亮)을, 대장군은 감찰어사 수(須)를 낳았다. 원종초 삼별초(三別抄)가 (고려가 원에) 복속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반란을 일으켜 해도(海島)에 들어갔다. 어사(須)가 영광(靈光)을 지키다 죽었다. 어사는 국자좨주(國子祭酒) 고영중(高瑩中)의 손자인 몽경(夢卿)의 딸과 결혼하였다. 고씨는 102세까지 살았다. 처음에 고씨가 샛별(明星)이 가슴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서 쾌헌선생(快軒先生)인 문정공(文正公) 태현(台鉉)을 낳았다. (문정공)은 네 임금을 섬긴 원로로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고문역할을 하였으며, 정승으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국초이래 문장을 모아 『해동문감(海東文鑑)』이라고 이름 붙였으며, 지금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성균시를 관장하고 예부시(禮部試)의 지공거(知貢擧 : 과거 고시관)를 역임하였다. 뽑은 선비 가운데 이름난 사람이 많았다. 죽계 안근재(竹溪 安謹齋 : 安軸)와 최졸옹(崔拙翁 : 崔瀣) 등이 특히 뛰어난 사람이다. 행수낭장(行首郎將) 김의(金儀)의 딸이 첫 부인이며, 아들 하나를 두었다. 광식(光軾)으로 벼슬이 선부의랑(選部議郞)에 올랐다. 태조 아들 효은태자(孝隱太子) 후손인 시랑(侍郞) 왕정단(王丁旦)의 딸을 둘째 부인으로 맞아들여 3남 2녀를 두었다. 큰 아들 광철(光轍)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밀직사(密直使)에 올랐다. 둘째가 선생(光載)이며, 셋째는 광로(光輅)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큰 딸은 정당문학(政堂文學) 안목(安牧)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밀양군(密陽君) 박윤문(朴允文)에게 시집갔다. 공의 형제 세사람이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대부인(大夫人)은 평생토록 나라로부터 녹을 받았다. 박씨(둘째 사위)의 아들 넷과 안씨(첫재 사위)의 손자 셋도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당시 사람들이 부러워하였다.
공은 지원(至元) 갑오년(충렬왕 20, 1294) 정월 갑자일에 태어났다. 태어났을 때 키가 두 자가 넘어, 부모가 기특하게 생각하여 특별히 사랑하였다. 관례(冠禮)를 치르고 나서 황경(皇慶) 계축년(충숙왕 즉위, 1313) 과거에 급제하였다. 좌주인 일재선생 권정승(一齋先生 權政丞 : 權漢功)은 공이 예의가 밝은 것을 사랑하여 후하게 대하고 성균학관(成均學官)으로 임명하였다. 지순(至順) 경오년(충혜왕 즉위, 1330) 충혜왕(忠惠王)을 따라 원나라 수도에 간 공으로 사복시승(司僕寺丞)에 임명되고 곧 도관정랑(都官正郞)으로 옮겼다.
후지원(後至元) 기묘년(충숙왕 복위8, 1339) 충혜왕이 조적(曹頔)에 폐위될 뻔 했다가 다행히 이겨냈으나, 그의 무리가 많이 (원나라) 권세가들에 붙어 자신들의 뜻을 이루고자 하였다. 왕이 원나라의 수도에 갈 때에 공은 ‘우리 임금이 위태롭다. 내가 차마 혼자만 면할 수 있겠는가’하고 따라 갔다. 천자의 은덕에 힘입어 (충혜왕이) 왕위를 회복하고 고려에 왔다. 경진년(충혜왕 복위1, 1340) 가을 7월이었다. 군부총랑(軍簿摠郞)으로 관리를 임명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성균제주 삼사좌윤 판전교시사(成均祭酒 三司左尹 判典校寺事)로 관직을 옮겼지만 항상 관직(館職)과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 다음해 가을 성균시를 주관하여 지금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인 성사달(成士達) 등 99인을 뽑았다. 당시 선비를 잘 뽑았다고 칭송되었다. 충혜왕이 평소에 공의 엄격함을 꺼렸고 (왕의) 주변도 공을 싫어하였다. 핑계댈 말이 없어 결국 ‘김공은 고요함을 사랑하며 벼슬에 나서는 것은 그의 뜻이 아니다’라고 말하니 왕이 그것을 믿어 공의 관직을 옮기게 하였다. 군소(群小 : 소인배)들이 더욱 날뛰었다. 계미년(충혜왕 후4, 1343) 겨울 악양(岳陽)의 화(禍)가 일어나 충혜왕이 별세하였다.
갑신년(1344)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여 공을 우부대언(右副代言)에 등용하고 곧 지신사(知申事)가 되었다. 권력을 잡은 대신이 자신에게 아부하지 않은 것을 미워하여 왕에게 아뢰어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임명되었다. 얼마 후 왕이 후회하여 곧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임명하고 관리 뽑는 일을 맡게 하였다.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승진하였다.
기축년(1349) 충정왕(忠定王)이 즉위하여 서연(書筵)을 열고 공을 스승으로 삼았으나, 공은 사양하였다. 첨의부(僉議部)에 들어가 평리(評理)가 되고, 광정대부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匡靖大夫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 上護軍)으로 관리 뽑는 일을 맡았다. 곧 바로 삼사우사(三司右使)로 관직이 바뀌었다. 왕에게 들어가 아뢰기를 ‘문관의 인사는 이조(吏曹)에서 관장하고 무관의 인사는 병조(兵曹)에서 관장하는 것인데, 정방(政房)에서 이를 모두 관장한 것은 권신(權臣)들이 시작한 것으로 훌륭한 제도가 아닙니다. 전하께서 신의 말을 들어 옛 제도대로 하면 편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따르면서, 반드시 공정해야 한다고 하면서 공에게 전리판서(典理判書)를 겸직하게 하였다.
신묘년(충정왕 3, 1351) 겨울 10월 현릉(玄陵 : 공민왕)이 왕위를 계승하자 공은 두문불출하며 대부인(大夫人)인을 봉양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예를 다하였다. (대부인이 돌아가셔서) 여묘(廬墓)살이를 마치자, 시중 홍양파선생(洪陽坡先生 : 洪彦博)과 당시 재상들이 가서 위로하자, 공은 ‘나의 나이 예순 셋인데 처음 이곳에 살면서 하루아침에 몸이 아침이슬처럼 먼저 죽어 친척들에게 부끄러움이 될까 늘 걱정하였는데 (다행히)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덕’이라고 하면서 말을 마치고 눈물을 흘렸다. 여러 사람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탄복하였다. (여묘살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신주[版位]를 집 북쪽 모퉁이에 놓고서 제사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그치지 못하였다.
오랜 병으로 문밖에 나서지 못하였다. 공민왕이 그의 명성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공에게 ‘공과 함께 얘기하고자 생각한지 오래되었으나, 과인을 만나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공이 황공하여 아들과 조카들의 부축을 받고 궁궐에 들어갔다. 왕은 ‘나이와 얼굴은 그렇게 쇠하지 않았는데, 병이 있는 것이 어쩐 일인가’하면서 오랫동안 안타까워 하였다. 관리들에게 명령하여 사는 곳을 영창방 효자리(靈昌坊 孝子里)로 하고, 그 마을의 몇몇 호에게 조세를 면제해주고 제사지내는 것을 돕게 하였다.
신축년(공민왕 10, 1361) 겨울 11에 홍건적을 피하여 고창현(高昌縣 : 지금의 경북 안동지역)에 가서 계속 그곳에 머물러 살았다. 계묘년(공민왕 12, 1363) 봄 3월 작은 병에 걸렸는데, 기동하고 말하는 것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14일 째가 되자 부인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제 일흔넷이니 무엇을 한스럽게 생각하겠는가. 남자는 부인의 품에서 죽지 않는 것이 예에 맞으니 여러 비와 함께 물러가시오. 또 큰 소리와 빠른 말로 나를 소란스럽게 하지 마시오’라 하고 조금 있다 죽었다. 평소 (스스로를) 수양한 것을 알 수 있다. 아들과 사위가 관을 모시고 서울로 돌아와 아무 달(某月) 갑자에 덕수현(德水縣) 선영(先塋)에 장사지냈다.
공은 문하평장(門下平章) 양간공(良簡公) 김승택(金承澤)의 따님과 결혼하여 자식 둘을 두었다. 아들 흥조(興祖)는 쾌활하며 큰 뜻을 가졌다. 벼슬이 중현대부 군기감(中顯大夫 軍器監)에 올랐고, 수원과 해주 지방관을 역임하여 그 치적이 두드러졌다. 취성(鷲城 : 辛旽)의 손에 죽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이를 안타까워하였다. 딸은 봉선대부 내부부령(奉善大夫 內府副令) 박문수(朴門壽)에게 시집갔다.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후손이다. 손자는 남녀 약간명이 있다. 군기감(흥조)은 감찰대부 신중전(申仲全)의 딸과 결혼하여 딸을 낳았는데, 낭장 송의번(宋義番)에게 시집갔다. 내부부령(박문수)은 두 아들을 낳았다. 큰 아들 총(叢)은 학문을 좋아하고 뜻을 키웠는데 전봉선대부 좌우위 보승호군(前奉善大夫 左右衛 保勝護軍)이다. 작은 아들 포(苞)는 진사로 전의녹사(典儀錄事)이다. 외증손(外曾孫)도 약간 있으나, 모두 어리다. 호군(護軍 : 외손자 총)이 공의 행장을 주며 한산 이색(韓山 李穡)에게 묘지명을 요청하면서, ‘그대가 마땅히 묘지명을 지어야 할 것’이라 하였다. 이에 묘지명을 지었다.
아아, 선생의 덕행과 정사(政事)가 이같이 두드러지니 그 자손이 마땅히 많아야 하는데, 군기감(軍器監)에게 후사가 없으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 일정하지 않은 것이요 하늘의 좋아하고 미워함이 사람과 다른 때문이다. 아아 슬프도다. 다행히 박씨(사위)가 남았는데 선비가 공을 세워 그의 외할아버지를 드러낸 사람이 역사에 적지 않다. 박씨는 힘써야 할 것이다. 힘써야 할 것이다.
명(銘)에 이르기를
동쪽에 언덕 있어 소나무 푸르니 군자의 집이다.
연못에 물 가득하여 연화 향기 맑으니 군자의 덕이로다.
나가서 임금 섬김에 정치와 문장으로 우리 왕국 바로잡았고
들어와 부모를 모시는데 나이 들수록 더욱 참되어 우리 민속(民俗)을 교화시켰다.
선생의 명성이 해동에 가득하여 영원토록 모범이 되리니.

 

 

김태현묘지명(金台鉉墓誌銘)

김문정공(金文正公) 묘지

공의 이름은 태현(台鉉)이고, 자는 불기(不器)이며, 성은 김씨(金氏)이다. 본래 광산(光山)의 망족(望族)으로, 개국 초기부터 벼슬하여 대대로 끊이지 아니하였다. 증조 신호위중랑장(神虎衛中郞將) 광세(光世)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증되고, 조부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 경량(鏡亮)은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 감찰어사(監察御史) 수(須)는 여러 차례 추증되어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시중은 일찍이 충헌왕(忠憲王, 高宗) 을묘년(고종 42, 1255 )에 진사제(進士第)에 급제하였는데, 성품과 용모가 훌륭하고 아름다웠으며 담력과 지략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 중앙과 지방의 관직에 종사하면서 청렴하고 유능하다는 평판이 있었다. 지원(至元) 기사년(원종 10, 1269)에 어사(御史)를 거쳐 지영광군주사(知靈光郡州事)로 나갔다. 이듬해에 삼별초(三別抄)가 난을 일으켜 강도(江都, 江華)의 인물을 약탈하고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며 먼저 탐라(耽羅)를 점거하려 하였으므로, 본국에서 장군 고여림(高汝霖)을 파견하여 쫓아가 토벌하도록 하고, 또 전라도 선정관(全羅道 選正官)에게 문서를 내려보내 사람들이 평소 믿고 따를 수 있는 자가 군사를 이끌고 함께 나가라고 하였다. 시중이 그 선발에 뽑히자 집에서 숙식을 하지 않고 드디어 초군(抄軍)과 함께 급하게 가서 고여림과 탐라에서 만났다. 적들이 아직 진도(珍島)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탐라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이에 밤낮으로 성벽을 쌓고 병기를 수리하며 내습로를 끊어서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지키는 사람들이 겁을 내어 움추리고 힘을 다하지 아니하니 적이 다른 길을 거쳐 이르렀는데도 깨닫지 못하였다. 시중이 평소와 같이 대의(大義)로써 사졸을 격려하니 사람들이 크게 감동하여 용기를 백 배나 더하여 용감하게 소리치며 다투어 달려나가 적의 선봉을 거의 다 죽였다. 그러나 토착지방민[土人]들이 적을 도와주게 되니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고 장군과 함께 진중에서 전사하고 돌아오지 못하게 되어서 사람들이 지금까지 원통하게 여기고 있다.
공은 10세에 부친을 잃었다. 대부인(大夫人)은 작고한 예빈경(禮賓卿) 고정(高侹)공의 딸로 영광에서 아버지를 잃은 자녀들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와 법도에 맞게 가르치니, 공도 생각을 고쳐서 독서에 힘썼다. 14세가 되자 숙부이자 작고한 재상인 문숙공(文肅公, 金周鼎)을 따라가 과거시험 공부를 하였는데, 문숙공이 그가 지은 사부(詞賦)가 뛰어난 것을 보고 “우리 가문을 크게 떨칠 사람은 너로구나. 우리 형님은 돌아가시지 않았도다” 라고 하였다. 15세에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여 한 번에 으뜸으로 합격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또 예부시(禮部試)에 나가 진사에 급제하였다. 정축년(충렬왕 3, 1277)에 녹원사(錄苑事)가 되었다가 뒤에 강음목감직(江陰牧監直)이 되었으며, 얼마 있다가 첨사부녹사(詹事府錄事)가 되었다. 경진년(충렬왕 6, 1280 ) 여름에 전시(殿試)에 급제하여 좌우위참군 겸 직문한서(左右衛叅軍 兼 直文翰署)에 제수되었다. 이로부터 7년 동안 모두 세 차례 관직이 바뀌면서 7품에 이르렀다. 모두 문한(文翰)으로 이름이 났다.
무자년(충렬왕 14, 1288)에 밀직당후관(密直堂後官)을 거쳐 권지통례문지후(權知通禮門祗候)가 되었다. 얼마 뒤 우정언 지제고(右正言 知制誥)에 제수되고,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은비(銀緋)를 입고 감찰시사(監察侍史)로 옮겼다가 금자(金紫)를 하사받았다. 기거랑(起居郞)으로 바뀌었다가 기거주(起居注)를 거쳐 첨의사인(僉議舍人)에 제수되었으며, 전법총랑(典法摠郞)으로 바뀌면서 조현대부(朝顯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대덕(大德) 무술년(충렬왕 24, 1298) 봄에 덕릉(德陵, 忠宣王)이 내선[內讓]을 받아 왕위를 계승하자 공의 잘못을 면해 주었다. 가을에 덕릉이 (원의) 조정에 들어가고 충렬왕(忠烈王)이 복위하자 판도총랑(版圖摠郞)에 기용되고, 전중윤(殿中尹)으로 옮겼다가 여러 차례 옮겨 밀직우승지 판사재사 문한시독 사관수찬 지제고 지군부감찰사(密直右承旨 判司宰事 文翰侍讀 史館修撰 知制誥 知軍簿監察司)가 되었으며, 조봉·중열(朝奉·中列) 2대부(大夫)가 더해졌다.
경자년(충렬왕 26, 1300)에 봉익대부 밀직부사 겸 감찰대부(奉翊大夫 密直副使 兼 監察大夫)에 제수되고, 신축년(충렬왕 27, 1301 )에 왕명을 받들어 천수성절(天壽聖節)을 축하하는 사신으로 상도(上都)로 들어가게 되었다. 마침 성종(成宗)이 삭방유수(朔方留守)로 친행(親行) 중에 있었으므로, 성(省)에서 각국 사신들에게 군사일에 관한 긴급한 일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상도에) 머물러 있으라고 조칙을 내렸다. 공이 성에 나가 “우리 나라가 귀국을 섬긴 이래 해마다 보내는 축하사절을 일찍이 빠뜨린 일이 없는데, 이제 여기에 머물러서 나아가지 못하게 하니 참으로 매우 황공한 일입니다”라고 하니, 드디어 상도를 떠나 북으로 가기를 허락받았다. 1년 동안 한 역[站] 한 역을 지나면서 행재소(行在所)에 도달하여 성절(聖節)을 맞이하였다. 조복(朝服)을 갖추어 하례를 올렸는데 의식이 궁궐의 연회에서 행하는 것과 같으니, (황제가) 멀리서 왔다고 하여 특별히 어식(御食)을 내려주면서 총애하였다. 당시 황제가 친히 적을 정벌하여 물리쳤는데, 공이 먼저 황제의 기쁜 소식을 가지고 돌아오니 이르는 곳마다 모두 경하하였다.
동지지사사(同知知司事)에 오르면서 문한승지(文翰承旨)직을 겸대하고, 또 원에서 황제의 명[宣命]으로 승무랑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承務郞 征東行中書省 左右司郎中)을 제수받았다. 밀직사사(密直司使)로 옮기면서 대보문(大寶文)을 겸하였고, 광정대부(匡靖大夫)로 바뀌었다. 을사년(충렬왕 31, 1305)에 첨의부(僉議府)에 들어가 지사사(知司事)가 되고, 병오년(충렬왕 32, 1306 )에 또 천수절(天壽節)을 축하하러 원에 갔다가 돌아왔다. 이 때 충렬왕이 상도에 있으면서 신하를 만나고 있었는데, 무술년(충렬왕 24, 1298)에 복위한 때로부터 나라 사람들이 파당을 나누어 부자의 정을 서로 통하지 못하도록 하기에 이르렀다. 공이 그 사이에서 중재를 하였는데, 한결같이 공정하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다른 말을 하지 못하였다.
정미년(충렬왕 33, 1307) 봄에 덕릉이 인종(仁宗)을 거들어 내부의 난을 평정하니 공(功)이 천하에 높았으므로, 본국의 신하로서 임금에게 다른 마음을 품은 자는 모두 떠나갔다. 위로는 이부(二府, 僉議府와 密直司)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관리에 이르기까지 혹은 죽이기도 하고 혹은 유배보내기도 하면서 모두 바꾸었으나, 홀로 공만을 유임시켜 다시 지밀직사(知密直司)로 삼았는데, 여름에 밀직이 혁파되자 자의찬성사(咨議贊成事)가 되었다.
지대(至大) 무신년(충렬왕 34, 1308)에 충렬왕이 승하하고 덕릉이 즉위하자 대신들을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어 백성을 생활을 살피고 호적을 정리하려 할 때에, 공을 양광수길도 계점사 행수주목사(楊廣水吉道 計點使 行水州牧使)로 삼았다. 각도에서 첨의사(僉議司)에 글을 올려 적용할 법규를 요청하였으나 첨의사에서는 정해진 것이 없었으므로 회송문서에다 매번 마땅히 양광수길도의 1도에서 정한 예에 따라 시행하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모두 관리를 보내어 그 법을 배워 갔다.
기유년(충선왕 1, 1309) 여름에 다시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어 2년 간 재임하다가, 삼사(三司)가 혁파되자 대광 상의찬성사(大匡 商議贊成事)가 되었다. 신해년(충선왕 3, 1311)에 또 상의(商議)의 관직을 없애니 관례에 따라 물러나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벼슬 없이 한가하게 지낸 것이 10년이었다. 신유년(충숙왕 8, 1321)에 기용되어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다가 곧 판삼사가 되고, 관계(官階)는 중대광(重大匡)에 이르렀다.
연우(延祐) 말에 덕릉이 토번(吐蕃)으로 가게되는 일이 벌어지고, 지치(至治) 초에 상왕(上王)이 원에 들어와 머물게 되자 나라에서는 파당의 논의가 일어났다. 당시 총재(冢宰)는 임금을 수행하여 갔으므로 공이 이부(二府)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나 아래에 있는 관리들이 오히려 나라의 권력을 장악한 채 서로 마음을 합하지 않았으므로, 일이 있을 때마다 모두 의견이 엇갈리게 되었다. 그러나 끝내 나라가 잘못되지 아니한 것은 오직 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정(泰定) 갑자년(충숙왕 11, 1324)에 상왕이 다시 복위하게 되자 여러 가지가 다시 바뀌게 되면서 공을 파면시키고자 하였다. 임금은 “이 노인은 시종일관하여 다른 뜻이 없는 분이니, 내쫓는 것은 옳지 않소” 라고 하였으나, 권력을 잡은 자로 어리석게 찬동하는 자가 있어서 마침내 파직되었다. 이듬해에 임금이 귀국하자, 삼중대광첨의정승(三重大匡 僉議政丞)으로 벼슬을 물러나 은퇴하였다.
이 해에 대부인의 나이가 100세였으므로 해마다 30석(碩)의 곡식을 하사받았다. 정묘년(충숙왕 14, 1327)에 관호를 다시 바꾸었으므로 삼중대광 첨의중찬 수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 판전리사사(三重大匡 僉議中贊 修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 上護軍 判典理司事)가 되어 그대로 은퇴하였다. 이 때에 대부인이 작고하니 나이가 102세로서, 특별히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으로 추증하였다.
지순(至順) 경오년(충숙왕 17, 1330) 봄에 국왕<충혜왕>이 지위를 이으라는 명을 받게 되니, (원의) 조정에서 객성(客省)에 70명의 날랜 군사[堅]를 보내어 금인(金印)을 가져오게 하면서 공을 권행성사(權行省事)로 임명하였다. 공이 거듭하여 그 명을 받지 않자 또 서사(署事, 署行省事)로 기용하였다. 조정의 사신이 2월 2일에 돌아가고 29일이 되자 당시 재상들이 순군(巡軍)에 모여 앉아 전 임금의 명령이라 하여 공을 소환하였다. 공이 도착하자 승상의 관인(官印)을 몰수하고 성부(省府)에서 공을 축출하였다. 명에 따라 귀가하여 몇 달을 특별하게 하는 일 없이 보내다가, 4월에 식구들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금강산(金剛山)을 유람하였는데, 대개 의혹을 피하고자 한 것이었다. 5월에 임금의 사신이 상도(上都)로부터 와서 당시의 재상이 마음대로 승상인(丞相印)을 빼앗은 것을 질책하면서, 좌우의 담당 관리를 파직하고 모든 월봉(月俸)을 정지시켰다. 임금의 명을 받은 관리 한 명을 파견하여 산에 다달아 명을 전하니 공은 역마(驛馬)를 타고 서울로 돌아와 다시 서성사(署省事)가 되었으나, 즐겨 한 일은 아니었다. 7월에 병환의 기운이 있어 약으로 다스렸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고 10월 6일 계축일에 집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70세이다.
공은 성품이 청렴하고 공평하였으며 생김새가 뛰어나고 단정하였다. 말과 행동거지가 예법을 따랐으므로 사람들이 보기에는 가히 근접할 수 없을 것 같으나, 한 번 접해보면 목소리와 기색이 따뜻하면서도 부드러운데도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대부인을 섬기며 효도를 다하였고, 부인을 대하면서도 예의를 지켰다. 자손을 가르치는 데에도 방정함이 있었고, 친척과도 매우 화목하여 말을 하지 아니하여도 화합하였다. 사람들과 더불어 함부로 교유하지 않았고 또한 원한을 가진 사람도 없었으며, 이부(二府)에 재직할 때나 파직되어 한가로이 있을 때나 손님이 오고가는 것에는 더함이나 줄어듬이 없었다. 평소에 일이 없을 때에도 이른 아침에 일어나고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으며, 낮에 눕는 일이 없었고 더워도 웃옷을 벗는 일이 없었으며, 비록 발[簾]을 드리운 곳에 있을 때라도 옷깃을 여미고 단정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서 엄정하고 공손하였다.
나이가 어려서 내시(內侍)에 들어가서 감창시(監倉寺)의 명을 받았을 때, 번잡한 일을 현명하게 처리하니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도 미치지 못하였다. 대간(臺諫)에 참여하였을 때에는 말한 것이 모두 원대한 계책이 되었으며, 충청·경상(忠淸·慶尙) 2도(道)의 안찰사(按察使)와 동계 안집사(東界 安集使)로 나갔을 때에는 감옥의 일과 소송을 공평하게 처리하여 이익은 늘리고 손해는 줄이는 일을 즐겨하였으니, 당시에 이미 나라를 잘 다스리고 백성들을 구제하리라 기대되었다.
세 임금<忠烈·忠宣·忠肅>을 두루 섬기면서 행동을 예의바르게 하였으며 일찍이 실낱만큼의 실언(失言)도 없었다. 역대(歷代)의 전고(典故)를 마치 어제 일처럼 환하게 알고 있어서, 매 번 나라에서 크게 의심스러운 일이 있을 때마다 (공을) 찾아가서 바로 잡고는 하였다. 저술은 문장[詞]의 가르침이 체(體)를 이루고 있었으며, 시(詩)는 맑으면서도 고와서 가히 애송할 만하였다. 또 우리 나라 사람들의 글을 손수 모아서 『동국문감(東國文鑑)』이라 하였으니, 정수를 모아 배열한 것이라 할 만하다. 스스로 호를 지어 쾌헌(快軒)이라 하였으며 만년에는 또 설암(雪庵)이라고도 하였다. 일찍이 성균시(成均試)를 주관하여 이천(李蒨)등 70 명을 얻고, 예부시[禮闈]를 주관하여서는 박리(朴理) 등 30여 명을 얻으니, 당시의 이름난 선비들이 많이 그 중에 들어 있다.
공은 좌우위낭장(左右衛郎將) 김의(金儀)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일찍 세상을 뜨자, 다시 신호위낭장(神虎衛郞將) 왕단(王旦)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개성군대부인(開城郡大夫人)으로 봉해졌다. 어질게 능히 가정을 다스려서, 있고 없음으로 공을 혼란스럽게 하지 아니하였으며, 아들 3인을 모두 과거에 합격시켜서 나라에서 해마다 20석(石)의 곡식을 받았다. 공은 아들이 4명이고 딸이 2명인데, 첫 부인이 1남을 낳았고 나머지는 모두 후부인이 낳았다. 광식(光軾)은 갑오년(충렬왕 20, 1294 )의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이 총부의랑(摠部議郞)에 이르렀으나 먼저 사망하여 자식이 없다. 광철(光轍)은 을사년(충렬왕 31, 1305 )의 과거에 합격하여 지금 군부총랑 진현직제학(軍簿摠郞 進賢直提學)이며, 광재(光載)는 계축년(충선왕 5, 1313 )의 과거에 합격하여 지금 도관정랑(都官正郞)이 되었다. 광로(光輅)는 정사년(충숙왕 4, 1317 )의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결혼하기 전에 일찍 사망하여 관직은 가안부녹사(嘉安府錄事)에 그쳤다. 장녀는 전교령 예문직제학(典校令 藝文直提學) 안목(安牧)에게 시집가서 익양군부인(翼陽郡夫人)으로 봉해졌고, 차녀는 예문공봉(藝文供奉) 박윤문(朴允文)에게 시집갔다. 손자가 2명이 있는데 하나는 아무개로 별장(別將)이며, 다음은 아직 이름이 없다.
국왕이 어릴 때부터 (공의) 명성을 들었는데 즉위한 처음에 성(省)의 권임(權任)을 맡긴 것은 대개 다시 재상으로 삼아 국공(國公)이 되게 할 뜻이 있어서였다. 공이 병이 들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여 부의를 후하게 내리고 시호를 문정(文正)이라 추증하면서, 다시 담당 관청에게 비용을 쓰라고 명하였다. 11월 8일 갑신일에 덕수현(德水縣) 동쪽 풀이 많은 언덕[多草之原]에 장사지내면서, 두 아들이 공이 남긴 명(命)이라 하여 문인(門人) 최(崔) 아무개에게 묘지의 명(銘)을 부탁하였다. 아무개가 공을 섬긴 지 거의 30년이나 되는데 항상 송구스럽게도 보살핌을 비할 바 없이 받아 왔다. 드리워진 덕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도록 글을 짓는 일은 마땅히 능한 사람에게 미루어야 할 것이나, 공이 명하였으니 사양할 수 없어서 삼가 백 번 절하고 울면서 명(銘)을 짓는다.
명(銘)하여 이른다.
아, 문정공이여, 실로 나라의 원로이신데
이제 홀연히 가시니 어디에다 물어보아야 합니까.
산이 무너지고 들보가 부러졌고, 어질고 맑은 분께서 가시니
그 슬픔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공자(孔子)[宣尼]를 잃은 느낌입니다.
졸옹(拙翁) 최해(崔瀣)가 짓고, 자금어대(紫金魚袋) 김원준(金元俊)이 쓰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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